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 강점기-5                2019.11.03.일요일,맑음

일제 강점기 하에서 국내에서는 일본의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민족과 민족문화를 보존, 발전시키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1년 조선어 연구회(조선 어학회 전신)가 조직되어 기관지 '한글'을 간행하고,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을 시작함과 함께 민족어와 한글을 발전시키려는 투쟁이 전개되었다.

문학 부문에서도 '창조(1919)'·'폐허(1920)'·'백조(1922)'·'조선문단(1924)'·'조선문예(1929)'·'조선시단

(1929)'·'문예공론(1929)'·'예술운동(1929)' 등의 문학지가 창간되고,

한글로 된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창작되어 민족어와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시조가 현대화되어 부흥되고 민족고전들이 간행되었다.

1920년대에는 프로 문학도 형성되어 가난에 허덕이는 민중의 참상을 고발하였다.

국사 연구에 있어서도 박은식이 중국에서 '한국통사(1915)'·'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를 저술하여

근대사를 정립하고,신채호가 일찍이 '독사신론(1908)'을 저술한 이래 망명한 뒤에도 '조선사 연구초'·

'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를 저술하여 민족주의 사학을 확립시켰으며,

정인보가 국내에서 '조선사 연구'를 저술하였다.

이러한 국사 연구들은 일제가 1925년에 '조선사 편수회'를 조직하여 식민 주의사관에 의거하여서 한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는 것에 대항하여 학문적 투쟁을 전개하고, 민족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서는 장기적으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전국에서 민족교육의 열기가 고양되었으며, 1922년에는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어 민립 대학 설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놀란 일제는 할수없이 그 무마책과 회유책으로 1924년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였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민족 실업이 육성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1923년에 조선물산 장려회가 창립되어 전국 각지에 지부를 결성하면서 1930년대까지 민족 산업 진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4월, 조선 왕조 마지막 국왕 순종이 죽자 그 장례일인 6월10일 대규모 독립 시위 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3·1운동의 경험에 의하여 경계를 엄중히 하고 있던 일제 군경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일제는 수많은 인사들을 전국적으로 일제히 검거하고, 인쇄된 격문을 압수하였다.

심지어는 장례에 참석하러 상경하는 것도 엄금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6월10일 서울에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 운동을 벌여 서울만은 3·1운동

때와 같이 철시와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다.

 

3·1운동 후 1920년대에는 농민 운동도 크게 고양되었다.

소작쟁의는 농민들이 농민조합·농우회·소작인조합 등의 농민 단체를 조직하면서 전개되었고,

   일본인 지주의 대농장에서 많이 일어났으며, 1922년,1925년,1930년에 일어난 소작쟁의다.

노동운동도 1920년에 '조선 노동 공제회'가 조직되고, 이어 1922년에 '조선 노동 연맹회'가 결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노동파업도 활발히 전개되어, 1921년에 부산 부두노동자들의 파업,1923년에 서울고무공장 여공들의 파업,

   1929년의 원산노동자의 총파업 등은 그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이러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은 비단 노동자·농민들의 권익 향상뿐만 아니라 일제 지주와 공장주에 대항한

민족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가진 것이었다.


3·1운동 후 1920년대 초에는 민족독립운동에 두개의 큰 과제가 발생하였다.

하나는 일부 민족 주의자들이 기만적 ‘문화 정책’에 휘말려 완전독립·절대독립을 포기하고 일제국 내의

  ‘자치’를 주장하는 이른바 ‘자치론’이 대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운동이 강력히 대두하여 민족 주의독립운동과 사회 주의독립운동 사이에 분열이

   발생한 것이었다.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절대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 주의자와 사회 주의자가 연합하여 1927년2월 민족협동전선으로서 신간회를 조직하였다.

신간회는 급속히 발전하여 강력한 민족 운동단체가 되었다.

