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 원내대표 노회찬 투신 자살      작성일자; 2020.02.29.토요일,맑음

2018년7월23일,

정의당 원내 대표인 노회찬은 노동운동가 출신 진보 정치인으로

정의당 원내대표 등을 지내며 진보 진영의 대표 주자로 활동했으나

드루킹 사건에 연류되어 불법 정치 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특검 수사 중에 신당동 한 아파트의 17층과 18층 사이에서 투신 자살하여 사망했다.


노회찬(생졸; 1956년8월31일~2018년7월23일)은
아버지 노인모와 어머니 원태순 사이에서 1956년 부산에서 2남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69년,초량 초등 학교,1972년,부산 중학교 졸업 후 부산고 등학교 시험에 낙방하고 재수를 하여

1973년에 경기고등학교에 입학 했다.

고1 때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반대하는 유인물을 제작.배포하면서 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이시기에 함석헌,백기완,선우휘 등 저항적 지식인들을 만나게 된다.

당시 경기고에서 함께 운동을 했던 동기들이 정광필,이종걸 등이다.

1976년,경기고등학교를 졸업 한후 대학입시에 떨어지자 군대를 지원했다.

1979년,군복무를 마친 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1980년5월18일,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큰 영향을 받고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1982년,노동운동을 하기위해 용접 자격을 취득하여 기아 자동차에 입사 하였으나

위장 취업신분인 것이 탄로나 해고 당한다.

1982년부터 각종 시위를 주도하고 불온 문서를 배포한 혐의로 수배되어 긴 수배 생활이 시작 되었다.

1983년, 고려대를 졸업 후 노동생활을 하던 중

1987년6월10일부터 6월29일까지 일어난 6월 항쟁을 맞이하게된다.                         

1987년6월10일,뒤이어 일어난 노동자 대투쟁은

인민 민주주의 노동자연맹(인민노련)을 출범케하는 계기가 되어 인천,부평에서 창립을 했다.

인민노련은 노동자 중심의 진보 정당을 조직의 목표로 삼았다.

1987년12월19일,제17대  대선에서 백기완을 대선 후보로 추대했으나 야권 단일화를 위해 후보를 사퇴하게 된다. 이후 인민노련은 '노동계급','삼민동맹','안산노련'등을 규합하여 전국적인 조직화되었다.

1988년12월, 노회찬은 인민노련 중앙위원 활동을 주도하던 중 김지선(현 가정폭력상담소 소장)과 결혼했다.

노회찬과 함께 '인민노련' 활동을 했던 사람으로는 송영길 민주당 국회의원,신지호 한나라당 국회의원,

주대환 사회민주주의연대 대표,조승수진보신당 국회의원 등이 있다.

1989년12월24일,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구속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 되었다가

3년만인 1992년에 만기 출소했다.

1991년7월,노회찬의 복역 도중

인민노련은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로 이름을 바꾸고

'창준위' 대표로 사회민주주의연대의 주대환이 되었다.

'한사노당 창준위'는 기존의 지하 정당 노선을 탈피하고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진보정당 결성을 추진하게 된다.

 

1992년4월13일,'한사노당 창준위'는 '한국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로 이름을 바꾼 뒤

'민중당'과 통합한 '통합민중당'은 제20대 총선 참패하고 해산 당한다.

민중당 소속인 김문오.이재오는 진보정당 운동을 포기하고

김영삼의 영입을 받아들여 '민주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1992년4월15일,진보정당 운동을 지속 해나가야 한다는 사람들이 모여

'진보정당 추진위원회(진정추)'를 결성하였으나 진보정당을 당장 건설하기에 역량이 부족하여

1992년12월19일에 실시되는 제14대 대선에 대응하기로 한다.

1992에 출소한 노회찬은 '진정추''백기완 선거대책 본부' 조직 위원장으로

1992년12월19일제14대 대선에서 활동하다 백기완이 1%의 지지를 얻고 패배 하자

많은 사람들이 떠났지만 진보정당 건설을 계속하기로 하고 사무총장을 거쳐

1993년3월부터 1995년9월까지 임기의대표를 역임했다

.1995년9월25일, 진정추는 민중정치연합과 통합하여 '진보정치연합(진정련)'으로 거듭났다.

진정련의 창립이후 '국민승리 21'과 통합되기까지 대표를 역임했다.

1992년부터 2003년까지 진정추 활동을 하면서 '매일 노동 뉴스' 발행인을 역임하다

부채로  IMF 외환위기때 신용 불량자가 되기도 했다.

 

1996년, 노회찬 진정련 대표는 보수야당 소수파였던 '개혁신당'과의 제휴를 추진한다.

