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6대 인조 이야기          2018.12.21.금요일,맑음

인조; 이종

생졸; 1595-1649.55세

재위기간; 1623-1649.26년

능;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위치한 장릉(長陵)

가계도;

 조부; 선조

 조모; 인빈 김씨

   부; 원종 정원군

   모; 인현황후 구씨

      능풍군; 조졸

      능양군 (조선 16대 인조); 인조는 인령 왕후 한씨를 비롯 3명의 부인에게서 6명의 왕자와 1명의 옹주를

                                         낳았다.

        인렬왕후 한씨; 1594년-1635년,42세

                             영돈녕 부사 한준경의 딸로써 1610년에 능양군(선조)와 결혼하여 청성현 부인에

                             봉해지고 1923년 선조가 왕위에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소현세자; 생졸-1612-1645

           봉림대군; 17대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

        장렬왕후 조씨;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

        귀인 조씨; 1630년 숙원으로 궁에 입성하여 귀인까지 올랐다.소용인 조씨는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한

                       인물로 후궁으로서 모략을 일삼으며 권세를 장악했다.1635년 인조13년 정비 인령왕후가

                       죽자 1638년 인조16년 계비로 책봉됐던 장렬왕후 조씨를 인조와 별거시킬 정도로 투기가

                       심하고 모사와 이간질에 능하였다.

                       소용 조씨는 소현세자빈 강씨와 불화가 심했는데,이로인해 인조가 장자인 소현세자를 감시

                       하게 되었다.병자호란 후 1637년 인조 15년,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청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관계를 유지하자 소용조씨는 세자가 왕위를 차지할 목적이라며

                       갖은 모함으로 인조를 부추겼다.결국 1645년 인조 23년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가 환국

                       한 후 두달만에 소연세자는 돌연사하고 만다.당시 주치의 이형익은 소용 조씨의 어머니

                       한옥의 집에 드나들던 자로 인조의 신임을 받고 있는 자였다.

                       독살의 흔적이 뚜렸하였으나 인조는 서둘러 장례를 마첬고,이형익에 대한 처벌도 하지

                       않았다.또한 인조는 적자 계승자인 소현세자의 원손이 아닌 차자 봉림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세자 책봉 직후인 1645년 인조 23년 10월 소용 조씨는 소의에 올랐고,

                       계비인 장렬 왕후 조씨를 이간질하여 별궁인 경덕궁으로 몰아 내는데 일조하였다.

                       소현세자빈 강씨가 자기를 저주했다는 하던 소의 조씨는 1646년 인조 24년,

                       세자빈 강씨가 인조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받게돼 별당에 유치됐던 강씨는 

                       폐서인으로 사약을 받았고,왕손 3형제는 제주도로 유배되었다.12월에는 소의 조씨의

                       소생인 왕자 이징이 숭선군으로 삼았다.1647년 장녀인 효명옹주에 봉해져,

                       영의정 김자겸의 손자인 낙성위 김세룡과 혼인하였다.
                       1648년 소의 소생인 세 아들 모두
작호를 받았다.

                       이 후 조씨는 인조가 죽기 전 1649년 인조47년 종1품 귀인으로 진봉 되었다.

             숭성군

                동평군

             낙성군

             효명공주-김세룡

         귀인장씨                

         숙의난씨

 

조선 제16대 왕이자 선조의 5번째 아들인 원종 정원군의 아들이며,어머니는 구사맹의 딸인 인헌왕후다.

비는 영돈녕부사(돈녕부는 조선시대 종친부에 속하지 않은 종친과 외척을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 한준겸의 딸인 인열왕후이며,계비는 영돈녕부사 조창원의 딸인 장렬왕후다.

인조는 선조40년 1607년에 능양군에 봉해졌다.

 

광해군 15년인 1623년3월13일,서인인 김유,이귀,이괄,최명길 등이 일으킨 인조 반정에 의해 광해군을

내쫓고 왕위에 올랐으나 반정의 세력인 서인들로 인하여 왕권을 강하게 내세우지 못했다.

반정의 명분을 확립함과 동시에 서인을 중심으로 왕권을 안정시키는 작업을 폈다.

광해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귀양 보내고,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등 수십 명을 처형했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33명은 3등급으로 나누어 관직을 내렸다.

대북계로부터 축출 당했던 남인의 이원익·정경세·이수광서인계의 정엽,오윤겸,이정구,김상헌 등이 다시

 

등용되었다.특히 서인세력은 반정 이후 정국을 주도하고,남인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여 인조의 왕권 행사를 제약했다.

인조 반정의 명분으로 광해군의 부도덕성과 실정이다.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박해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한 반인륜적인 행위와

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일이다.

 

1623년7월, 대북파의 기자헌,유몽인 등은 인조반정 때 김유,이귀 등이 역모 가담을 요청했으나 거절하였고,반정 후에 인조가 등용할 때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이 때문에 이들은 역모죄로 서울에 압송되어 지정한 장소에서만 머물도록 한 형벌인 중도부처(유형으로 지정 장소를 떠나지 못하도록 하던 형벌) 하였다.

