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대 대통령 노태우                  2019.12.27.금요일,맑음

대한민국의 제13대 대통령인 노태우(생졸;1932년12월4일~현존)는

경북 달성 출신으로 경북 고등학교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해 육사 1기생이 되었다.

사관생도 시절 전두환·정호용 등과 친분을 맺고 하나회의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전두환 정권에서는 내무부 장관 등을 지냈으며,

1987년 개헌 이후 치러진 대통령 직접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재임기간 북방정책을 펼쳐 중국,러시아와 수교했다.

퇴임 이후 비자금 사건과 내란죄로 인해 징역 22년6월 및 추징금 2,838억 원을 선고받고

구속되었으나 1997년 특별 사면되었고,추징금은 2013년에 완납되었다. 


1932년12월4일,

노태우는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신용리에서 공산면사무소 면서기를 지낸 아버지 노병수와 어머니 김태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노병수는 노태우의 8살때 교통 사고로 사망해 가계는 가난했다.

노태우는 숙부 노병삼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갔다.

1939년3월,

대구 공산 소학교에 입학하여 집에서 6킬로나 떨어진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고 한다.

공산소학교를 졸업한 후 숙부의 도움으로 대구공업중학교와 경북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

의사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 때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학도병으로 참전하게됐다.

학도병으로 있던 중 대구의 헌병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육군사관학교에 편입해 정규 육사 1기생이 됐다.

사관생도 시절에 전두환,정호용 등과 친분을 맺었으며 럭비부에서 선수로 활동했다.

1955년,

육사를 졸업하고 소대장으로 임관한 뒤 이듬해 봄에 육군 제5보병사단 소대장으로 발령

받았는데 이때 보병 사단의 사단장이 박정희였다.

박정희는 정규 육사 출신인 노태우를 각별하게 대했고 점심에 초대하거나 함께 오리 사냥을 가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1959년 5월31일,

노태우는 육군 중위 재직중 친구인 김복동 중위의 동생 김옥숙을 만나 결혼했다.

1959년,

전두환 등 여타 장교들과 함께 6개월동안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군사 유학을 가서 심리전

학교, 특수전학교 두 과정을 수료했다.

1960년 초에는 '북극성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1960년에 대위로 진급해 군사 정보대학 영어 번역담당 장교가 됐다.

1961년,

전두환 등과 학생 군사교육단(ROTC) 창설 요원이 되고 서울대 학군단 교관이 되어,

전국 16개 대학에서 모인 장교 후보생을 교육했다.

이때 5.16 군사 정변을 일어났고 노태우는 전두환과 함께 군사 혁명 지지를 선언하자

박정희는 그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 정보과에 배속시켰다.

1962년에는 하나회의 모태가 되는 북극성회 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1966년,

노태우는 국군 방첩부대 정보장교를 거쳐 육군본부 정보과장과 방첩과장으로 민심과 정치

동향을 수집했다. 

1967년,

중령으로 진급하여 베트남 전쟁에 대대장으로 파견됐다.

노태우는 퀴논 전투에서 북베트남 군대를 전멸시킨 공로로 을지 무공훈장을 받았다.

1968년,

귀국한 뒤에는 육군 대학을 수료하고 수도 경비사단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1970년,

대령으로 진급하여 육군참모총장 수석 부관장교가 됐다.

1971년에 보병연대장을 거쳐 1974년 1월 1일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고 4년간 공수특전여단 여단장을 지냈다.

1976년,

박종규,차지철 등에 발탁되어 대통령 경호실 행정 차장보로 임명됐다.

1978년1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전두환이 사단장으로 전출되면서 전두환 등의 후원

하에 대통령 경호실 작전 차장보로 전격 발탁됐다.

노태우는 하나회의 모태가된 육사 11기 모임인 북극성회에서 1962년 회장을 맡기도 하는 등 전두환을 중심으로 조직된 하나회의 핵심 멤버였다.

1979년3월,

그는 윤필용 사건으로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전두환이 재기에 성공하여 보안사령부 사령관으로 복직된 뒤 육군 제 9보병 사단장으로 전임됐다.

1979년3월,

노태우는 청와대 근무를 마치고 9보병 사단장이 되어 전방으로 발령났다.

1979년,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고 12월12일에 전두환과 함께 반란을 도모

하며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를 제거했다.