신간회는  완전독립·절대독립옹호,자치론과 일제에의 타협주의 타도,민족의 대동단결 결성,한국인 착취기관

   철폐,일본의 이민 정책 반대,한국인 본위의 민족 교육 실시,한국어 교육의 실시,과학 사상 연구의 자유,

   한국인에 대한 특수 취체법의 철폐, 소작쟁의 지원,노동쟁의 지원,학생 독립운동 지원 등의 민족 운동을 

   전개하고, 당시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한국민족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신간회가 창립되자,1927년5월에는 여성 자매 단체인 근우회가 조직되어 여성 독립운동의 단일전선이 결성되었다. 또한 해외에서도 그 해 11월 '한국 유일 독립당 촉성회'가 조직되어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 협동전선이 결성되었다.

이러한 민족 운동전선의 통일은 한국 민족의 독립 쟁취에 대하여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이 사회 주의자들에게 신간회로부터의 탈퇴를 지시하고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이에

복종함으로써 신간회는 만주사변이 일어났던 1931년5월에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1929년11월3일, 광주에서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이 충돌하여 일제 경찰이 일방적으로 한국 학생만 검거

하자 광주의 학생들이 총궐기하여 검거된 학생의 석방, 민족 차별의 철폐, 약소 민족의 해방, 제국주의 타도 등을 외치며 격렬한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전국에 파급되어 학생 시위 독립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립 시위운동에 참가한 학생은 퇴학처분,무기정학,피검자가 발생하여 신간회도 조사단을 파견

하고 민중대회를 계획하는 등 학생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광주학생사건에서 비롯된 1929에서 1930년 까지의 학생 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 독립을 요구하는 최대의 시위운동이었다.

1920년대에는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이 막강하게 고양되어 일제는 수세에 몰려 전전긍긍하였다.

    

일제는 1931년9·18만주침략 이후부터 조선 주둔 일본군을 증가시켜 탄압무력을 강화한 다음 한국민족말살정책을 적극적으로 강화하였다.


일제는 한국어를 말살시키고 말살에 광분하였다.

일제는 1930년대에 들어오자 관청에서는 한국농민의 민원도 일본어를 사용할 경우에만 접수하도록 하여

한국어 사용을 엄금하고, 사립학교에서의 한국어 교육과 한국어 사용을 엄금하였다.

또한 1935년부터는 한국 문자를 농민들에게 가르치는 학생들의 하기 계몽운동을 총독부령으로 엄금하고,

1937년 중국 침략 때부터는 한국인들의 일상 사회생활에서의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여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

일제는 국민학교 학생들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매질을 하고 벌칙을 적용하였다.

그리고 한국어로 간행되는 신문과 잡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간 등 탄압을 가하다가,

1936년에는 '신동아'를 폐간시켰으며,

1940년에는 '동아일보'·'조선일보' 등 모든 한국어 신문들을,

1941년에는 '문장','문평론' 등 모든 한국어 잡지들을 폐간시켜 버렸다.

1938년 일본어 강습소를 만들어 한국농민들에게 강제로 일본어를 배우게 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였다. 일제의 한국어말살과 일본어 전용정책이 한국인들의 저항으로 진전되지 않자 그 씨를 없애야 한다며

1942년에는 조선 어학회 회원과 학자들까지 체포, 투옥하였다.

또한, 1937년부터 한국인의 성명을 말살하고 일본식 이름을 짓도록 하는 이른바 ‘창씨개명’을 본격적으로 강행하였다.

1939년에는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전한국인에게 강요하는 파쇼적 방법으로,

일제는 1940년까지 한국인의 성명말살과 ‘창씨개명’을 강행하였다.


일제는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은 한국인에 대해서는 자녀의 학교 취학을 금지하고,

학생들에게 매질을 가하는가 하며, 직장에서 채용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심지어 우편물 수송까지 금지

시켰으며, 경찰관 주재소로 호출하여 응할 때까지 무기한 구류해 두고 박해를 가하므로 이에 불응하고는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없었다.

