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강점기-4                2019.11.03.일요일,맑음

일제는 한국민족의 3·1운동에 큰 타격을 받고 대책에 부심하였다.

3·1운동의 타격을 받고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변동을 보였다.

1.'무단 정치'에서 ‘문화 정치’로의 전환을 표방하면서 회유와 가장된 유화 정책을 통하여 한국민족의 독립

   운동 전선을 이간하고 분열시키며, 가혹한 식민지 통치를 은폐하려는 것이었다.

   종래 육해군 대장으로 조선 총독을 임명하던 것을 고쳐 문관도 그 자리에 임명할 수 있게 하고,

   헌병경 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언론 통제를 완화하여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글 신문의 간행을 허가하고, 필요하면 내정에 한해서

   한국인에게 참정권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1945년 해방되기까지 총독을 단 한번도 문관으로 임명한 적이 없었다.

   또한,1920년에 '조선일보(3월 일)', '동아일보(4월1일)','시사신보(친일신문,4월1일)'의 창간을 허가하였

   으나 한국인의 언론을 분열시켜 통제하려는 교묘한 수단으로 취해진 조처였다.

   또한, 한국인에게 참정권을 허용할 것처럼 선전한 것도 친일파와 자치 운동파를 육성하여 종래 완전독립·

   절대 독립을 목표로 하던 독립 운동을 약화시키고,절대 독립의 독립 운동 전선을 분열시키려는 책동에

   불과한 것이었다.

2.경찰관의 수를 대폭 증가시키고 독립 사상에 대한 사찰을 강화한 것이었다.

   헌병 경찰제를 폐지하고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으나 이것은 제복과 제도만을 형식상 바꾼 것이고 여전히

   헌병이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보통 경찰관이 되도록 하였다.

   1920년10월-12월의 간도 일대의 한국인 1만여명에 대한 학살을 자행한 경신참변 또는 간도학살사건과 

   1923년 9월 일본 관동 대지진 때 2만여명의 재일 한국인에 대한 학살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독립 운동가와 지식인·학생들에 대한 사찰이 더욱 강화되었다.

3.식량 수탈 등 사회·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다.

   일제는 일본 공업화에 소요되는 식량 등을 한국에서 수탈하기 위하여 1920년부터 ‘조선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여 집행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3·1운동 이후 한국 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이 워낙 맹렬하였으므로 일제는 1920년대에 한국 민족의 기세에 

   밀려 할 수없이 한국민족 말살 정책을 후퇴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반면에, 일제는 사회·경제적 수탈정책을 강화하기에 급급하였다.


 3·1운동에 고취되어 임시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하여

1919년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서울의 '한성 정부', 노령에서 '대한 국민의회'가 수립되었다.

이 3개의 임시 정부는 1919년 9월 상해에서 하나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되었다.

임시 정부는 민주 공화정체를 채택하여 의정원과 국무원을 두고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것은 9년간 단절되었던 민족 정권을 계승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한 것만으로도 한국 역사상 획기적인 것이었다.

임시 정부는 국내와의 비밀 연락망으로 연통제를 조직하여 국내 통치권을 일부 행사하고,

독립 운동자금을 국내로부터 공급받았다.

연통제 실시 2년 만에 전국의 도군면에는 독판·군감 등의 비밀 행정 조직이 만들어져서 국내 독립 운동을

지도하였으며,국내인들이 군자금을 모집하여 전달하였다.

임시정부는 또한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에 파견되어 있는 김규식을 외교총장 겸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유럽에서의 외교활 동과 미국에 구미 위원회를 두어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8월에 스위스에서 열린 '만국 사회당대회'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결의하게 하는 등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국제연맹과 태평양회의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배포하고,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여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는 만주의 독립군에게도 군자금을 지원하고 독립 전쟁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직후에 만주와 노령에서 3·1운동에서 폭발한 독립 의지와 독립 역량을 독립군의 무장 투쟁으로

한차원 더 발전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하여, 독립군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1920년말경까지 조직된 독립군 단체들은

북간도 지방의 '대한 독립군''군무도독부''북로군정서'''국민회군''의군부''대한정의군정사''한민회군''

   조선 독립군''의단''대한 독립군 비단''광복회군''의민단''흥업단''신민단''광정단''야단''혼춘 군무부'

  '국민의사부''대진단''백산 무사단''혈성단''태극단''노농회''광영단'과

서간도 지방의 '서로군정서''신흥학우단''광한단''대한독립의용단''대한독립청년연합회'' 광복군사령부'

  '광복군총영''천마산대''보합단''의성단 등과,

노령 지방의 '대한 독립군 결사대''대한 신민회''대한독립군 등 30여단체에 달하였다.


