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호(鄭澔)         23019.07.21.일요일,비

정호; 노론

생졸; 1648년(인조26년)-1648년(영조12년) 

본관; 연일(延日)

호; 장암(丈巖).

고조부; 정철

증조부; 정종명

조부;정직

부; 감찰 정경연

모; 민광환의 딸


정호는 송강 정철의 4대손이다.

노론의 수장인 송시열의 제자로 매우 촉망받았으며 일생동안 노론의 중심인물로 활약했다.

영조때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1684년 관직에 오른 뒤, 계속되는 당파싸움 과정 속에서 일관되게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 때문에 소론과 남인 등 다른 당파와의 갈등이 유발되어 여러번 귀양을 갔고 파직되기도 했다.

1717년 소론의 반대를 물리치고 세자, 훗날 경종의 대리청정을 시행하게 했다.

그 후 사화를 당해 다시 유배를 갔다가 노론이 재집권 하면서 돌아와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시와 문장, 글씨에도 능했다.


1675년(숙종1년), 송시열이 귀양가게 되자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학에 힘썼다.

   그 뒤 여러 형제의 권유로

1682년 생원이 되고,

1684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정언이 되자 오도일이 붕당을 키우고 권세를 부린다고

     탄핵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송시열이 사사당하자, 그는 파직되고 문외출송 당했다가 경성에

    유배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풀려나 지평·수찬·교리 등을 역임하고,

1696년 이사상을 논핵하는 등 과격한 발언으로 파직되었다.

1698년 다시 수찬·집의·사간을 거쳐 이듬해 동래부사로 나갔다가,

1700년에 신은 12만여 냥을 왜에 상매한 관계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광주부윤으로 기용되었고,

1702년 승지·부제학을 거쳐

1704년 함경도 관찰사에 이어

1710년 대사간·대사헌을 지냈는데, 당론을 일삼는다 하여 흥해·갑산 등지에 유배되었다.

1713년 대사성에 재임용되어 송시열의 묘정배향을 건의하였다.

1715년에는 부제학으로서 유계의 유저인 '가례원류'의 발문을 썼다.

  그 내용에 소론인 윤증이 송시열을 배반했다는 내용이 문제되어 파직되었다.

  이듬해 노론이 승리함으로써 대사헌이 되었는데, 이 때 윤선거의 문집 '노서유고'가 간행되자,

  효종에게 불손한 내용으로 썼다 하여 훼판하고 윤선거 부자의 관작도 추탈하게 하였다.

1717년 세자(훗날 경종)의 대리청정에서 소론의 반대를 물리치고 이를 시행하도록 했고, 예조판서를 거쳐 다음 해 이조판서에 올랐다.

1721년(경종 1) 실록청총재관 '숙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다가 신임사화로 노론 4대신과 함께 파직되어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노론의 재집권으로 풀려나와 우의정에 승진되어 신임사화로 죽은 노론 4대신의 신원을

   누차 상소했으며,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729년 기로소 들어갔으며, 영중추부사로 죽었다.

                

일생을 노론의 선봉으로 활약했으며 늘 가난하게 지냈다 한다. 시문과 글씨에 모두 솜씨가 있었다.

충주의 누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장암집' 26권이 전해지고, 편서로 '문의통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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