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권               2019.12.25.수요일,맑음

정일권(생졸; 1917년11월21일~1994년1월17일)은 한국 군인이며 정치가다.

육군 대장으로 예편함과 동시에 주 터키대사로 임명되었고,주프랑스대사,주미대사,유엔총회 한국대표, 5·16 군사정변 직 후에는 외무부장관,국회위원,국무 총리를 역임했다. 


1917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출생한 정일권은

1924년, 경원 보통학교 입학,

1930년, 영신중학교 입학후 1934년 광명 중학교를 졸업했다.

1935년, 일본이 만주국에 세운 초급 장교 양성 기관인 중앙 육군훈련처(봉천)에 합격,

1937년, 졸업한 뒤 일본 육군 사관학교 유학생으로 과정을 마치고,

1940년,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군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군대인 만주국군의 대위까지 진급하였다.

1942년, 모교인 광명 중학교를 방문해 후배들에게 만주국 군관으로 입대할 것을 권유했다.

1945년,해방 후, 귀국하여 미군정 당국이 설립한 군사 영어 학교에 입학했으며,

1946년, 졸업과 동시에 한국 육군의 전신인 조선 국방 경비대의 정위(대위)로 임관하였다.

1946년12월, 경비대 제4연대의 연대장이 되었다.

1948년8월,정부 수립 이후 경비대가 대한 민국 육군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급속히 진급,

1949년2월, 육군 준장이 되었고 그 해 12월 육군 참모차장 겸 행정 참모부장이 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뒤 채병덕 육해 공군 총사령관이 전사하자,

19507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육해 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1년, 육군 중장으로 진급한 후 미국에 파견되어 미국 군참모 대학에 입교해

1952년7월에 졸업했다.

1954년2월, 귀국 뒤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고,그 해 6월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1956년, 연합 참모본부 총장이 되었으며,

1957년, 예편되었다.

   군에서 예편과 동시에 터키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그 뒤 1962년까지 프랑스주재 대사, 미국주재 대사, 브라질·콜롬비아·칠레·아르헨티나·

   파라과이·에쿠아도르 등의 겸임대사 등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963년4월, 무임소 대사 자격으로 귀국한 뒤,

1963년12월, 박정희정권의 외무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며,

1964년5월에 국무 총리로 임명되었다.

1970년12월, 정인숙 여인 피살 사건으로 정국이 소란한 가운데 사임할 때까지 재임했으며,

1966년12월부터 1967년 4월까지의 기간 중에는 외무부 장관을 겸임했다.

   총리 사임과 동시에 민주 공화당 총재 상임고문에 임명되었으며,

1971년5월25일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 공화당 전국구 후보로 당선되었다.

1972년5월, 박정희에 의해 민주 공화당 당의장 서리에 임명되었다.

1972년, 10월에 단행된 10월 유신 이후 첫 번째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인

1973년2월9일, 제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강원도 속초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당선

    되었다.제9대 국회의 개원과 함께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으며,

    유신 체제하에서 1979년까지 국회 의장직을 계속 맡았다.

1978년12월21일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 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해 당선

    되었고. 민주공화당 총재 상임고문과 한일의원 연맹 회장에 임명되었으며,

1980년,5·17사태로 국회와 정당이 해산되는 것을 계기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는 국정 자문위원, 자유수호 구국총연합회 회장, 한일 협회 회장

으로 활동했고,

1989년2월에는 한국 자유총연맹의 발기인 및 총재 등 관변단체의 장을 맡기도 했다.

1992년에는 민주 자유당 상임 고문에 임명되었다.

1994년1월17일 하와이에서 사망했다.



 

⊙ 정일권           2019.12.24.화요일,맑음

정일권(생졸;1917년11월21일-1994년1월17일)은

육군대장, 국회의원, 국무총리


1917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출생했다.

1924년, 경원보통학교 입학 1930년, 영신중학교 입학 1934년, 광명중학교를 졸업했다.

1935년, 일본이 만주국에 세운 초급장교 양성기관인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 5기)에

   합격,1937년 졸업한 뒤 일본 육군사관학교 유학생으로 과정을 마치고,

1940년,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군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군대인 만주국군의 대위까지 진급하였다.

1942년, 모교인 광명중학교를 방문해 후배들에게 만주국 군관으로 입대할 것을 권유했다.

해방 후 귀국하여 미군정 당국이 설립한 군사 영어학교에 입학했으며,

1946년, 졸업과 동시에 한국 육군의 전신인 조선국방경비대의 정위(대위)로 임관하였다.

1946년12월에 경비대 제4연대의 연대장이 되었다.

1948년8월,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경비대가 대한민국 육군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짧은

   기간중에 급속히 진급, 1

1949년2월에 육군준장이 되었고 그 해 12월에는 육군참모차장 겸 행정참모부장이 되었다.

1950년,6·25전쟁이 발발한 뒤 채병덕 육해공군 총사령관이 전사하자,

1950년7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육해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1년에 육군 중장으로 진급한 후 미국에 파견되어 미국 군참모대학에 입교해

1952년7월에 졸업했다.

1954년2월, 육군대장으로 진급했고, 그 해 6월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56년, 연합 참모본부 총장이 되었으며,

1957년, 예편되었다.

군에서 예편과 동시에 터키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1962년까지 프랑스주재 대사, 미국주재 대사, 브라질·콜롬비아·칠레·아르헨티나·파라과이·

   에쿠아도르 등의 겸임대사 등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961년,5·16 군사정변 세력이 민간인으로 옷을 바꿔 입고 선거를 통해 자신들의 민간정권을

   수립 준비 시기인

1963년4월, 무임소 대사 자격으로 귀국한 뒤, 그 해 12월 박정희정권의 외무부장관에 임명

   되었으며,

1964년5월에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

1970년12월, 정인숙 여인 피살 사건으로 정국이 소란한 가운데 사임할 때까지 재임했으며, 1966년12월부터 1967년4월까지의 기간 중에는 외무부장관을 겸임했다.

   총리 사임과 동시에 민주공화당 총재 상임고문에 임명되었으며,

1971년7월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후보로 당선되었다.

1972년5월,박정희에 의해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리에 임명되었다.

   그 해 10월에 단행된 10월유신 이후 첫 번째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인 1973년2월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해 당선되었다.

   제9대 국회의 개원과 함께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으며, 유신체제하에서 1979년까지 국회

   의장직을 계속 맡았다.

1979년2월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해 당선되었다.

   같은 해 민주공화당총재 상임고문과 한일의원연맹 회장에 임명되었으며,

1980년,5·17사태로 국회와 정당이 해산되는 것을 계기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는 국정 자문위원,자유수호 구국총연합회 회장,한일협회 회장 등

으로 활동했고, 1989년 2월에는 한국자유총연맹의 발기인 및 총재 등 관변단체의 장을

맡기도 했다.

1992년에는 민주자유당 상임고문에 임명되었다.

1994년1월17일 하와이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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