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의의 난과 함흥차사          작성일자; 2007.07.20.금요일,맑음

 

조사의의 난은 1402년 안변부사 조사의가 동북면(함경도)에서 일으킨 반란을 말한다.

조사의는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세자 방석이 희생 되자 벼르고 있다가

3대왕인 태종 1402년.태상왕 태조 이성계의 위세를 등에 업고 봉기한 사건이다.

 

명분은 죽어서도 학대 받은 계비 신덕왕후 강씨(방번,방석의 어머니)의 원수를 갚는다는 것이었다.

이때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 강현도 참여하였다.

조사의는 신덕 왕후 강씨의 친척으로1393년 형조에서 의랑(정사품 벼슬)을 지냈고,

1397년 첨절제사(각 진영에 속했던 무관직) 등을 지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 나면서 직위 해제 되었고,

서인으로 전락하여 전라도 수군에 배치되어 노역에 종사하였다.

 

이성계의 영향으로 이후 풀려나 1402년 안변 부사로 복권 되었다.

이성계는 조사의가 신덕왕후의 친척이라고 아꼈는데,

태종 이방원은 이점을 알고 그를 풀어주고 안변부사로 보냈으나,

부임지인 안변(함경남도 안변군에 있는 면)에서 호족세력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도모하였고

이성계는 조사의를 지지하였다.

 

조정에서는 태조 이성계를 설득하기 위해 박순,송류 등을 파견하여 반군을 회유 하였으나,

도리어 죽음을 당하였다.

초기에는 반군이 우세하여 관군의 선봉 이천우가 격파되었고,

조사의의 반란군은 평안도 덕천·안주로 이동시켰으며 군사는 1만 명으로 늘어났다.

1402년11월17일.청천강에서 진압군과 싸움이 벌어 졌으나 조사의가 이끄는 반란군이 대패하고 말았다.

사기가 저하된 부하들이 뿔뿔이 이산하자 안변에 돌아 왔으나 아들 조홍과 함께 관군에 잡혀

12월07일. 도성으로 압송 되었다가 12월18일 참형되었다.

함흥차사의 고사(古事)가 바로 이 사건에서 연유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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