일제는 또한 전부터 날조해오던 식민주의 사관을 더욱 본격적으로 발전시켜

1932년부터 '조선사'를 간행하기 시작하여 1940년에는 전37권을 완간하였다.

그리하여 동조동근설을 날조하여 일본 민족은 시조신인 ‘아마테라쓰오미카미’의 적자이고,

한국 민족은 그 서자로서 같은 기원과 뿌리에서 나왔으므로 한국 민족은 당연히 한국 민족됨을 버리고,

‘황국신민화’되어 천황에 무한한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설교하고 한국인에게 집집마다 ‘가미타나’라는

그 시조신이 들어 있다는 나무 상자를 모셔 아침마다 경배를 드리도록 강요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 관제 미신인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1937년부터는 매일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최경례를 강제하는 이른바 ‘동방요배’ 라는 것을 강요하였다.

또한, 일제는 한국인이 한국민족의 성원이 아니라 일본천황의 신민임을 맹세하고,

‘황국신민서사’라는 것을 날마다 외워 맹세하도록 강제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한국민족을 말살하여 일제의 천민을 만들 수 있다고 망상하고 한국인에게 무한한 고통과 박해를 가한 것이었다.


일제는 1937년 중일 전쟁을 도발하여 인력 부족이 격화되자 징용제도·징병제도·근로보국대제도·근로동원제도·여자정신대제도를 만들어 한국인의 인력을 강제 수탈하였다.

일제는 중일 전쟁 이전까지는 ‘모집’이라는 형식으로 일본의 광산이나 토목공사에 집단 동원하더니,

중일전쟁 이후인 1939년에 '국민 징용령'을 공포하여 한국인 청장년들을 강제 연행해다가 노동력을 수탈

하였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이후 징용영장에 의한 징용이 잘 안되자 트럭을 농촌에 몰고 가서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강제로 실어다가 징용에 보내는 만행을 예사로 자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1945년 8월까지 146만명의 한국인 청장년을 징용하여 광산·토목공사·군수공장에 투입하여

무보수 노예노동을 시켰다.

군사기밀에 관한 공사에 투입한 경우에는 기밀 유지상 필요하다는 이유로 공사가 끝난 뒤에 징용당한 한국인 노무자들을 집단 학살하는 만행을 수없이 자행하였다.

일제는 또한 1943년 ‘학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여 한국인 전문·대학생 4, 500명을 지원형식으로 전쟁에 강제로 내몰더니,

1944년에는 ‘징병 제도’를 실시하여 패전 때까지 20만명의 한국청년들을 침략전에 대폿밥으로 강제동원하여 내몰았다.

일제는 중학생은 물론이고 국민학생까지 ‘근로보국’이니 ‘근로동원’이니 하여 날마다 군사시설공사에 강제로 동원하였다.

또한, 일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44년 '여자 정신대 근무령'을 제정, 공포하여, 12세부터 20세까지의

한국인 처녀 수십만명을 강제 징집하여 일본과 한국내의 군수공장에서 사역시키고,

중국과 남양지방의 전선에 군대위안부로 내모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하였다.


일제는 1931년 만주침략 이후부터는 그들의 대륙침략정책에 발맞추어 한국을 병참기지화한다면서 일본의 독점자본을 동원하여 북한일대에 군수공장을 설치하고, 대대적인 광산자원 약탈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금·철·석탄·중석·마그네사이트·아연·망간·니켈 등을 대대적으로 채굴, 약탈하였다.

미곡수탈도 이 시기에 급속히 강화되어 1933년부터는 미곡 총생산량 중에서 일본으로 실어간 약탈량의

비율이 50%를 초과하기 시작하였다.

식량 약탈의 증가는 1933년부터 '미곡통제법'과 '미곡자치관리법' 등을 실시하여 미곡은 일본으로 실어가고, 만주로부터 잡곡을 한국에 수입하여 한국인은 잡곡을 먹도록 하는 정책에 따라 나타난 것이었다.

