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7대 효종 이야기           2019.01.22.화요일,맑음

효종; 조선 제 17대 왕이자 인조의 둘째 아들

생졸; 1619(광해군)-1659(효종),41세

재위기간; 1649-1659,10년

이름;이 호

가계도;

 부; 인조

 모; 인렬왕후

   효종;17대

   처; 인선왕후 장씨(1남6녀);

          제18대 현종  

          숙신공주(淑愼公主); 2세 때 등에 업혀 볼모지인 만주의 심양으로 가던 길에 병사했다. 
          숙안공주(淑安公主); 익평군 홍득기에게 하가

          숙명공주(淑明公主); 청평위 심익현에게 하가

          현종; 18대 왕

          숙희공주(淑徽公主); 인평위 정제현에게 하가;

          숙정공주(淑靜公主); 동평위 정재륜에게 하가

          숙경공주(淑敬公主); 흥평위 원몽린에게 하가.

      안빈 이씨(1녀);

      숙원 정씨; 제2후궁으로 소생이 없고 기록도 미상이다. 
      숙의 김씨; 제3후궁으로 소생이 없고 기록도 미상이다. 

 

인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열왕후며 비(妃)는 우의정 장유의 딸 인선왕후 장씨다.

1626년(인조4) 봉림대군에 봉해졌고,

18살이 되던 해인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의 명으로 아우 인평대군을 비롯한 왕족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옮겨 장기 항전을 꾀했으나,

남한산성에 고립되었던 인조가 이듬해 청나라에 항복함에 따라 형 소현세자 및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강경 주전론자들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선양에 8년 동안 머물렀다.

1645년 2월에 먼저 귀국했던 소현세자가 그해 4월 갑자기 죽자 병자호란 패배 후 볼모로 청나라 선양에서 8년을 머물다 5월에 청나라로 부터 돌아왔다.

중신들은 원손의 세자 책봉을 주장했으나 인조는 윤6월에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1649년5월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청에 대한 원한이 깊어 반청 서인세력을 중용하면서 북벌계획을 추진하면서 군비를 강화했다.

또한 경제기반을 강화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대동법을 3남 지방으로 확대했고,

농업생산을 장려하는 정책을 폈으나,

즉위 10년만에 요절하면서 북벌의 뜻을 실행하지는 못했다.

효종은 나르시즘에 빠져 항상 거울을 볼 때 스스로 만족에 차 웃음이 끝이질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일부일처제을  지켰다 한다.

즉위 초,

전 참의 김집,전 지평 송준길,송시열,전 자의 권시,이유태,전 현감 최온 등이

제일 먼저 소명을 받고 나왔는데 그들의 생활의 어려움을 염려하여 양식을 계속 보내게 하였다.

송시열과 이유태의 어미가 늙고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곡식과 약물을 보내주게 하였다

 

 

효종은 1659년 41세를 일기로 창덕궁에서 승하하였고 묘호를 효종이라 했으며,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영릉이다.

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건원릉 서쪽에 장사하였으나 뒤에 지금의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로 옮겼다.

 

청나라에 당한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효종은

즉위 후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친청파인 김자점 등을 몰아내고

대청 강경파인 서인계열의 김상헌,김집,송시열,송준길 등은 중용하였고,

그들은 청을 군사적으로 응징하는 효종의 북벌을 이념적으로 지원했다.

이러한 북벌론은 양란 이후 체제 붕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지배 안정책의 의미를 갖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김자점 등의 친청 세력이 역관 이형장을 통해 북벌계획을 청나라에 알려 청의 간섭을

유도함에 따라 즉위 초기에는 적극적인 군사 계획을 펼 수 없었다.

 

1651년(효종 2) 조선에 대하여 강경책을 펴던 청나라의 섭정왕 도르곤의 죽음은 북벌계획을 추진 시켜나가는 데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에 친청파에 대한 사림 세력의 대대적인 공세가 시작되고,

그해 12월에는 조귀인 옥사 (혹은 김자점의 역모 사건)를 계기로 김자점 등의 친청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다.

이후, 본격적인 군비 강화가 추진되기 시작 했는데 효종은 이완,유혁연 등 무신을 특채하여 군사양성의 실제 임무를 맡겼다.이러한 군인사 정책은 이전에 훈신,종척(宗戚) 등을 임명하던 예와는 다른 파격적인 것으로 효종의 북벌 군사강화책 중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652년 북벌의 선봉 부대인 어영청(御營廳)을 대대적으로 개편·강화했으며, 

금군(禁軍)의 기병으로의 전환,모든 금군의 내삼청 통합,수어청의 재강화 등 제반 군제개혁을 통해

군사강화책을 모색했다.

이와 함께 금군의 군액을 1,000,어영군을 2만,훈련도감군을 1만으로 증액시키고자 했다.

어영군은 많은 군사를 확보하고 3명의 보인제를 통하여 재정적인 난점을 극복함으로써 군사 증강에 성공했으나, 훈련도감은 재정이 뒷받침되지 못하여 실패했다.

한편 1654년 3월 유명무실했던 영장제를 강화,각 지방에 영장을 파견하여 직접 속오군을 지휘하게 함으로써 지방 군사력의 약화를 시정하는 한편,
1656년에는 남방지대 속오군에 보인을 지급하여 훈련에 전념하도록 했다.

1655년에는 능마아청을 설치하여 무장들에게 군사학을 강의하기도 했으며,평야전에 유리한 장병검의 제작,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통해 조총 제작 등 무기의 개량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비강화에도 불구하고 국제 정세가 호전되지 않고 효종도 일찍 죽어 북벌을 실천으로로

옮기지는 못했으며,다만 청의 요청에 따른 2차례의 나선(러시아) 정벌에서 군비 강화의 성과가 나타났다.


효종은 경제 재건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었으나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농업 생산력이 급격히 감소하는 한편,
농민들은 파산하고,국가체제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경제질서,사회질서가 붕괴 위기에 놓여 있었다.

효종은 이러한 위기를 부세 제도의 개혁, 농업 생산력의 증대, 사회 윤리의 강화로 극복하려고 했다.

우선 김육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동법의 실시지역을 확대해 1652년에는 충청도,1653년에는 전라도 산군 지역,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서 대동법을 실시했다.

이와 함께 전세도 1결당 4두로 고정하여 백성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켰다. 한편
1655년에는 신속이 편찬한 '농가집성'을 간행,보급하여 농업 생산에 이용하도록 했다.

한때 군비 확충에 필요한 동과 철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동전의 유통에 반대하기도 했으나

김육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상평통보를 주조·유통시키도록 했다.
1656년에는 소혜왕후가 편찬한 '내훈'과 김정국이 지은 '경민편'을 간행,보급하여 전란으로 흐트러진 사회윤리의 재정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문화면에서는 1653년 역법을 개정,24절기의 시각과 1일간의 시간을 계산,제작한 '시헌력'을 사용하게 했다.

1654년 '인조실록'을 이듬해 편찬,간행했으며,

1657년에는 '선조실록'을 '선조수정실록'으로 개편·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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