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차 수신사 김홍집                 2019.08.15.목요일,맑음

김홍집; 총리대신

생졸; 1842-1896

조부; 충주 목사를 지낸 김사식
부; 개성 부유수를 지낸 김영작

김홍집은 명문 경주 김씨의 집안을 등에 안고 서울 용산방 외가에서 태어났다.

25살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파란 만장한 벼슬길이 시작한다.

명문가의 배경에다 성품이 부드러워 순탄한 길을 걸었지만 집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청빈한 벼슬아치였다.

어찌나 가난했던지,그의 부인은 하나뿐인 은비녀를 저당 잡혀 찬거리를 마련하느라고 머리에 꽂을 날이
거의 없었다고 전한다.

30대에 실무의 총책임자격인 참의 벼슬을 받은 실로 촉망 받는 소장 정치가였다.
1876년,개항은 단행되었지만 개항을 전후로 해 나라가 유난히 시끄러웠다.
개항을 반대하는 유림들이 척사위정 운동을 줄기차게 벌이고 있었고,
박규수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들은 이에 맞서 개항을 지지하고 나섰다.
 
김홍집은 소장으로서 개화파에 가담했고 온갖 지탄을 무릅쓰고 개화 정책을 실시하기에 힘을 기울었다.
개화 정책은 곧 부국 강병이었고,이를 실현시키지 않고는 결코 나라를 유지할 수 없다고 믿었다.
1880년에 예조참의로써 일본 수신사를 맡아 일본으로 건너가 많은 것을 배웠다.
이때 수신사 일행 속에는 개화파의 중심 인물인 강위,지석영 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일본의 회유책에 빠져들지 않으려는 의지로 흰쌀,말린 고기,식기까지도 준비해갔다.
국제 정세와 일본의 개방 정책,특히 일본의 국력이 놀랍게 신장 된 것을 목도했다.


김홍집은 수신사로 돌아오는 길에 황준헌의 '조선책략'과 황관응의 '이언'이라는 책이다.
 '조선책략'은 “조선이 독립을 유지하고 러시아의 남진책략을 막기 위해서는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우호를 
    맺고 미국과 연합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며
 '이언'은 “나라의 부강을 위해서는 서양의 과학 기술을 도입해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한 책이다. 
 이러한 책이 조정에 바쳐지자 김평묵을 중심으로한 유림들은 반대 운동을 펴며 들고 일어났다.

김홍집은 '조선책략' 등을 임금에게 소개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고종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모든 제도를 뜯어고치는 일을 먼저 시작했다.
첫번째,
   정부 조직을 통리기무아문으로 개편했고 김홍집은 예조참판으로 승진되어 외교의 일을 전담했다.
   신식 군대인 별기군의 창설에 노력했고,
   일본의 문물을 배우기 위해 벼슬아치를 파견하는 신사 유람단을 주선하기도 했다.
두번째로 벌인 일은,
   지석영은 종두법을 익히기 위해 부산의 일본인 의사 밑에서 기술을 익혀 과학 기술을 보급한 일이다.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서 종두법의 실시를 목격하기도 했다.
   지석영은 종두법의 보급을 위해 '우두신설'을 펴냈는데, 그는 여기에 서문을 써서 종두법의 보급을 강력히
   주장했다.그뿐만 아니라 그는 종두법의 보급을 위해 정책적으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에 '척사위정 운동'의 중심 세력들은 김홍집을 개화파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여 규탄 운동을 벌였다.
호조참판으로 전임된 그는 사직하고 조정을 떠나 재야의 인물이 된 것이다.

그러나,조정에서는 개화 정책이 계속 되었고,

미국,영국,독일 등과 통상 조약을 맺을때에 고종이 그의 외교에 대한 식견을 높이 평가하여 실무를 맡겼다.

그는 외교의 최고 책임자인 예조판서로 승진했다.

