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차 수신사 파견          2019.08.15.목요일,맑음

이전까지는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하는 사신을 통신사라 불렀으나,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이후 수신사로 바뀌었다.

이는 양국이 근대적 입장에서 사신을 교환한다는 뜻이다.

1876년4월,

예조참의 김기수를 필두로 한 제1차 수신사 일행 76명이 일본으로 떠났다.

이들은 군사 시설, 공장 등을 돌아본 후 일본의 새로운 문물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수신사는 마지막 조선 통신사(1811년) 이래 65년 만에 일본을 방문한 정부 공식 사절단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 도쿠가와막부(덕천막부)의 간청으로 국교를 재개하고

고종 초년까지의 260여 년 동안 10여 차례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냈다.

 일본의 사절 역시 여러 번 조선에 와서 양국 사이에는 평화적 외교가 진행되었고,

동시에 부산에서는 일본(왜관)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태도가 전과 같지 않자 쇄국주의자였던 흥선대원군은 일본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이 은퇴하고 왕비 민씨 측이 정권을 잡자,

일본은 다시 우리나라와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외무성 관리 모리야마를 동래에 파견하였다.

일본측은 동래부사 황정연과의 교섭이 뜻대로 되지 않자 일부러 군함 운요호를 강화도에 보내 조선 군대와 충돌하게 하였다. 이것이 ‘운요호사건’으로서, 책임을 묻는 체하며 전권대신 구로다와 이노우에를 강화도에 보내 조선측 대표 신헌·윤자승과 회담하고, 1876년 2월 2일 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 체결 후 일본은 계획된 절차에 따라 조선에 초대외교 형식을 취하여 사신을 파견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렇게 되자 조선 정부는 사례의 뜻을 표하는 의미로 사신 행차를 보내기로 결정,

예조참의 김기수를 수신사로 파견하게 되었다.

수신사 일행 76명은 그 해 4월 4일서울을 출발하여, 그 달 29일 일본 기선을를 타고 부산을 떠났다. 수신사 일행은 이튿날 시모노세키(하관)에 도착한 뒤 약 2개월간의 시찰을 마치고 윤5월 7일부산에 돌아와 6월 1일서울에 도착한 뒤 고종에게 그 동안의 일을 보고하였다.

이들은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예정에도 없던 일황과 만나고, 태정대신 산조와 이토(이등방문)·이노우에 등 일본 정계 요로로부터 연회에 초대를 받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또 원로원·의사당을 비롯해 육군성·해군성·내무성·공부성·문부성·대장성과 경시청·개척사 및 육해군의 군사시설과 훈련 상황, 박물관·소방 조련 등 일본이 자랑하는 근대화한 모든 시설을 관람하는 외교 의례상 전례가 없는 환대를 받았다.

사신 행차가 일본으로 떠날 때까지 국내 여론은 일본에 대하여 경계하는 편이었다.

그러나 김기수의 견문기인 '일동기유''수신사일기'를 보면 일본행 이후 그의 일본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수신사 김기수 일행의 일본관과 그가 고종에게 올린 '복명별단'은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척신과 조신들에게 개국주의에 커다란 흥미와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강요에 의했다고는 하나 그 뒤 우리나라가 대일 관계, 나아가 국제 정세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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