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호용                     2019.12.27.금요일,맑음

정호용(생졸;1932년9월10일~현존)은 대구에서 출생하여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후일 육사의 동기가 되는 노태우는 경북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이자 동창이었다. 1951년에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전쟁 중 육군에 병사로 입대하여 참전하였다. 그 뒤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11기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전두환, 노태우가 육사 11기 동기생이며 이후 전두환, 노태우 등과 사적 모임인 하나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1951년,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25 중 육군에 병사로 입대하여 참전하였다

그 후 육군사관 학교에 진학했고

1955년, 전두환,노태우와 육사 동기로 육군 사관학교를 11기생으로 졸업하고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고,이 후  전두환,노태우 등과 사적 모임인 하나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하나회가 전두환 파벌과 윤필용 파벌로 나뉠 때 그는 전두환 파벌에 가담하였다.

1963년,군 복무 중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5년,

육군 본부 인사장교를 거쳐 중령으로 재직 중 육군대학에 입교하여 1967년에 수료하였다.

1967년,

육군본부 진급 계장을 거쳐 수직 이동하여 육본 진급 과장으로 승진했다.


그 뒤 월남전에 참전하여 육군 제9보병사단 예하대대의 대대장으로 베트남에 파견,활동하고 귀국하였으며

1971년,육군 대령으로 승진하여 연대장 보직을 두루 역임한 뒤

1974년, 특전사 제7공수 특전여단이 창설되면서 초대 제7공수특전 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1977년, 특전 사령부(특전사) 참모장을 거쳐 소장으로 진급,

1978년, 대구 주둔의 육군 제50보병 사단장이 됐다.

그러나 하나회의 리더 '윤필용 사건'발언 파문으로 한때 예편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1979년,12.12 군서 반란 이후 특전사령관에 취임했다.

박정희 대통령 암살 이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행각을 방조한 의혹이 있는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의심한 전두환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한 12·12 사건 때는 대구에서 상경하는 도중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이 후 특전사령관에 취임했다.

1980년, 5.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와 서울을 3차례 오가면서 공수부대로

부터 보고를 받거나 현장 상황을 확인했다.

1980년5월27일, 상무충정 작전 직전 육군 본부로부터 가발, 수류탄 등 군수품을 지원받아 현지의 공수 부대에 제공했다.

1980년5월30일, 국가보위 입법회의가 구성되자 상임위원회 위원의 한 사람으로 위촉되었다.

1980년8월27일,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신군부 인맥 서열 3순위로 육군 대장까지 승진했고,

이듬해 1981년에는 육군본부 육군참모차장이 되었다가 1983년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했다. 예편 후에는 내무부장관과 국방부장관을 각각 역임했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건국데학교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박사학위를 받는다.

1985년에는 일해재단 연구원이 되었다.

1987년1월,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다가 4개월 만인 그 해 5월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민주정의당 당내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같은 해 7월 국방부 장관으로 내각에

복귀했으나 전두환 정권이 불과 7개월밖에 남지 않은지라 오래 재직하지 못했다.

1988년5월, 이후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정치인으로 변신했고 민주정의당 대구경북지구당 위원장에 임명,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는 대구 지역에서 출마해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여소야대 국회에서 제5공화국 비리에 대한 청문회, 5·18 청문회로 사회 여론이 공직사퇴요구를 제기하자 결국 1990년 1월 5일에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2] 이후 명예회복을 위해 자신의 지역구 보궐선거에 다시 출마했지만 정치적 부담을 느낀 노태우 정부의 압력에 의해 후보직에서 다시 사퇴했다.

1990년3월,부인 김숙환의 자해 미수 사건으로 파란을 겪기도 했고,4월 초에 미구으로 출국했다가 귀국하였다.

1992년,제14대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고 후에3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민주 자유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우리가 남이가"(경남 출신 김영삼과 정호용의 출신 지역인경북인들은 동향인이라는 뜻)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경북에서 김영삼의 대통령 선거운동을 도왔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과거 청산 작업에 따라

1996년, 다시 12·12 군사 반란과 5·18 내란 혐의로 구속되어 유죄가 확정되었다.

1996년,제15대에서 옥중에서 대구 서갑에 출마하였으나 2위로 백승홍에게 석패하였다.


1980년,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정호용은 5.18 당시 전두환과 지속적으로 접촉하고

수 차례나 광주와 서울을 오갔다. 또한 정호용은 특전사령관이였기 때문에 특전사 소속 부대의 잔혹행위를 둘러싸고 훗날 책임론이 제기됐다. 1989년에 열린 광주특위 청문회에서 정호용은 당시 특전사 소속의 진압부대들은 당시 광주 상무대에 있던 전교사에 배속됐기 때문에 자신의 책임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신군부는 공식적인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사조직 하나회의 인맥에 의한 명령을 내리는 일이 빈발했음을 고려해야 한다.

1996년1월,

5.18 검찰 수사 결과 정호용이5.17 쿠테타에서의 내란모의참여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 관여했다는 것이 밝혀졌고, 이에 따라 이듬해 1997년 4월 대법원은 정호용에게 내란모의참여죄, 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징역 7년을 선고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였던 이후, 그 해 광복절에 정부에게 12·12, 5·18 관련자를

사면받으면서 석방된 정호용은 별다른 활동 없이 지내다가

2002년에 종친인 정몽준의 대통령 선거 출마를 돕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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