당시 개화파들은 사대당을 몰아내기 위한 쿠데타를 벌였다.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개화 정권을 수립한 것이다.

개화 내각에서 한성 판윤이라는 한직을 그에게 주어진 것은 그가 주동이 아니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고 주동자인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갑신정변 뒤에 연립 내각이 성립되었는데,그에게는 좌의정 겸 외무독판이라는 벼슬이 주어졌다.

이것은 그가 개화파이기는 하나 급진적이 아닌 온건 노선을 걸었음을 뜻한다.

그는 또다시 외교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 뒤 그는 한때 한직으로 밀려나기도 했지만 1887년경에는 또다시 좌의정 겸 내무대신이 되었다.

그는 온건한 방법으로 계속 개화 정책을 추진해나갔다.

1894년에는 동학 농민 전쟁이 일어났다.

고종은 난국을 수습할 책임자로 적절하다 생각하여 영의정의 중책이 주어졌다.

그리고 이어 청일 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승리하자 내각 개편의 중책이 주어졌다.

이것을 제1차 김홍집 내각이라 부른다.
그는 온건 개화파를 중심으로 사대당의 일부 인사까지 포함하여 내각을 구성했다.

그리고 묵은 봉건 제도를 타파하고 새로운 개혁정책을 단행하는 주역이 되었다.

이 개혁을 역사에서 갑오 개혁이라고 부른다.

그는 2차 개혁을 거치면서 계속 총리 대신을 맡았다.

그러나,김홍집 내각은 경복궁 쿠데타 이후 일본의 음모와 지원에 의해 이루어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일본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다. 그의 미지근한 성품과 일본의 힘을 빌려 봉건제도를 개혁해야 한다는 판단 착오로 말미암아 일제에 이용 당하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1895년,급진 개화파인 박영효 등이 군부의 요직을 장악하고 그에게 사직을 강요했다.

어쩔수 없이 사직했고 박정양 내각이 성립하게 되었다.

박정양 내각은 3개월이 못 되어 일본의 힘에 밀려 끌려 다니다가 사직하고 말았다.

 

김홍집은 총리 대신의 자리로 고종으로 부터 부름을 받고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으나,

고종의 밤새 조르시니 간청을 거절할 수 없어 죽음을 각오하고 상감의 간청을 수락하고 나왔다


김홍집이 다시 총리 대신이 되어 내각을 구성했는데,


이완용을 학부 대신으로 임명하는 큰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결국 이완용의 술수에 의해 그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가 총리 대신이 되자 일본은 민비를 살해했다.


이어 양력의 사용과 단발령을 공포하는 등 새로운 개혁정책이 단행되었다.

이에 따라 전국에서는 의병들이 곳곳에서 들고 일어났다.


단발령에 대해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왕이 먼저 상투를 자르고 신민들에게도 모두 상투를 자를 것을 명했다.······

 단발령이 내리자 통곡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고 저마다 분을 참지 못했다.

 서울에 와 있던 시골 사람들은 멋모르고 밖에 나왔다가 상투를 잘리니 그것을 주워서 주머니에 넣고 통곡

 하며 서울을 떠났다." 

               

단발령의 잘잘못은 제쳐 두고라도 온갖 비난이 성격이 원만하고 부드러운 김홍집에게 쏟아지자 이 비난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이완용 일파에 의해 아관파천이 단행되었고 그는 마침내 죽임을 당했다.


1896년2월11일,설날을 앞두고 장안은 온통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친러파인 이범진,이완용의 무리가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 새로운 친러 정권 내각을 탄생시켰다.

개화 정권이라고도 불리고 친일 내각으로도 불리는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었다.

새벽에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자리를 옮긴 고종은 묵은 내각의 대신들을 체포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한편 총리대신 김홍집은 정병하,유길준 등과 함께 허겁지겁 경복궁 앞으로 달려갔다.