1992년의 민중당과 백기완 선거 운동의 후유증이 남아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섣부르게 창당했다가 조직적으로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1996년4월11일의 제15대 총선을 앞두고 '진보련'은 구성원의 대부분이 민중당을 경험했던 터라

'개혁신당'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개혁신당'은 총선을 앞두고 이기택의 '꼬마 민주당'과 통합하여 '통합민주당'이 되었다.

진정련의 대표로 '통합민주당'의 당무위원을 잠시 맡기도 했으나 보수 야당과의 제휴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1996년-1997 총파업 이후,'민주노총'은 보수 야당에 의존적인 기존의 노동 운동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했고.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 역시 진보정당이라는 문제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진정련'은 1997년12월18일에 실시되는 제15대 대선에 참여하고,

이를 기반으로,진보 정당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고 '민주노총'과 '전국연합'이 이에 동의했다.

1997년 대선 기구로서 민주노총의 주도로 '국민승리21'이 출범하게 되어정 책기획위원장으로 활동한다.

'국민승리21'은 이후 2000년1월30일 창당하여 2011년까지 진보주의 정당인 '민주노동당'으로 재창당했다.

1997년12월18일,'국민승리21'은 민주노총 권영길 위원장을 후보로 내세우고

제15대 대선에 참여하여기대 이하의 결과였으나 '국민승리21'은 포기 하지 않고 진보정당 건설을 추진하기로 했다. '민주노총'은 대선 패배 이후 '국민승리21'에 대한 지원을 할 수 없었고,

'전국연합'은 공식적으로 '국민승리21'에서 철수할 것을 결의했다.

그러나 1987년,1992년과 달리 '국민승리21'은 포기 하지 않고 진보정당을 건설을 계속하기로 다짐했다.

1998년6월4일,제2회 지방선거에서'국민승리21'은 23명의 당선자를 내어 기사회생하게 된다.

'국민승리21'은 충분히 준비가 되지않은 상태에서 대선에 응 했기 때문에 문제를 드러냈다.

'국민승리21'은 '민주노동당'이라는 진보정당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조직이다.

1999년8월29일,국민승리21은 '(가칭)민주노동당 창당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창당준비위원회는 권영길,양연수,이갑용을 공동대표로 추대하고,본격적인 창당 작업을 시작했고

노회찬은 정치개혁추진위원장을 맡았다.

2000년1월30일,'민주노동당'이 창당되고 노회찬은 민주노동당의 초대 부대표를 맡았다.

노회찬은 2000년4월13일 제16대 총선,2002년6월13일 제3회 지방선거,2004년4월15일 제17대 총선에서

선대본부장을 맡아 '민주노동당'의 대부분의 선거를 지휘했다.

2000년4월13일, 제16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저조한 득표를 기록했지만,

울산 등 노동자 밀집 지역에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2002년6월13일, 제3회 지방선거에서는 기초단체장 2,광역의원 11명 (비례 9명 포함) 당선,

정당 득표에서 8.13% 득표를 올리는 성과를 거두었다.

2002년3월,노회찬은 민주노동당 정기당대회에서 사무총장에 선출되었다.

2004년4월15일,제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 후보가 되어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은 10선의 국회위원에 출마했지만 정당 득표율이 못미처 낙선하여3김 시대의 막을 내렸다.

 

2005년7월22일, MBC 이상호 기자가  1997년1997년12월18일의 제15대 대선 과정에서,

안기부가 삼성그룹 이학수 부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사장의 대화를 도청한 녹음 테잎과

이를 분석한 안기부의 보고서인 삼성 X파일을 공개하자 전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X파일에는 삼성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게 뇌물을 건냈으며,

검찰 간부들에게 명절때마다 1천만원에서 5백만원의 떡값을 뿌리며

검찰 인맥을 관리했다는 내용등이 포함되어있었다.

2005년8월18일, 노회찬은 국회 법사위에서 안기부 X파일과 관련된 전·현직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했다.

검찰은 고위 검사들을 처벌하지 않고

노회찬 의원과 MBC 이상호 기자를 '명예훼손'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1심 재판부는 노회찬에게 징역 6개월 자격 정지 1년을 선고 했다.

2009년12월4일, 2심 재판부는  2심 선고공판에서 원심을 깨고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07년12월19일에 치뤄지는 제17대 대선 후보 민주노동당 경선에서 

노회찬은 권영길,심상정에게 패배 후 심상정 후보를 지지했고 권영길 후보가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민주노동당은 정파간의 갈등은 대선 후보 경선을 거치며 더욱 드러났다.

