⊙ 인천 상륙 작전                    2019.12.16.월요일,맑음

1950년9월15일,

맥아더 장군의 1개 군단병력이 투입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 UN군은 방어 태세에서 공세 태세로 전환되었다.

1950년6월29일,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진격이 가속화되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한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이 남진을 계속할 경우 장차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이 한강전선을 시찰하고 복귀한 직후인 1950년7월 첫주에,

그의 참모장 알몬드 소장에게 하달한 지시와 더불어 조기에 계획이 진척되었다.

이 계획은 작전참모부장 라이트 준장이 이끄는 합동전략기획단에 의해 연구되었으며

 ‘블루하츠’라는 작전명이 부여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미 지상군의 참전이 결정된 나흘 뒤에 이미 일본에 주둔한 미 제1기병사단

으로 7월 하순에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할 수 있도록 상륙훈련을 지시하였다.

1950년7월4일에는,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상륙작전을 위한 최초의 공식회의가 소집되었다.

'블루하츠 계획'은 북한군을 38선 너머로 격퇴시키려 기도하고 작전일자를 7월22일로

하였으나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할 유엔군의 병력 부족으로 7월10일 경에 무산되었다.


이후 상륙작전 구상은 비밀리에 계속 추진되고 있었다.

합동전략기획단은 인천,군산,해주,진남포,원산,주문진 등 가능한 모든 해안지역을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결국 이들이 마련한 크로마이트 작전 계획 초안이 7월23일 완성되어 극동군사령부 관계자들에게 회람되었다.

맥아더 사령관이 상륙작전을 계획하자 극동군사령부는 세 가지 안을 제출하여 서해안 중

인천으로 결정하였고 잠정적인 D-Day는 9월15일이었다.

1950년 가을,

인천 해안에서 상륙작전이 가능한 만조일은 9월15일,10월11일,11월3일과 이 날짜를 포함한 전후 2~3일 뿐이었다.

10월은 기후관계상 상륙하기에 늦은 시기로서 가장 적절한 시기는 9월15일로 결정되었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의 기본 계획을 확정한 후 상륙부대의 편성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8월26일 상륙작전을 담당하게 될 제10군단을 공식적으로 편성하였다.

미 제10군단의 주요 부대는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보병사단이었다.

미 제7보병사단은 한국에 파병된 다른 부대에 많은 장교 및 기간 요원들을 차출 당하여

그 병력이 부족하자 한국 청년 8,000여 명을 선발하여 일본에서 훈련 시킨 후 배치시켰다.

이들이 바로 '카투사'의 시초였다.

한편 국군으로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부대는 제1해병 연대와 국군 제17연대였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맥아더의 계획은 9월9일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최종 승인되었다.

인천상륙에 앞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천지역에 대한 수로, 해안조건, 방파제 및 북한군 상황에 대한 정보수집 문제였다.

따라서 첩보대를 파견하여 인천연안에 대한 각 섬들과 해안을 정찰하여 관련 정보를 확보

하였다.

당시 인천 지역에는 월미도에 제226 독립육전연대 소속의 400여 명과 제918해안포 연대로 하여금 방어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으며, 인천시에는 제87연대가 방어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미 제10군단은 북한군의 인천 방어 병력을 약 1,000명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기에 앞서 상륙 부대는 양동 작전을 전개하였다.

1950년9월5일부터,

북으로는 평양에서부터 남으로는 군산까지,인천을 포함한 서해안의 상륙작전 가능 지역에 폭격을 실시하였다.

1950년9월12일부터는,

미국과 영국의 혼성 기습부대가 군산을 공격하고,

관문인 월미도를 제압하기 위한 폭격이 시작되었다.

1950년 9월14일과 9월15일,

동해안 전대는 삼척 일대에 맹포격을 가하며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제7합동기동부대는 미 제7함대 세력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 261척의 함정과 미 제10 군단

예하 한국군 2개 연대를 포함한 미군 2개 사단 등 총병력 7만여 명으로 구성된 지상군

부대를 통합 지휘하여

1950년9월15일 02:00시를 기하여,

인천 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상륙작전은 2단계로 전개되었으며,

제1단계는 미 해군이 함포사격을 가하는 동안 미 해병연대가 상륙하여.월미도를 점령하고

제2단계는 후속하는 부대들이 인천 해안의 교두보를 확보하여 인천시가지 작전을 전개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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