벌써 친러 정권의 관리들은 경복궁 앞에 경관들을 배치해 놓았고 보부상 수천 명을 동원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으며 광화문 앞에 있는 일본 수비대에는 일본 군인들이 총검을 날카롭게 세우고 서 있었다.
김홍집 일행은 광화문 해태상 앞에서 순검들에 둘러 싸였다.

이때 일본 군인들이 달려와 김홍집에게 일본 수비대로 피신하라고 권고했다.

김홍집은 '나는 명색이 조선의 총리 대신이다.내가 조선인을 위해 죽는 것은 떳떳한 천명이거니와 다른 나라 사람에 의해 구출된다는 것은 짐승만 같지 못하리라'.                

이에 살기등등한 보부상 패들은 그를 교자에서 끌어내렸다.

그리고 발로 차고 주먹으로 쳐서 말릴 새도 없이 순식간에 김홍집을 죽였다.

한 나라의 총리대신이 떠돌이 보부상들에게 맞아 죽은 것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벼슬아치의 우두머리가 난도들에게 맞아 죽은 것은 이것이 처음일 것이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점 당한 뒤 많은 개화파들은 일본의 작위를 받고 친일파가 되었다.

그의 동료나 후배인 박영효를 비롯하여,김윤식,박정양 등이 그들이다.

그의 사상을 계승한 사위 이시영은 나라가 망한 뒤 만주,상해 등지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에 헌신했다.

1910년 나라가 완전히 망하던 해 김홍집에게 신원이 베풀어지고 시호가 주어졌다.

⊙ 조선책락((朝鮮策略)      

'조선책략' 1880년경 일본 주재 청국 공사관 참찬관인 황준헌(황쭌센)이 지은 것으로,

원래의 제목은 '사의조선책략'이다.

'조선책략'은 '위정척사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조선책략'의 내용은

친중국,결일본,연미국하여 자체의 자강을 도모해야 러시아의 침입을 방어 할 수 있다는 외교 정책이야 말로 조선이 자강하는 기초가 될 것이라고 했다.

중국,일본,미국과의 연합이 이루어지면,곧바로 중국과 일본에 학생을 파견하여 병기 제조,군대 편성,외국어 교육과 천문,화학 등 서구의 학문을 습득하게 하는 한편,부산 등지에 학교를 세워 서구의 기술을 교육하고 무기를 구입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친중국.결일본.연미국의 외교정책은 서구의 침략으로부터 무사할 때에 공평한 조약을 맺게

해주며,통상에도 이익을 가져다주고 국가 부의 축적 및 군비 강화에도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므로,

결국 조선이 자강하는 기초가 될 것이라고 했다.


친중국의 이유는 중국이 물질이나 형세에서 러시아를 능가하고 조선은 중국의 번속국으로 1,000년이라는 세월을 지내왔기 때문에 우호를 증대하여 러시아를 공동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조선이 중국 이외에 수호한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에 서로 결합해야 하며,

미국은 독립 정신이 남아 있는 민주국가로서 약소국을 돕고 서양의 침략적인 악행을 막아주고 있으니 

조선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연합하면 화를 면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중국이나 일본도 선진국 세력에 적대하고서는 국가의 안위가 위태롭기 때문에 개국한 것이므로,

조선의 쇄국정책도 끝까지 고수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대외세력의 방어에 자신이 없으면 개국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880년(고종17년),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청국 공관을 왕래하면서 황준헌과 의견을 교환

   하고,귀국하는 길에 이 책을 얻어와 고종에게 바쳤다.

1881년,이에 대해 조선 정부에서는 찬반 논의가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위정척사론을 기반으로 하는 유생들은 영남 유생 이만손 등이 주동이 되어 '영남만인소'를 올려 김홍집

   일파를 탄핵했다.