결국 권영길 후보가 대선에서 참패하자 대선 실패에 대한 책임 공방이 시작되었다.

당 지도부는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심상정 비대위를 출범 시켰다.

그러나 2008년2월3일에 열린 민주노동당 대의원 대회에서 심상정 비대위가 제시한 혁신안이 부결되면서

자주파와 평등파의 동거는 사실상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노회찬은 심상정과 함께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창당을 준비했다.

2008년3월16일, '진보신당'이 창당되었다. 노회찬은 심상정,이덕우,김영희,김석준과 함께 공동 대표에 취임했다. 2008년4월9일,창당 직 후 제18대 총선에서 출마했으나 노회찬은 석패하고 만다.

정당 지지율 2%를 넘겨 겨우 정당 등록 취소를 면할 수 있었으며,

정부의 정당 보조금도 일부분 받을 수 있었다.

총선 후 진보신당은 총선용으로 만들어진 정당을 재창당하는 논의는 잠시 중단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미국 소고기 수입 재개 협상 내용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학생과 시민들의 모임으로 출발한 2018년 촛불시위는

2008년5월2일 첫 집회 이후 2개월간 연일 수백에서 수십만 명이 참가하였으며,

6월 10일을 정점으로 하여 7월 이후에는 주말 집회가 계속되었고,

100일 이상 집회가 계속되면서 쟁점이 교육 문제,대운하·공기업 민영화 반대 및 정권퇴진 등으로

점차 정치적으로 확대되었다.

노회찬은 촛불시위 초기부터 활발하게 참여했다.

'진보신당'의 촛불시위는 총선 이후 당원수의 증가로 이어졌다.

촛불시위가 사그라 들며 당 내부에서는 미뤄둔 '제2 창당'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하자는 의견이 나타났다.

2009년3월1일,용산 구민회관에서 열린 첫 정기당대회 1차 대회에서는

현행 공동대표 체제를 임기 2년의 단독대표 체제로 전환하는 조직 개편과

당명변경,재보궐선거 예비 후보 선출 등이 결의 되었다.

정기당대회 1차 대회의 결의에 따라 2009년3월23일부터 3월27일까지 닷새간 당원 직접 투표를 실시했고,

2009년3월29일, 송파 구민회관에서 열린 정기당대회 2차 대회에서 당원 직접투표 결과가 발표 되었다.

노회찬은 심상정의 불출마로 단독 출마해서  전 당원을 대상으로 한 직접투표에서 당 대표로 선출되었으며,

노회찬은 '진보신당' 대표로 취임했다.

2009년4월29일, 국회의원 재보선 선거에서 울산 북구의 조승수 후보가 당선되면서 진보신당은

원외정당에서 원내정당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2009년년11월29일, 노회찬은 '진보신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할 것을 선언했고.

2010년6월2일,제5회 지방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노회찬이 민주당 한명숙 후보와 단일화 하였다면 당선되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조승수 의원이 진보신당의 3대 대표로 선출되면서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통합이 논의되었으나.

종복주의 문제로 인하여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의 논의가 결렬이 되었다.

'진보신당 대의원 대회'에서 통합에 대한 안건이 상정되었으나 부결되었다.


노회찬은 심상정, 조승수 등과 함께 당을 탈당해 '새진보정치연대' 라는 조직을 만들었고,

'새진보연대','국민참여당','민주노동당이  3당 합당을 함으로써

2011년12월6일,'통합진보당'이 창당되어 당 대변인으로 선임되었다.

2012년4월11일,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2013년 독수독과 이론에 의거해 의원직을 퇴직 당했다 .

2013년3월4일,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는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가 2013. 4·24 보궐선거에서

자신의 지역구였던 노원병에 출마하기로 한 데 대해 반대 의사를 밝혔다.
2014년7월30일,노회찬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정의당 후보로 출마하였다.

선거과정에서 새정치 민주연합의 기동민 후보와 단일화하여 출마하였으나 패배하였다.

1위는 나경원이었다.

2016년4월13일에 치뤄진 제20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3선의원이 되었다

.20대 국회에서 노 의원은 특수활동비 폐지를 주장했다. 

2016년부터 계속 원내대표를 하였다.

2018년 6월 재선출되어 3연임을 하게 되었다.

원외에 있을 때에는 유시민,진중권과 함께 팟캐스트 방송 '노유진의 정치카페' 진행자로 활동하였다.

2018년7월부터는 JTBC '썰전'에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게 되었다.

2018년 드루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특검 수사가 진행되던 중

2018년7월23일,
오전 9시38분,노회찬 의원은 동생 부부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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