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여창     2014.12.29.월요일,맑음

정여창; 연산군 시대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

생졸; 1450(세종32)~1504(연산군 10)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일찍이 지리산에 들어가 5경과 성리학을 연구했다. 1490년(성종 21) 효행과 학식으로 천거되어 소격서참봉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같은 해 과거에 급제하여 안음 현감 등을 역임하였고,

1498년(연산군 4) 훈구파가 일으킨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경성으로 유배되어 죽었다.

1504년 죽은 뒤 갑자 사화가 일어나자 부관 참시 되었다.

김굉필,김일손,김종직 휘하에서 배웠다.


그는 유학적인 이상사회,즉 인정(仁政)이 보편화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먼저 치자(治者)의 도덕적 의지가 확립되어야 한다고 보았다.그리하여 주자학적 세계관을 우주론적으로 해명하는 이기론과 함께 개인의 도덕성 확립을 위한 심성론(心性論)을 본격적으로 탐구했다.

이기론은 이(理)와 기(氣)는 현상적으로 구별되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이는 지선(至善)하며 영위(營爲)하는 바가 없는 반면에 기는 유위(有爲)하며 청탁(淸濁)이 있으므로 구별된다고 보았다.

이와 함께 학문의 목적은 성인이 되는 데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물욕과 공리를 배제할 수 있는 입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했다. 이러한 그의 성리학은 정몽주·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조선 전기 사림파의 주자학적 학문을 계승한 것이었다. 사림파는 인(仁)을 보편적 가치의 정점으로 삼아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바탕으로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를 공격했다.

저서는 무오사화 때 소각되어 대부분이 없어지고 정구가 엮은 '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에 일부가 전하며,

1920년 후손이 유문을 엮어 만든 '일두유집'이 있다.

중종대에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10) 조광조·이언적·이황 등과 함께 5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나주 경현서원, 함양 남계서원, 상주 도남서원, 합천 이연서원, 거창 도산서원, 종성

종산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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