1979년,12.12 당시 노태우는 자신이 실패할 것에 대비해 김옥숙의 사촌 동생 박철언에게

가족을 부탁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전두환, 정호용 등과 함께 계획을 세워 정승화·김재규

등을 군부에서 축출하고 정승화 체포 작전을 진행하였다.

1979년,12.12 반란에 성공한 후 노태우는 수도경비 사령관이 되었으며

1980년,

5.17 비상 계엄 확대 조치에 동조해 핵심 세력이 됐다.

국가보위 입법위원회 상임 위원이 되어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했고

1980년8월,

중장으로 진급하여 전두환의 후임으로 보안 사령관이 됐다 .

1981년7월, 육군대장 진급 후 예편했다.

예편하여 정계에 입문해 전두환의 후원으로 민주 정의당 대표 최고위원이 됐다.

1981년7월16일,

정무 제2장관에 임명됬으며 11월에는 대통령 특사로 임명되어 유럽과 미국, 아프리카를

순방하여 가톨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나 한국 방문을 간청하여 성사시키기도 했다.

1982년,

통일원에서 북조선에 남북 고위급 회담을 제의하자 2월25일부터 정무2장관으로 남북한

고위급 회담 수석대표로 활동했다.

1988년, 정무 2장관 당시 외교 안보 담당 특보를 겸해 올림픽 유치를 확정지었다.

1982년3월,

체육부 장관에 임명되고 같은해 4월 내무부장관,대한체육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고

대한체육회 회장에 선출됐다.

1985년2월, 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로 입후보해 당선되고,

곧바로 민정당 대표 최고위원에 임명됐다.

총재인 전두환은 서울 서대문구 출마를 권했으나 전국구 의원을 요구했다는 후일담이다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조직 위원장으로 아시안 게임을 주관했다.

1987년6월, 민정당 내 경쟁자였던 노신영과 정호용 등을 제치고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어 6월10일에 잠실 체육관에서 열린 민정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1987년4월13일,

전두환은 일체의 개헌 논의를 금지하는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1985년 총선 이후 줄기차게 개헌을 주장해온 야권과 재야세력은 반발했다.

이 와중에 서울대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며 6월 민주 항쟁이 일어나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1987년6월29일,

민정당 대표위원인 노태우는 기자 회견을 열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노태우는 청와대에 건의해 만약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대통령 후보는 물론 당 대표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밝혔다.

민정당은 긴급 의원 총회를 열고 노태우의 제안을 당의 공식 입장으로 추인했다.

1987년7월1일,

전두환은  특별 담화를 통해 노태우의 6.29 선언을 대폭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6.29 선언은 전두환이 먼저 직선제 수용을 결정한 뒤,

노태우의 당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노태우가 건의하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다수다.

전두환은 자신이 먼저 노태우에게 직선제를 검토해보라고 제안했다고 밝혔고,

노태우는 선언 이후에 청와대를 방문해 사후에 이야기했다고 주장했다.

1987년7월9일,

사면 복권된 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를 두고 김영삼과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재야단체와 정치권에서는 김영삼·김대중의 후보 단일화를 주장하였으나 끝내 결렬됐다.

1987년10월10일,김영삼이 대통령 선거 출마를 발표하자,

1987년10월18일,김대중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고 11월에 평화 민주당을 창당했다

1987년10월29일,

헌법개정 논의는 민정당과 민주당을 대표하는 여,야 '8인 정치회담' 합의로 헌법이 개정·공포되었다.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은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고 국민에 의한 직접 선거의 원칙을 명시하였고 1987년 대통령 선거는 1972년 유신 이후 최초로 국민들의 직접선거로 치러졌다.

1987년12월16일,

13대 대통령 선거에는 민주정의당의 노태우,통일민주당의 김영삼,평화민주당의 김대중,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통일한국당의 신정일 등 6명이 출마하여,

노태우는 36.6%(828만표)의 득표율을 확보해 당선됐다.

김영삼은 28.0%(633만표),

김대중은 27.1%(611만표)를 얻었다.

이른바 '양김'이라 불리는 김영삼·김대중의 분열은 노태우가 당선되는 가장 큰 원인이 됐다.

노태우는 선거에서 '보통 사람의 시대'를 슬로건으로 내세워 친근한 이미지를 구축했다.

이 슬로건은 6월 항쟁으로 분출한 시민 대중의 요구에 부합해 김영삼,김대중이 주장하던

'권위주의 대 민주주의'의 구도를 뒤집는데 일조 했다는 평가다.

또 노태우는 6.29선언을 내세워 스스로를 정치적 안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으로 홍보하고

상대 후보에는 색깔 공세을 취했다.