1930년대부터는 미곡 이외에도 면화와 누에고치의 약탈이 격증되었고, 한국인에 대한 조세수탈도 격증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조세 수탈만으로는 전비 조달이 제대로 되지 않자,

1939년부터 '총동원물자사용수용령'을 공포하여 백주에 공공연히 물자를 약탈하는 공출제를 시행하였다. 이 공출제는 처음에는 양곡부터 시작하더니, 1940년대에는 모든 일반 물자에 확대하여 송진기름·아주까리기름, 심지어 놋그릇·숟가락까지 백주에 강탈해갔다.

한국인은 일제의 이러한 약탈정책하에서 광복의 날을 기약하며 초근목피로 연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의 한국민족말살정책과 식민지 수탈정책을 비롯한 온갖 탄압이 1930년대 이후에 더욱 강화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이 이 시기에 줄기차게 발전된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국내에서는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체된 아픔을 겪은 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의 급속한 강행 속에서도 1931년에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발전하여 민족어와 민족문자를 보존 발전시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그 결실로 『한글맞춤법통일안』·『표준말모음』 등이 나왔다. 『우리말본』·『한글철자법일람표』·『우리말사전』 등도 이때 나왔다.

문학·예술분야에서도 민족적 작품들이 나와서 국민들에게 애독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한국어 잡지들도 정간과 폐간을 되풀이 당하면서도 민족과 민족문화의 보존 발전을 위하여 문화투쟁을 전개하였다. 『동아일보』·『조선일보』·『조선중앙일보』 등 언론기관과 잡지들은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사학을 국민들에게 교육하여 일제의 식민주의사관에 대항해서 투쟁하였다.

민족언론기관과 청년학생들은 한글보급과 함께 민중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민중 속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1931년부터 브나로드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경성제국대학 학생들의 반제동맹(反帝同盟)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단체들이 조직되어 완강하게 항일투쟁이 전개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1937년까지는 소작쟁의와 노동운동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시기의 소작쟁의와 농민운동은 물론이요 노동쟁의와 노동운동은 비단 농민·노동자층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1차로 일제의 식민지수탈의 강화에 대항하고 투쟁하여 민족운동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1940년대에 들어와서 일제의 폭압이 극악하여 표면상 모든 민족운동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던 시기에도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무수한 지하 서클들이 조직되어 완강하게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2.2. 국외독립군의 무장투쟁]

한편, 국외에서는 일제가 1931년 만주침략을 자행하여 만주괴뢰국을 세우고, 전만주를 장악하였음에도 한국민족은 굴복하지 않고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완강하게 전개하였다.

남만주의 국민부는 800명의 조선혁명군을 편성하여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서 한중연합군을 조직하고, 조선혁명군의 양세봉(梁世奉)이 총사령이 되어 1932년에 일본군을 신빈(新賓)에서 대파하였다.

조선혁명군은 1933년 흥경현의 일만연합군을 공격하여 흥경성(興京城)을 점령하였다. 한편, 북만주에서는 이청천(李靑天)이 지휘하는 한국독립당독립군이 1931년에 중국 호로군(護路軍)과 길림자위군의 연합군과 연합하여 한중항일연합군[중한연군(中韓聯軍)]을 조직하였다. 1932년 5월초 한국독립군은 길림자위연합군 제3군과 엽합하여 길림자위군중로연합군(吉林自衛軍中路聯合軍) 제3군 독립영(獨立營)으로 편제되어 연합 작전을 수행하였다. 한중항일연합군은 1932년 9월에 쌍성보(雙城堡)에서 일본군 1개중대를 섬멸하였였다. 이후 11월 2차 쌍성보 전투를 벌였고 전투기 폭격을 받는 등 악전고투 끝에 철수하였다.