   여기에서 이만손 등은 '조선책략'이 패륜망덕한 불온 문서라고 단정하고 그 8대불가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책은 당시 외교 정책에 대해 무지하던 조선 정부의 외교 정책에 큰 영향을 주어 1880년대

   정부가 주도적으로 서구 문물을 수용하는 개화 정책을 활발하게 시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생졸; 1842-1896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조선은 붕괴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이 격동의 시기에 정치적 입장은 달랐지만 역사적으로 주목을 받을 만한 인물을 꼽으라면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명성황후 민비, 초대 총리대신 김홍집(, 1842~1896)을 들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들 중 특히 김홍집은 과거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었지만, 물밀듯이 밀려오는 외세의 압력 속에서 난세를 이끌어가고자 분투했던 인물이라 재평가 되고 있다.

김홍집은 청일전쟁과 갑오경장, 동학 봉기와 아관파천 등 역사의 격변기 속에서 네 번이나 총리대신직을 맡아 국정을 총괄했던 정상급의 개혁 관료였지만,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직후 고종의 밀명에 따라 정식 재판 없이 경무청 순사에 의해 격살된 뒤 군중들로부터 시신이 짓이겨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는 왜 국민의 분노와 지탄의 대상이 되어 대역부도를 저지른 인물로 당대의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

1842년(헌종 8) 참판 김영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김홍집의 어릴 때 이름은 굉집()이었다고 전한다. 자는 경능(), 호는 도원()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부친인 김영작은 숙종의 장인인 김주신의 5대손으로, 이조ㆍ호조ㆍ예조ㆍ병조 참판을 역임하였고 한성부 좌윤과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제학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어머니는 성혼()의 후손으로, 한마디로 조선시대 출세를 보장받을 수 있는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1867년(고종 4) 2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고, 1868년 승정원 사변가주서()에 임명되면서 벼슬길에 나갔다. 그가 처음 출사했을 때 부친인 김영작은 “나라의 녹을 먹는 자는 항상 나랏일에 정성을 기울여 그 책임을 저버려서는 안된다.”고 훈계하였다. 이렇듯 김홍집은 청빈한 선비의 가풍을 이어받아 훗날 재상의 위치까지 여러 차례 올랐음에도 탐관오리의 오명을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김홍집의 30대 시절은 외세의 문호개방 압력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1871년 미국과 충돌하는 신미양요를 겪었고, 급기야 1875년 일본 군함 운양호의 강화도 침입 사건이 빌미가 되어 1876년(고종 13) 일본과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게 되었다. 강화도조약의 속임수를 깨달은 조선 정부는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새 인물로 김홍집을 발탁하였다.

김홍집이 본격적으로 조정에서 활약하기 시작한 것은 1880년(고종 17) 3월 예조참의 시절 제2차 수신사로 임명되어 일본을 방문하면서부터다. 이때 그가 해결할 가장 큰 현안은 인천 개항과 관세 징수 교섭이었다. 그는 58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7월 초 도쿄에 도착, 일본 외무성의 이노우에 외상과 만나 현안 타결을 시도했으나, 일본 정부는 겉으로만 환대할 뿐 재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본국으로 돌아왔다.

임무 수행엔 실패했지만 일본에 머무는 동안 김홍집은 개화 이후 빠르게 발전한 일본의 신문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울러 일본 체류 기간 중에 주일청국공사 하여장()과 그의 참찬관 황준헌()과 자주 만났고, 돌아오는 길에 황준헌으로부터 '사의 조선책략' 한 권을 받아 왔다. 이 책은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해 조선, 일본, 청나라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향후 정치ㆍ외교적 파문을 예고했다.

김홍집은 귀국 후 고종에게 일본에서 가져온 [조선책략]을 바쳤다. 책을 받아든 고종은 여러 중신들에게 건네며 검토하게 했는데, 아마도 궁지에 몰린 국제 관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묘책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비록 수신사 임무는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김홍집의 처지는 [조선책략] 한권으로 상당한 신망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한편으로 위정척사파들로부터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였다. 급진개화파들은 [조선책략]의 내용을 적극 지지하고 나선 반면, 위정척사파들은 이를 계기로 더욱 극렬하게 개화운동에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신망과 함께 비난의 화살이 날아오는 혼란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김홍집이 자리하고 있었던 셈이다.

