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문명         2019.07.21.비온 뒤 흐림

조문명; 소론

본관; 풍양(豊壤)

호; 학암(鶴巖)

증조부; 조형(趙珩)

조부; 조상정(趙相鼎)

부; 도사 조인수(趙仁壽)

모; 김만균(金萬均)의 딸


1705년(숙종 31) 생원시에 합격하고

171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었다.

1721년(경종 1) 수찬을 거쳐 부교리가 되어 붕당의 폐해를 통열히 논했고, 문학(文學)으로 옮겨 마침 왕세제로 책봉된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의 보호에 힘쓰면서 김일경(金一鏡) 중심의 소론 과격파(峻少)에 대립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지평으로 발탁되어 겸동학교수·세자시강원겸보덕을 지냈다.

다음 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에 승진되어 파붕당의 설을 제창하다가 민진원의 배척을 받았다.

이어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재진출하면서 이조참의에 특별히 임명되었다.

그 해 딸이 왕세자(영조의 제1자, 사후에 孝章世子라 불림)의 빈(嬪)이 되자 호조참판과 도승지에 올라 수어사·어영대장을 겸했으며,

이듬해이인좌의 난 진압에 공이 있다 하여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2등에 녹훈, 풍릉군에 책봉되고 병조판서가 되었다.

이에 이조참판 송인명과 함께 탕평론을 재천명했고,

이후 대제학 이조판서를 거쳐 1730년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이 후 『경종실록』 총재관으로서 이를 완성,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본래 소론 가문 출신이었지만 당쟁의 폐를 걱정하여 붕당의 타파와 공평무사한 탕평의 실현을 정치 목표로 하였다. 또, 억강부약과 시비절충·쌍거호대를 그 실천 방안으로 제시하였다.

온건론자 중심의 노·소 연립정권을 구축하는 데 주력, 노·소론의 준론자들로부터 세상사람을 속이고 우롱한다는 배척까지 받았지만, 영조 초의 소론계의 반란[ '이인좌 난'과 계속되는 역모 적발로 불안했던 왕권의 안정과 확립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또, 노비종부법의 폐지, 조운수로의 편의를 위한 안흥목의 개척, 주전의 필요성 역설 등과 같이 민생 문제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소론이면서도 외가와 처가가 노론 집안이어서 노론계 명사와 널리 교유하였다.

특히 송인명, 김재로 등과 매우 친밀하였다.

저서로 '학암집' 4책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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