1987년11월29일,

선거 18일 전인 11월29일에는  KAL858기 폭파 사건이 벌어지며 불안감을 자극했다.

비행기 폭파범 김현희가 선거전 날인 12월15일 압송되고 장면이 TV 방송으로 생중계 됐다.

당시 노태우는 인천국제공항,경부고속철도 서해안 고속도로 등 사회 간접자본 건설 공약을 많이 내놓았다. 또 노태우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중간 평가'를 받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1988년2월25일, 노태우는 13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노태우는 집권 초기 전두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해 비아냥을 들었다.

1987년12월26일,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열흘 만 에 군 인사를 단행해 최세창,고명승,최평욱 등

자신의 친위 세력을 군 요직에 앉혔다.

또 당선자 노태우가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는 과정에서도 인선작업에 관여했다.

노태우는 장관에서 가급적 군 출신을 배제하려 했으나 전두환에 의해 5명의 군 출신 장관이 기용됐고, 5공 시절 장관을 했던 사람이 8명이나 포진해 있었다.

군의 요직도 모두 전두환 세력이 차지했다.

전두환 자신도 국가원로 자문회의를 만들어 의장이 됐다.

1988년2월25일,노태우는 취임한 직후 국가원로자문회의의 규모를 축소했다.

같은해 실시되는 4.26 총선에 출마할 이들을 뽑는 민정당 공천에서 권익현,권정달,김상구 등 5공 핵심 세력을 배제했다.

또 전두환의 동서이자 하나회 회원인 이재형 국회의장과 노신영 전 국무총리도 뺐다.

대신 노태우는 최측근이자 인척인 박철언이 이끄는 월계수회 회원들을 대거 공천했다.

노태우는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을 각종 비리와 부정 축재를 벌인 혐의로 구속했다.

전경환은 새마을운동본부 회장을 맡으며 5공화국 내내 숱한 권력형 비리와 추문을 낳은

인물이었다.

1988년4월13일,

전두환은 연희동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과 민정당 명예 총재직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1988년,

4.26 총선 결과 민정당은 299석 중에 절반에도 못미치는 125석을 얻었고,

평민당,민주당,공화당 등 야당이 174석을 차지하여 여소야대 국회가 되었다.

야권과 시민단체들은 광주 학살 책임자 처벌과 12.12사건과 5.17사건 진상 해명 등

'5공 청산 요구'가 높았고,학생들은 전두환 체포조를 만들어 연희동에서 시위를 벌였다.

당시 국회의 주도권은 제1야당인 평민당을 이끄는 김대중이 가지고 있었다.

국회는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광주특위)와 제5공화국 비리조사특위(5공특위)를 구성하고 청문회를 열었다.

김대중은 꾸준히 전두환의 천문회 증언을 요구했다.

1988년10월17일,

노태우가 미국 순방길에 올랐을 때,검찰은 전두환의 친형 전기환과 사촌동생 전우환을 구속하고,처남 이창석도 구속하는 등 전두환의 친인척을 대거 구속했다.

1988년11월23일,전두환은 TV 생중계로 대국민 사과문을 읽은 후 백담사로 떠났다. 

1988년12월13일,

노태우는 검찰에 '5공 특별 수사부'를 설치하도록 하여 47명을 구속했다.

야당 측은 검찰의 축소 수사라며 정호용,이원조,이희성,장세동,허문도,안무혁 등 5공 비리의 핵심 6인을 사법 처리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방정책'은 노태우 정부가 수립한 새로운 대외 정책을 지칭한다.

소련과 중국을 포함해 동유럽과 아시아의 사회주의권 국가들과 새롭게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고, 이를 통해 한반도 평화정착과 북한의 개혁 개방을 유도해내는 정책을 뜻한다.

북방정책의 목표는 '7.7 선언'을 통해 드러난다.

1988년7월7일,

노태우는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특별 선언’, 이른바 ‘7·7 선언’을 내놓았다.

이 선언은 노태우가 6개 항의 대북정책으로 북한·중국·소련에 대한 개방을 표명하고 있다. 이 선언은 "북한을 경쟁과 대결이라는 적대적 대상이 아니라 통일을 위한 동반자,

즉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아야 한다"고 밝혔다.

1988년10월18일,

노태우는 제43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7.7 선언의 주요 내용을 설명하고 남북한이 한민족으로서 번영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동반자로서의 관계를 진전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후 노태우는 남북한이 동시에 UN에 가입한 1991년과 1992년에도 유엔에서 연설을 했다.

