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강점기-3          2019.11.03.일요일,맑음                        

일제 강점기 하의 한국 민족은 일제의 무단 통치 체제의 아래 탄압은 실로 말할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비밀 결사를 조직해서 독립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11년 ‘105인 사건’ 이후 발각된 비밀 결사만 해도 '독립의군부'(1913)','광복단(1913)','광복회(1913)',

'기성볼단(1914)','선명단(1915)','조선국권회복단(1915)','영주 대동상점,사건(1915)','한영서원 창가집

사건(1916)','자립단(1916)','홍천 학교창가집 사건(1916)','이증연,비밀결사(1917)','조선산직 장려계

(1917)','조선국민회(1918)','민단조합(1918)','자진회(1918)','청림교,사건(1918)' 등이 있다.

이 밖에 대동 청년단을 비롯하여 소규모 비밀 결사들과 계(契) 형식의 지하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해외에 망명한 애국자와 국민들은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 창건 운동과 외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신민회는 만주·노령 일대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근거지를 건설하며,독립군을 창건하여 국내에 진공하여 독립 전쟁을 감행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한다는 ‘독립 전쟁 전략’을 채택하고,

만주 국경 부근에 1911년 신흥 무관학교,

1913년에는 동림 무관학교와 밀산 무관학교를 설립해서 독립군 근거지를 창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무관학교는 청년 학생들을 모집하여 사관 교육을 철저히 시키고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였다.

무관학교 졸업생은 독립군을 편성하여 본격적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다.

또한 미국의 클레어몬트와 하와이에서도 한인 소년병 학교가 설립되어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으며,

멕시코에 이민간 동포들도 자제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켜 독립 전쟁에 대비하였다.

만주에서는 '광복회',노령에서는 '권업회',상해에서는 '동제사'와 '신한청년당',미주에서는 '대한인 국민회',

'신한 협회' 등의 단체가 조직되어 독립을 위한 활발한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1917년,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만국 사회당 대회가 열리자 한국 민족은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결의

하였으며, 같은 해 뉴욕에서 열린 '세계 약소 민족회의'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1910년대 한국 민족의 독립 운동의 결정을 이룬 것은 바로 3·1운동이었다.

     

국내외에서 대규모 독립운동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1918년11월 세계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이듬해인 1919년1월,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승전국인 미국대통령 윌슨이 이 강화 회의의 회담 원칙으로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에 민족자결 원칙이 적용된다는 항목이 있었다.


상해에서 독립 운동을 하고 있던 '신한청년당'은 '파리 강화회의'에 '신한 청년당' 대표 김규식을 파견하고, 국내의 애국자들과 노령·만주의 망명 독립 운동가 및 일본에 있는 유학생들에게도 기다리던 대규모 독립

운동을 일으킬 기회임을 알렸다.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 학생들은 '조선 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1919년2월8일에는 남녀 유학생이 동경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2·8 독립 선언’이다. 2·8독립선언은 국내에서 대규모 독립 운동을 모색하던 인사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국내의 애국자들은 해외에서의 이러한 움직임에 큰 자극을 받고,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단 등이

민족 대연합전선을 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천도교의 손병희,기독교의 이승훈,불교의 한용운 등 33인이 ‘민족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1919년3월1일 오후 2시에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서, 학생과 시민들은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 만세 시위에 들어감으로써 3·1운동이 폭발하게 되었다.


1919년3월1일 오후2시,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고 학생들과 서울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서울 시내를 누비면서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같은날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의 여러 곳에서 거의 동시에 독립 만세 시위가 일어남으로써 3·1운동은 초기 조직 단계에서 민중 운동 단계로 비약하게 되었다.

19년3월2일에는 함흥·해주·수안·황주·중화·강서·대동 등지에서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으며,뒤이어 민족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 운동은 함경북도 북단에서 제주도 남단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민중들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퍼져나갔다.

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3월6일에는 서간도 환인현에서, 3월13일에는 북간도 용정에서 한국인 동포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뒤이어 만주 각 지방·상해·노령 연해주와 미주 등 해외 각지에서도 3·1운동에 호응하여 독립 선언과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다.

1919년3월1일부터 5월말까지 3개월간 참가 인원수가 202만 3,098명에 달했다.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전대미문의 전민족적 대규모 독립 시위 운동이었으며, 당시 1700만명의 총인구에 대한 비율로 볼 때 약소 민족 독립 운동 사상 전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위 운동이었다.

3·1운동은 비폭력 방법에 의한 평화적 만세 시위 운동으로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헌병과 경찰뿐 아니라 육해군 정규군까지 동원하여 평화적 시위군중에게 총탄을 쏘아 살육하고, 민가·교회·학교 등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수원 제암리에서와 같이 교회 안에 수십명을 감금하여 불을 질러 태워 죽이고, 탈출하는 사람은 총을 쏘아 죽인 만행도 비일비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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