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조와 임진왜란과 3대 대첩         2017.10.15.일요일, 맑음

선조 시대인 1592년 임진년에 발생했다 하여 '임진왜란' 혹은 '7년전쟁'이라고도 한다.
1592년4월 일본군 선봉대가 부산포로 쳐들어와 서울을 향한 북진을 계속해 
2개월도 되지않아 전 국토가 유린되어 선조와 세자인 광해군은 평양으로 피난하였다.
한산도 대첩 등 해전의 승리로 일본의 해상 작전이 좌절되고,유학자들과 농민이 주축이 된 의병이 일어나

육상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592년12월 명나라는 4만3,0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1593년1월8일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일본과 협정에 들어갔다.
강화가 결렬되자 1597년 다시 침입했으나

육지에서는 권율,이시언의 조명 연합군에 패하고 해상에서는 이순신에게 패하여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다.

 

임진래란의 3대 대첩은 조선군이 왜적을 무찌른 3대 싸움을 말한다.

1.한산도 대첩: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7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연합 함대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선60척을 전멸시켜 왜의 수군에 큰 타격을

     주어 해상권을 잡았다.

2.행주 대첩: 임진왜란이 발발한 그 이듬해인 1593년 2월

     전라 순찰사 권율이 서울 수복을 위해 북상하다가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크게 쳐부수어 승리한 전투를

     말한다.이때 동원된 부녀자들이 긴 치마로 돌을 날라 석전(石戰)을 벌인 것이 유명하다.

3.진주성 대첩;

     1차 대첩;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10월

       3만의 왜군 연합부대가 공격해 왔으나 진주 목사 김시민이 끝까지 이를 고수하였으며,

       이때 의병 곽재우가 합세하여 화약물과 돌로 왜군을 물리쳤다.

     2차 대첩; 임진왜란이 발발한 그 이듬해 1593년 6월

        1차전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왜군은 대군으로 공격하였으나 의병인 고종후,강희열등이 참가하여

        항전하다 전원이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을 치러낸 첫째 공로자로 유성룡과 충무공 이순신을 꼽는다.

그 다음은 3리(李)라고 하는데,3리란 이원익(남인),이항복(서인),이덕형(남인)을 말한다.

 

이 세 사람은 각기 개성과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절친한 사이였다.

그들 가운데 이원익이 맏형이었다.

이원익(1547-1634)은 이원익은 오리(梧里) 정승으로 통했고,

    체구는 작으나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솔직 대담성,소탈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항복(1556-1618)은 기지와 해학,재기 발랄함과 명민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남을 사랑하고 인정이 넘치는 인간적인 인물이었다.

 

이덕형(1561-1613)은 오성(鰲城) 대감으로 불렸으며,

    위풍이 당당하고 언변이 뛰어 났고,상대에게 호감을 주면서 상대를 압도했다.

이 세 사람은 남다른 교분을 지녔고,영의정을 번갈아 역임하면서 숱한 일화를 남겼다.

이덕형은 이항복과 한 스승 밑에서 함께 학문을 닦은 벗이었고,

이덕형은 세 사람 중 나이가 제일 적으면서도 먼저 높은 벼슬을 얻었고 제일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항복은 이덕형이 죽은 5년 뒤,인목대비 폐모 논의에 반대하다가 북청의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이원익도 폐모논의에 반대하다가 홍천에 유배되었으나 인조 반정 뒤 영의정에 추대되었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겪고 난 뒤 죽었다.

세 사람의 나이는 이원익 ·
이항복 · 이덕형 순이었으나 죽은 연대는 이덕형 · 이항복 · 이원익 순이다. 그들은 인생관과 현실에 대응하는 방법은 같았으나 태어나고 죽은
순서는 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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