1989년2월,

당시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은 개혁,개방을 모토로 시장 경제를 도입하고 있었다,

노태우 정부는 6억 달러의 차관을 들여 헝가리와의 수교를 성사시켰다.

이후 폴란드와 11월에,유고와 12월에 수교를 맺었으며 1990년3월에는 체코, 불가리아 및 루마니아 등 동유럽 국가들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또 아시아지역에서 몽골과도 1990년3월 수교했다.

1990년9월30일,

당시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고 있던 소련에도 3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고 한-소 국교

정상화를 선언하고 외교 관계를 맺었다. 

1992년8월24일,

중국과의 수교는 중국이 요구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 등의 문제로 인해 한-소 수교보다 2년 늦은  한-중 수교에 관한 공동 성명에 서명하면서 이뤄졌다.

1989년2월,

남북은 남북고위급회담의 예비회담을 시작으로 일련의 회담을 진행했다.

1991년9월, 남북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고

1991년12월13일,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했다.

1991년12월31일,남북은 국제 원자력 기구(IAEA)의 사찰을 수용한다는 내용의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발표했다.남북 기본 합의서는 1992년2월19일에 발효했다.

하지만 미국의 부시 정권은 영변에 있는 2개의 시설이 핵시설로 의심된다며 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은 핵문제 해결이 남북 관계 개선에 앞서야 한며 특별 사찰을 주장했고 북한은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결국 남북 관계는 다시 냉전으로 전락했다.

1988년,

노태우의 7.7 선언 이후 재야 단체 등에서는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륙 주장이 대두됐다.

그러나 정부는 민간 차원의 남북 교류는 엄금했으며 문익환,임수경 등의 방북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공안 정국을 조성했다.

1989년3월18일,

일본에 머물고 있던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방문한다고 발표하고 베이징을 거쳐 3월20일 평양에 도착했다. 이어 닷새만인 3월25일 목사 문익환이 남한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만나 대담했다.

문익환은 당시 조국평화통일 위원장 허담과 4.2 남북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통일 방식으로는 연방제 안을 택하고 정치와 군사 문제 및 교류 협력 문제를 추진할 것을

결의하는 내용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좌경 용공세력을 색출한다'며 안기부·검찰·보안사 합동으로 공안합동수사

본부를 설치하고 국가 보안법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며 재야와 학생운동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를 진행했다.

이과정에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과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지도부에

대한 대규모 검거가 벌어졌다.

1989년4월13일,

문익환은 귀국하자 공항에서 체포되어 구속됐다.

1989년6월30일,

이러한 와중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는 평양에서 열리는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한국 외국어대 4학년 임수경을 전대협 대표자격으로 보냈다.

임수경은 47일간 평양에 머무르며 북측 학생대표와 '남북 청년학생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귀국할 때는 반드시 판문점을 통과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판문점 귀환을 허용하지 않았고,정의구현 사제단에서는 문규현 신부를 북한에

파견해 임수경을 데려오도록 했다.

이들은 단식 등을 벌인 끝에 8월15일 판문점을 통해 남한으로 귀환했다.

이들은 귀환 직후 체포되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1988년7월,

임수경이 방북하기 사흘 전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 서경원이 사흘간 북한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구속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안기부 등은 평화민주당 총재 김대중이 관련되었는지 여부에 수사를 집중했고,

김대중을 불고지죄와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했다.

공판에서 서경원 의원은 수사 과정에서 고문 등 안기부의 가혹행위로 허위 자백을 했다고

주장했다.

1990년1월22일,

노태우는 여소야대 정국을 타개하기 위해 비밀리에 '3당 합당'을 추진했다.

민정당 총재인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청와대에서 전격 회동을 갖고 3당 합당과 함께 민주자유당 창당을 선언했고 216석을 가진 거대 여당 인

민자당이 탄생했다.

13대 총선을 통해 만들어진 여소야대 정국은 여대야소로 바뀌었고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유일한 원내 야당으로 남게됐다.

1990년10월4일,

육군 보안사 소속 이병 윤석양이 한국기독교회협의회 인권위 사무실에서 양심 선언을 하고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기록을 공개했다.

정치인 등 주요 인사 1600여 명에 대한 불법 사찰 실태가 드러났다.

