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병옥                  2019.12.18.수요일,맑음

조병옥(생졸; 1894년-1960년 )은 독립 운동가며 미군정하에서 경무부장,내무장관,국회의원,민주당 대통령 후보이며 정치가다.

관련 사건은 광주 학생운동,신간회 사건,수양 동우회 사건,한국전쟁중엔 부산 정치파동,사사오입 사건 등이 잇다.



아버지는 조인원이며.공주 소학교,연희 전문학교를 거쳐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했다.

신간회,수양동 우회 사건 등과 관련해 옥고를 치르고 해방후 미군정청 경무부장을 역임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발병하여 도미 치료 중 사망하였다.


1894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하여 공주 소학교를 졸업 후 케블 목사의 추천으로 공주 영명중학교에

편입하여 1909년,다시 평양 숭실중학교에 편입하여 재학시 미국 유학 후 귀국한 이승만과

김규식·신흥우·백상규 등의 영향으로 유학을 결심하고 졸업 후 연희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에 졸업하자마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18년,

펜실바니아주 와이오밍 고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했다.

1919년,

유학 중인  3·1운동의 여파로 북미 지역의 독립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조병옥도 이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4월13일부터 4월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 연합회의에 참석하였고,

1919년4월16일에는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 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1925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연희 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기독교여자

청년회(YWCA) 이사와 비밀 독립 단체인 그리스도교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신간회의 창립에 참가하여 재정부장·총무부장 등을 지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탄압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광주학생 운동의 배후조종 혐의로 한용운 등과 함께 3년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1932년,

조만식 등 서북 출신들이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사 경영을 담당하게 되자 전무로 참여하였고, 보인 광업회사라는 광산 회사를 운영했다.


조병옥은 미국 체류 중 안창호와 교류하게 되어 영향을 받아 충청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서북파가 주도하던 흥사단·수양 동우회의 활동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귀국 후 안창호의 영항 아래 있던 이광수를 찾아가 함께 흥사단과 수양 동우회의 국내 지부 결성을 추진했다.

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2년을 복역하였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가하였고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취임하여 1948년까지 재직하면서

수도 경찰청장이던 장택상과 함께 경찰력을 장악했다.

미군정기 가장 중요했던 물리력인 경찰력을 장악함으로써 좌익 탄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조병옥은 안창호를 지지하였으나 그가 사망하고 해방이 된 후에는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경무부장으로서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48년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2월에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연합 총회에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1949년, 제4차 국제연합 총회에서 단장으로 참가하였다.

이승만과 한민당이 결별하게 되면서 조병옥도 이승만과 멀어지게 되었다.

1949년2월10일에는 한국 민주당과 대한 국민당의 신익희,지청천 계열이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 할 때 참여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이승만 정권하의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대구 방어에 공을 세웠다..

1951년5월,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1954년5월,

대구에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범야 신당 창당 준비조직인 호헌동지회

창설에 참여하여 곽상훈·김도연·김준연·장면·박순천 등과 함께 조봉암의 신당 참여에 반대

하였다.결국 조봉암이 배제된 채

1955년,

조병옥이 참여하여 민주당이 결성되었다.

1956년,

신익희의 급서로 대표 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민주당 내 신파와 구파 간 분쟁이 가시화되면서 조병옥은 구파의 리더로 활약하였다.

1959년11월26일,

민주당 정·부통령 선거 지명 대회 표결 결과 조병옥은 세 표 차이로 승리하여 대통령 후보가 되어 대통령 후보 등록까지 마쳤지만 갑자기 발병하자 도미하여 육군 병원에 입원한 지 23일 만에 선거를 불과 한 달여 남겨두고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는 1960년 2월 25일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UN 소총에서 남한만의 총선안 가결

1947년2월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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