한국독립군은 한국독립당의 결정에 따라 동만주로 이동하였고 그곳에서 중국의용군 길림구국군과 연합하였다. 1933년 1월 한국독립군은 길림구국군 제14사 부대와 연합하여 중한연합토일군을 조직하였다. 또 참모장 신숙과 참모 김상덕을 난징[南京] 국민정부에 파견하여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1933년 2월에는 경박호(鏡泊湖)에서 2,000명의 일만연합군을 격파하였다. 4월에 사도하자(四道河子)에서 일만연합군 1개사단을 격파하였으며, 6월초 동경성(東京城) 전투에 승리하여 동경성을 점령하였고 같은 달 30일 개전한 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각종 포 8문, 기관총 110자루, 소총 580자루, 권총 200자루 등 많은 물품을 빼앗았다.

이후 전략의 차이로 갈등을 겪기도 했으나, 연합은 유지되었다. 한중 연합에 따라 홍진, 지청천, 조경한, 오광선, 공진원, 김창환 등 독립군 간부 및 사병 40여명은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훈련반에 입교하여 체계적 교육을 받았다.

한국독립군부대들은 1941년까지 중국군과 연합하여 만주에서 용감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에는 의열투쟁도 강화되었다. 큰 사건만을 들어도 1932년 1월 이봉창(李奉昌)의 일본천황 투탄,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상해 훙커우공원 투탄, 1933년 3월 백정기(白貞基)의 재중국일본공사 투탄, 1934년 3월 강명학의 상해 훙커우공원투탄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다수의 의열투쟁이 있었다. 1938년에는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여 중국본토에서 항일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2.3. 건국준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0년대에 한때 침체되었으나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공원투탄사건을 계기로 항일전선을 정비하고, 임시정부의 독립군으로서 1940년 9월에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하였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도 임시정부와 연합하여 광복군 제1지대가 되었다. 이범석(李範奭)의 제2지대와 김학규(金學奎)의 제3지대가 편성되어 임시정부의 광복군은 이청천을 사령관으로, 김원봉을 부사령관으로 하여 3개지대가 주력이 되었다. 김구(金九)를 주석으로 한 임시정부는 또한 일본의 패망을 전망하고 건국을 준비하여 1941년 11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광복군이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여 연합군과 함께 조국을 광복한 뒤 신국가를 수립하는 기본원칙을 공표한 것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임시정부는 12월 9일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뒤이어 대독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광복군은 중국의 각 전선에 투입되어 일본군에 대한 심리작전에 큰 성과를 올렸고, 이를 알게 된 영국군이 광복군의 인도·버마전선 투입을 요청하게 되어 1943년 6월에 한영군사협정이 체결되고, 광복군 공작대가 인도·버마전선에 파견되어 버마탈환작전에 참가하였다.

또한, 광복군과 미국군과의 합동작전이 계획되어 미군 전략정보처(OSS)의 특수훈련이 실시되었다. 광복군은 1945년 4월 낙하산투하와 유격전훈련을 받고 국내투입이 준비되었으나, 일본이 예측보다 빨리 무조건항복함으로써 광복군의 국내투입은 실현되지 않았다.

한편, 중국 연안에서는 조선독립동맹이 1942년 7월에 조선의용군을 편성하고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전쟁에 참가하였다. 미주지역에서도 1942년에 한인국방경비대(일명 맹호군)가 편성되어 100명의 한인청년들이 국내투입의 특수훈련을 받다가 일본의 항복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1944년 8월에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하여 비밀결사로서 건국동맹이 조직되어 건국을 준비하였다.

건국동맹은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과 비밀연락을 시도하면서 조직을 확대하여, 1945년 8월에는 국내의 건국을 준비하는 강력한 단체가 되었다. 한국민족은 이와 같이 1940년대에도 불굴의 투지로 민족의 광복과 독립을 위한 투쟁과 더불어 준비를 전개하면서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을 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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