3·1운동 후에 급속히 성장한 독립군 부대들은 무장을 강화하고 실력을 기르면서 군사 통일을 추진함과 함께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 독립군은 1919년8월에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남도 혜산진에 진입을 감행하여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해서 섬멸하고, 3·1운동 후 처음으로 국내 진입 작전을 단행하였으며,

1919년9월에는 함경남도 갑산군에 진입하여 일제 경찰관 주재소 등 식민지 통치 기관을 습격하였고,

1919년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군의 만포진에 진입하여 이를 점령하고,자성군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70여명을 살상시키고 일본군을 패주시켰다.

이듬해인 1920년부터는 독립군 부대들이 실력과 기회만 있으면 끊임없이 크고 작은 국내 진입 유격전을

감행하였다.

독립군 부대들의 국내 진입 유격전에 여러 차례 패배한 일본군 수비대는 1개중대를 두만강을 불법으로 월강하게 하여 독립군에 대한 추격을 시도하였으나,독립군은 1920년6월4일 삼둔자에서 매복하여 일본군을

섬멸해버렸다. 이것이 삼둔자 전투다.


일본군 제19사단은 이에 분개하여 1개 대대를 월강시켜 봉오동까지 추격해 왔으나,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국민회군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편성하여 1920년6 7일 봉오동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하여

157명을 사살하고,200여명의 중상자와 100여명의 경상자를 내게 하여 일본군을 섬멸해버렸다.

이것이 봉오동전투이다.


독립군의 급성장에 크게 당황한 일제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처음에는 중국에 외교적·군사적 압력을 가해서 중국군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토벌하려 하였다. 독립군은 중국군과 협상하여 일본군의 이 대응을 근거지

이동으로 극복하였다.

독립군이 근거지를 이동하여 장기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일본군은‘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이라는 토벌작전을 수립하고, 혼춘 사건을 조작하여 출병 구실을 만든 다음 5개사단에서 차출한 2만 5000명의 병력과 항공대까지 동원하여 1920년10월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간도에 불법 침입하였다.

일본군은 이 토벌작전을 2단계로 나누어,

제1단계는 1개월 동안 간도 일대의 독립군을 섬멸하여 한국민족의 무장투쟁 능력을 완전히 섬멸하고,

제2단계는 다시 1개월 동안 촌락에 잠복한 독립 운동자들을 색출해서 발본 색원하여 한국민족의 비무장

   독립운동의 능력도 완전히 뿌리뽑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와 이도구 어랑촌 일대의 독립군을 포위하여 들어가다가 김좌진이

지휘하는 600명의 북로군정서 제1대대,이범석이 지휘하는 500여명의 사관생도로 구성된 북로군정서

제2대대와 홍범도가 지휘하는 1,400명의 독립군 연합부대의 공격을 받고는 도리어 참패를 당하였다.

2,500명의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10월21일 아침부터 10월26일 새벽까지 6일간 백운평전투·완루구전투·천수평전투·어랑촌전투·맹개골전투·만기구전투·쉬구전투·천보산전투·고동하곡전투 등 10여개 전투에서

실로 영웅적 혈전을 전개하여 일본군 1,200명을 사살하고 2,100명을 부상당하게 하는 등 일본군을 섬멸

하여 패주시켰다.반면, 독립군의 전사자는 130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청산리 전투다.


청산리 전투는 일본군의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완전히 붕괴시켰으며,

일본군의 작전목표가 제2단계에 들어 가기는커녕 제1단계에서 실력으로 분쇄해버려,

간도·노령일대의 독립 운동을 보위하고 독립 운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독립군은 1920년12월,밀산에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이라는 군사 통일을 실현한 다음 소련의 적군과 합작하기 위하여 자유시에 들어갔다가 1921년6월에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

그러나 독립군은 여기에 좌절하지 않고 산개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와서 '참의부(1923)'·'신민부(1924)'·

'정의부(1925)'를 조직하였다가 '혁신의회(1928)'와 국민부(1929)'로 통합,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재개하였다.

또한 3·1운동 후 1919년11월에 만주에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 조직인 '의열단'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들을 폭파하였다.

조선총독부 파괴를 기도한 밀양폭탄사건(1920.3),부산 경찰서 투탄사건(1920.9),밀양 경찰서 투탄사건

(1920.12), 조선총독부 투탄사건(1921.9),일본군 대장 다나카 총살 저격 사건 (1922.3),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1923.1월), 조선총독부·조선은행·경성우체국·경성전기회사 파괴 및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총살기도사건(1923.3),일본정부대신 총살기도사건(1923.12), 일본 동경 천황궁성 이중교투탄사건(1924.1), 의열단

군자금 사건(1925.10, 조선식산은행 및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사건(1926.12) 등은 그 대표적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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