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2019.12.28.토요일,맑음

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생졸; 1945년9월1일`2009년5월23일)은

본관은 광주이며 경남 김해시 진영읍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창 초등학교,진영 중학교,1966년에 부산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를 졸업 한 후 어망 제조업체 잠시 근무 후 그만두고 건설 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사법 시험을 준비하였다.

1968년, 육군에 입대하여 만기 제대한 뒤 그만 두었던 사법시험을 다시 준비하였으며,

1973년1월,동향인 권양숙 여사와 결혼하였다.
1975년,4번째 도전 끝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77년,대전 지방벙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사직하고

1978년5월,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한동안 변호사 생활을 하였다.

1981년,제5공화국 정권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 조작 사건인 '부림 사건'의 변론을 맡은 것을 계기로 학생.노동자 등의 인권 사건을 변호하는 인권 변호사로 변신하였다.

1987년, 6월 항쟁에 앞장섰다.

대우 조선의 이석규가 거리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제3자 개입 금지'를 위반한 혐의로 구속되어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88년4월26일,통일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의 제안으로 정치에 입문하였고

제13대 국회위원으로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 한 뒤 '5공 비리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1월22일,여당인 '민주 정의당',야당인 '통일 민주당','신민주 공화당'이

'민주 자유당'으로 합당하자 부도덕한 야합이라 비난하며 정치적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다.

1992년3월24일,제14대 국회위원 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한 뒤

1993년,통합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고,지방자치 실무 연구소를 열었다.
1997년, '새정치 국민회의' 부총재 및 수도권 특별 유세단 단장을 역임하고,

1998년,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4월13일, 제16대 국회위원 총선거에서 낙선했다.

2000년8월부터 2001년4월까지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 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다.

2002년11월18일,'국민통합21'의 대통령 후보인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에 성공 한 뒤에

2002년12월19일, '새천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한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물리치고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3년2월25일,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3년 말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개혁 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하였다.

2004년3월12일, 선거 중립 의무 위반과 측근 비리 등에 대한 야당의 사과 요구를 거절하자

야당인 한나라당,새천년 민주당,자유민주연합이 탄핵 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한나라당의 박관용 국회 의장은 경호권을 발동하여 소수 여당인 열린 우리당 의원들의

반대를 저지한 채 국회 본회의에 탄핵 소추안을 기습 상정하였고,

한나라당.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이 투표하여 탄핵 소추안을 가결되자,>

이를 반대하는 비난이 빗발치고 전국에서 탄핵 반대 촛불 시위가 잇따랐다.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소추를 당해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고

국무 총리 고건이 직무를 대행하였다.

2004년4월15일에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 민주당,/p>

한나라당,자유민주연합은 역풍에 휩싸여 참패하였고 열리우리당은 과반이 넘는 152석을

차지했다.

2004년5월14일,

헌법 재판소가 탄핵 소추안에 대하여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두 달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2007년10월4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분단 후 처음으로 걸어서 판문점을 통과하여 평양을 방문,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정상회담을 열어 '남북관계 발전 및 평화번영을 위한 10.4언)'을 발표하였다.
2008년2월24일,

대통령 임기 후 봉하마을로 귀향하여 전원생활과,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사람들과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였고,

건전한 토론 문화를 조성한다는 취지로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개설하여

세상과 소통하였다.

2009년4월30일,

퇴임 후 '국가 기록물 무단 유출'에 대한 수사를 시작으로 측근과 친형,부인,아들,딸 등에

비리에 연류되었다는 의혹으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다.

2004년5월23일,

'국가 기록물 무단유출'에 대한 수사를 시작으로 검찰에 의하여 측근과 친형,부인,아들,딸

등이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자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임기중 대통령 선거에서 공약으로 내세웠던 '신행정 수도 이전'에 대하여 헌법 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내림으로써 정치적 타격을 입었고,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여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언론과 대립하여 임기 내내 언론으로부터 호의적 반응을 얻지 못하였으며 보수 진영으로

부터는 '친북 좌파'라는 비난을,진보 진영으로부터는 '신자유 주의자'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노무현 그는 정치 인생을 일관하여 '지역 주의'를 청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권위 주의'를 타파하는 데도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미 외교에서는 '대등한 관계'를 추구하였으며,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하여 북한과

긴장 관계를 해소하는 데 힘썼다.


저서로 '여보, 나 좀 도와줘(1994)','노무현이 만난 링컨(2001)',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

(2002)' 등이 있다.

2004년 영국 왕실로부터 최고 훈장인 '바스 대십자 훈장'을,

2007년 카타르 정부로부터 '독립대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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