결국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은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만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조선책략] 내용 중에 ‘천주와 야소가 우리 주자ㆍ육상산과 같다’는 구절은 위정척사파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영남 유생들은 <영남만인소()>를 통해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황준헌의 [조선책략]이 유포되는 것을 보고 저절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쓸개가 흔들리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며 울분을 토했다. 이 일의 파장으로 김홍집은 수차례 사직 의사를 표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천 개항을 연기시킨 공로에도 불구하고 탄핵 상소가 너무 자주 올라오자 김홍집은 한동안 관직에서 물러나 있어야 했다. 1881년 발발한 위정척사운동이 큰 악재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김홍집은 [조선책략]을 가지고 와 정부가 서양 세력을 끌어들이게 한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심한 공격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김홍집은 청나라의 통리아문을 모방한 통리기무아문의 외교통상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다. 시급한 외교 실무를 담당할 적임자가 없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에 설치된 관청으로, 개항 후의 대외 통상에 대응해 국가의 외교와 군사제도 등을 근대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업무를 관장하던 관청이다. 김홍집은 1882년 봄 조선이 미국, 영국, 독일 등과 차례로 수호통상조약을 맺을 때 전권대신들의 부관으로 협상의 실무를 담당했다. 이로써 흥선대원군의 집권 기간 내내 단단히 잠겨 있던 조선 개화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었다. 자의든 타의든 김홍집은 개화의 선봉에 서 있었는데, 외교관으로서 그만한 역량과 경륜을 갖춘 인물이 드물었던 탓이 크다.

1882년 6월에 발발한 임오군란()부터 1884년 12월 갑신정변() 전후까지 폭풍 같은 역사적 사건 속에서 김홍집은 사건 수습의 중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당시 임오군란을 주도한 세력은 명성황후 즉, 민씨 정권의 주요 인사들을 처단하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는데, 정작 개화 세력의 핵심인 명성황후와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를 붙잡는 데 실패했다. 고종은 할 수 없이 흥선대원군을 불러 사태를 수습시켰지만,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흥선대원군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급변하고 있었다.

당장 일본으로 피신했던 하나부사 공사가 강화도로 군함을 이끌고와서 임오군란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하라고 요구했고, 어쩔 수 없이 흥선대원군은 외교 실무 경험이 풍부한 김홍집을 불러 협상을 주도하게 했다. 그 사이 청나라는 군대를 출동시켜 대원군을 잡아가고 이에 민씨 정권은 다시 부활했다. 대원군과 명성황후 간의 정치적 다툼 속에 김홍집은 전권대신 이유원의 부관 자격으로 일본과의 협상에 임해 굴욕적인 제물포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이 혼란한 시기에 김홍집은 중국 톈진으로 가 흥선대원군의 석방을 교섭하는 활약으로 경기관찰사에 임명되었고. 이어 협판통리아문사무가 되었다.

