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공산당                           2019.11.15.일요일,맑음

1925년4월25일,

국내 공산주의 서클이었던 화요회 등 구성원 19명은 서울에서 조선 공산당을 창당하고,

국제 공산당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과 국제공산주의청년동맹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았다. 당의 당면과제를 조선의 완전독립,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 실시 등으로 정하고,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을 기치로 일제하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고, 신간회를 통해 전국적 규모의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4차례에 걸친 검거선풍으로 조직이 와해되는 와중에서 제3인터내셔널은 조선 공산당의 해체를 지시하고, 당 재건의 지침을 내림으로써 제1차 조선 공산당은 1928년 12월 7일자로 막을 내렸다.
조선공산당은

당초 조직구성에서 인텔리겐치아와 소부르주아지가 중심이었던 한계로 인해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한 대중정당으로서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며, 파벌간의 대립과 갈등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한인들의 초기 공산주의 운동은 해외에서 시작되었다. 이동휘 등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18년경 조직한 한인사회당, 한명길 등이 역시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에서 1921년 4월 결성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그리고 이와 별도로 이동휘 등이 1921년 5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결성한 고려공산당(상해파공산당)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한국에서의 공산당 결성의 기원은 국내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당에서부터 유래한다고 본다.

1925년 4월 25일 국내 공산주의 서클이었던 화요회와 일본유학생계의 북풍회, 그리고 민중사계 및 신생활사계 구성원 19명은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고, 다음날에는 고려공산청년회도 결성했으며, 국제공산당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과 국제공산주의청년동맹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았다.

당 조직은 책임비서에 김재봉, 조직부장 조동호, 선전부장 김참, 인사부장 김약수, 노농부장 정해운, 조사부장 주종건 등을 선임하고, 당의 당면과제를 조선의 완전독립,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 실시,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타도 일본제국주의·봉건세력 등으로 정하고,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을 기치로 일제하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여 1926년 6·10만세운동 발생에 배후에서 영향을 미치고 신간회(新幹會)를 통해 전국적 규모의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산발적인 활동을 벌이다가, 1925년 11월 신의주에서의 제1차 검거사건을 시발로 1926년 6월, 1928년 2월과 7월 등 4차례에 걸친 검거선풍으로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조선공산당은 당초 조직구성에서 인텔리겐치아와 소(小)부르주아지가 중심이었던 한계로 인해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한 대중정당으로서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며, 파벌간의 대립과 갈등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제3인터내셔널은 1928년 '12월 테제'를 통해 1926년 3월에 승인했던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지시하고, 당 재건의 지침을 내림으로써 제1차 조선공산당은 1928년 12월 7일자로 그 막을 내렸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이 테제에 따라 여러 차례 당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고 해방을 맞이했다.

1945년 8월 해방과 더불어 그동안 잠적했던 공산주의자들은 다시 표면에 등장, 8월 15일 종로에 있는 장안 빌딩에서 이영·정백 등의 서울청년회계와 ML(마르크스·레닌)계, 그리고 화요회계 일부가 모여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논의, 조직선언을 발표하고 16일 공산당 결성을 마쳤는데, 이것이 세칭 '장안파공산당'이다.

한편 8월 20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재건파가 장안파와는 별도로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자신들의 정치노선을 담은 '8월 테제'를 발표했으며, 동시에 1928년 해체된 바 있던 조선공산당의 정통 계승을 자임했다. 재건파공산당은 9월 8일 장안파를 흡수하고, 12일 정식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으며, 이후 1946년 11월 23일 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과 합당해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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