1990년10월13일,

야당과 재야단체는 공동 집회를 열고 노태우와의 관련성을 조사하고 만약 관련이 있다면

대통령직을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방부 장관과 보안 사령관이 해임되고 보안사는 국군 기무사령부(기무사)로 개편됐다.

노태우는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규탄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린 1990년10월13일,

 '범죄와 폭력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1990년11월엔 '범죄와의 전쟁'의 일환으로 '새질서 새생활 운동' 캠페인을 시작하고 전국의 공무원들을 동원해 운동을 전개했다. 

학원 자주화 시위에 참여했던 명지대 학생 강경대가 사복 경찰들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했다. 이에 항의하는 시위와 대학생들의 분신으로 이어졌다.

4월에는 전남대 학생 박승희가 강경대 치사 사건과 공안정치 분쇄를 주장하며 분신했고

5월에는 안동대 학생 김영균과 경원대 학생 천세용,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등 모두 11명이 분신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에 대해 정부는 분신 배후설을 유포했고,

시인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는 글로 분신을 비난했다.

박홍 서강대 총장은 김기설의 분신 자살에 대해 죽음의 블릭 리스트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

했다.검찰은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했다며 강기훈을 붙잡아 구속했다.

노태우 정부의 분신 배후설은 대학생과 재야 세력의 도덕성에 치명적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유서 대필 사건은 조작 사건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옥살이를 했던 강기훈은 재심 상고심을 거쳐 24년 만인 2015년 5월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서울고법과 대법원은 김씨의 유서 필적이 강씨의 필적이라고 판단한 1991년 국과수의 감정결과가 신빙성이 없다며 강씨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1992년3월24일,

200석을 넘는 의석을 확보했던 민자당은 치러진 총선에서 참패해 과반수에서 한석 모자라는 149석으로 줄어들었다.

신민주연합당과 꼬마민주당이 합당한 민주당은 97석,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이 창당한 통일국민당은 31석을 차지했다. 

노태우는 충남 연기군수 한준수의 '관권 선거 폭로'로 위기를 맞았다.

그는 민주당 원내 총무실에서 14대 총선이 유례없는 관권 부정 선거였다며

'중앙'에서 내려온 문서 15종과 수표 다발을 공개했다.

1992년8월28일,

이에 노태우는 민자당 총재직에 사퇴했고,'정치적 중립'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1992년9월17일, 민자당을 탈당했다.

노태우는 '중립 내각' 구성을 선언하고 한림대 총장 현승종을 국무총리로 하는 '거국 중립

내각'을 출범시켰다.

1993년2월24일,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이 당선된 이후 노태우는 청와대를 떠나 서울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1995년10월19일,

노태우의 비자금 문제가 불거졌다. 

국회의원 박계동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노태우가 비자금 4000억 원을 조성했다고 폭로하고 신한은행 서소문지점에 예치된 128억2700여 만원의 예금 조회표를 증거로 제시했다.

다음날 정부가 비자금 수사 방침을 밝혔다.

사흘 뒤 관계자들이 검찰에 출두하고 조사가 시작되며 비자금의 실체가 확인되기 시작했다.

1995년10월27일,

노태우는 사과문을 내 재임 중 5000여 억원의 통치자금을 조성했고 퇴임 시 1700여 억 원이 남았다고 말했다.

이후 검찰은 삼성,현대,대우,한보를 비롯한 34개 재벌총수들에 대한 소환 조사를 진행했다.

당초 검찰 수사는 비자금에 대한 것으로 한정됐으나 '12.12 사태와 5.18 내란에 대해서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면서 국회가 '헌정 질서 파괴 범죄의 공소 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했고 검찰은 형법상 내란죄에 대해서까지 수사를 확대했다.

수사 결과 총수들은 30억원에서 250억원까지 뇌물을 줬으며,

노태우의 비자금은 41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5년11월16일, 노태우는 구속됐다.

1996년8월26일,

1심 재판부는 징역 22년6월과 추징금 2838억9600만원을 선고했다.

당시 전두환은 사형과 추징금 2259억5000만원이 선고됐다.

 1997년4월,대법원은 2심 재판부가 판결한대로 ‘전두환 무기, 노태우 징역 12년’을 확정

했지만,

1997년12월,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들을 모두 특별 사면했다.

노태우는 김옥숙과 결혼해 1남1녀를 뒀다.

아들 노재헌은 신정화와 결혼하고, 딸 노소영은 SK그룹 회장 최태원과 결혼했다. 

노태우는 소뇌위축증이라는 희귀병으로 투병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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