갑신정변의 뒤처리도 김홍집의 몫이었다. 청나라는 임오군란을 제압한 후에도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내정간섭과 함께 개화파들을 탄압했다. 결국 불만을 품은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이 주축이 된 급진개화파들은 1884년 12월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홍집은 개화 외교의 실력자였지만 정변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조정을 대표해 열강과의 대외 교섭에 앞장섰지만, 정권 쟁탈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개화파의 3일천하는 끝났고 김홍집은 다시 한 번 그 뒷수습을 맡았다. 갑신정변은 청과 일본의 간섭만 심해지는 결과를 낳았고, 결국 이를 해결할 적임자는 김홍집밖에 없었다. 김홍집의 주가는 상승하여 우의정에서 좌의정으로 승진했고 외무독판직까지 겸직했다. 일본은 갑신정변의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협상자로 전권대신 이노우에를 내세웠고 이에 맞서 김홍집이 나섰지만, 굴욕적인 한성조약 체결하는 우를 범했다. 한성조약의 결과에 책임을 통감한 김홍집은 좌의정 자리에서 물러났다.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군은 조선의 내정 개혁을 주장했다. 민씨 정권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일본은 당시 동학농민군의 지지를 받고 있던 흥선대원군을 끌어들여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세력을 몰아냈다. 1894년 7월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김홍집이 영의정으로 임명되었는데,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 된 김홍집은 박정양, 김윤식, 유길준 등과 함께 개혁 작업에 착수했고 이것이 이른바 갑오개혁이다. 김홍집은 갑오개혁으로 개편된 관제에 따라 영의정에서 최초의 총리대신이 되었으며, 제1차 김홍집 내각의 수반으로 개혁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의도대로 잘 따라 주지 않자 그를 다시 실각시켰다. 이때 김홍집은 흥선대원군의 편이 되어 옹호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본은 군국기무처를 해산하고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에 망명 중이던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제2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다. 이들 연립내각은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홍법14조'를 발표하는 등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지만, 김홍집은 박영효와의 갈등을 빚어 사임하기도 했다.

흥선대원군의 실각 후 다시 정권을 잡을 기회를 노리던 명성황후를 비롯한 민씨 세력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러시아와 손을 잡은 후 3국 간섭을 이끌어내 일본을 압박했다. 3국 간섭이란 청일전쟁에서 승리해 요동 반도를 점령한 일본에게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철수를 요구한 사건을 말한다. 3국 간섭으로 친러파가 기용된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섰다. 이에 위기를 느낀 일본은 1895년 10월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일본은 친러파를 몰아내고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출범시켰는데, 이때 김홍집은 내각의 수반 자리를 거절했다. 그렇지만 고종이 눈물을 흘리며 부탁하자 어쩔수 없이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2월 고종은 김홍집 몰래 친러 세력과 함께 거처를 옮기는 이른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뒤늦게 사실을 안 김홍집이 고종을 만나기 위해 급히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지만, 현실은 고종이 내린 체포 명령이었다.

고종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길에 김홍집은 광화문에 이르러 성난 군중에게 둘러싸였다. 명성황후의 시해와 친일 내각이 주도한 단발령 등으로 민심의 분노가 극에 달해 있는 상태였다. 겁을 먹은 수행원들이 일본 군대가 있는 곳으로 피신할 것을 권했지만, 김홍집은 이를 사양했다.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다른 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하느니 차라리 조선 백성의 손에 죽는 것이 떳떳하다. 그것이 천명이다.”

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김홍집은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조선 말기 외세 침략의 구실이 된 여러 불평등 조약을 체결할 때 실무를 담당한 김홍집은 사실상 일본의 내정 개혁 요구에 따라 구성된 친일 내각의 수반일뿐이었다. 이런 이유로 김홍집은 매국적 친일파로 가혹한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개화라는 도도한 흐름과 내우외환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권력 다툼만 하던 그때에 누군가는 외교 실무를 담당해야 했고, 책임을 져야 했다.

정치외교가로서 김홍집은 최고의 인물이었지만, 시대를 잘못 만난 탓에 그 끝은 불행했다. 명문가의 후예로 비교적 순탄한 관료의 길을 걸은 그는 1880년부터 1893년까지 14년 동안 개화 외교의 중진으로 다사다난한 국내ㆍ국제 정세 속에서 탁월한 실력으로 국내외의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50세 고개를 넘은 1894년에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터지고 갑오개혁의 총리대신이 된 이후부터 1896년 2월 아관파천의 혼란 통에 비참한 죽음을 당할 때까지 오로지 일제 세력에 진퇴양난만 반복하다 역적의 누명을 쓰고, 결국 정적 친러파의 손에 쓰러지는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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