 

1623년10월에는 선조의 10번째 아들인 온빈 한씨 소생의 흥안군(아버지의 이복동생)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황현,이유림 등의 역모가 있었다. 흥안군은 성품이 활달,호협하여 엉뚱한 짓을 잘하였다.

1624년 서인 사이의 반목으로 일어난 이괄의 난 때, 그들과 내통하여 역모하였다는 설이 있어 대간이 주청하여 남쪽에다 안치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괄의 난을 피해 왕과 함께 공주로 가던 중 도망하여 이괄의 군중으로 들어갔다.
반란군이 서울에 입성하자,이괄은 그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관군의 승전으로 패하게 되자 소천으로

내려가 숨었다가 현감 안사성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된 뒤 도원수 심기원 등에게 살해되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기자헌의 일족도 몰살 당하고,유몽인과 황현,이유림등이 처형되었다.

이들은 1627년 남인의 이원익,이귀의 상소로 복관 되었다.

 

이괄의 난은 1624년 인조2년 1월에 발생하여 동년 2월15일에 끝난 사건이다.

이괄은 인조 반정 후 도감대장 이수일이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중용된 데 비해,자신은 2등으로

평가 받고 도원수 장만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인조는 인조 반정의 공신인 서인들의 영향으로 친명배금 정책을 내세웠다.

이로 인하여,국세가 날로 강대해지고 있었던 후금의 태종은 선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조선이 형제의 관계를 맺자는 요구에 응하지 않자,1627년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의주를 거쳐 평산까지 함락되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으며,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다.

이 후 1636년12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형제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했으나

거부하자 10만여 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막지 못한 인조는 봉림대군,인평대군과 비빈을 강도로 보낸 뒤,남한 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했다.
전쟁 수행 여부를 놓고 김상헌,정온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와 최명길 등의 주화파 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

되었으나,주화파의 뜻에 따라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에서 군신의 예를 맺었다.

이와 함께 소현세자,봉림대군과 척화론자인 삼학사,즉 홍익한,윤집,오달제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임진왜란 후 2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기강과 경제는 파탄 상태로 빠지는 한편,정국은 친청파와 배청파로 분화하고 대립해 혼란스러워졌다.

특히,주도 세력인 서인의 분화는 가속화하여 1)김자점을 영수로 하는 낙당과 2)원두표를 중심으로 한 원당, 3)김집,김장생,송시열 등의 산당, 4)김육 등의 한당이 형성되었다.

 

인조 말년 영의정 김자점은 외척(1647녀,효명옹주와 김자점의 손자인 김세룡과 혼인)으로서 친청 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장악했고,이에 반해 산당을 중심으로 반청친명사상과 북벌론이 강화되어 광범위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의 옥사,봉림대군의 세자 책봉과 왕위 승계는 이러한 대립 속에서 이루어졌다.

 

즉위 초기에

국방정책과 경제정책  허약한 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친명정책을 추진하면서 생겨난 전란의 위협에 대처

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책을 활발히 추진했다.

1623년 호위청을 신설하여 인조 반정을 주도한 세력의 사병을 정규병력으로 변화시켰다.
1624년에는 어영군을 창설했으며,이해 6월에는 기존의 경기군을 정비·강화하여 총융군으로 재편했다.

이와 함께 방어의 거점으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의 군사력을 정비했다.

 한편 군역 자원과 재정의 확보를 목적으로 직후부터 호패청을 설치하고 호패법을 시행하여 거의 완성했으나 정묘호란 때 소실되어 이를 통한 군사력 증강은 실패로 돌아갔다.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후, 군사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즉 남한산성의 수비강화를 위해
수어청을 신설하고 어영청과 훈련도감의 인원을 증강함으로써 조선 후기 5군영 체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같은 군제의 재편과 함께 경제질서의 재건을 위한 정책도 각 방면에서 실시되었다.

이는 왜란과 호란으로 말미암아 파탄 직전에 놓였던 국가재정·농민경제·농업생산력을 되살리기 위한
일련의 조치였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했던 요역과 공물의 전세화 조치인 대동법을 이원익의 건의로 1623년 실시했다.애초 강원도·전라도·충청도 등 3도에 시행하기로 했으나 1626년에 강원도에만 실시했다.

 

1633년 김육의 주장에 따라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그 유통을 시험했다.

이는 실패로 끝나기는 했으나 효종대 이후 화폐 유통의 기초를 이루었다.

 

1634년에는 삼남에 양전을 실시하여 전결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세원을 확대했다.

세종 때 제정 되었던 연등구분의 전세법을 폐지하고,전세의 법적인 감하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영정법과

군역의 세납화를 실시했다.

 

또한, 청인과의 민간 무역을 공인하여 1637년 북관의 회령 및 경원개시,1647년 압록강의 중강개시가 행해졌다.개시에는 상고의 수,개시 기간, 유왕 일수,매매 총수 등을 미리 결정하도록 했다.

 

또한 1641년에는 군량 조달을 위해 납속 사목을 발표하고,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양반의 첩에게서 태어난 사람과 그 후손들을 서얼) 및 속죄(금품이나 노력으로 지난날의 죄나 과오를 씻음)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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