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어학회 사건         2019.11.03.일요일,맑음

일제 강점기란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식민통치를 당한 35년간인 1910년8월29일부터

1945년8월15일 해방되기까지를 일제 강점기 시대라 한다.

그 기간에 조선어를 연구한 학자들을  '함흥 학생 사건'을 계기로 탄압한 사건이다.

1942년10월부터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으로

함흥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한국말로 대화하다가 조선인 경찰관인 야스다

(안정묵)에게 발각되어 취조를 받게 된 사건이 벌어졌다.


조선 어학회는 1929년 10월,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조직했다.

조선어 사전 편찬회의 발기인 108명 모두가 민족주의 사상을 지녔다고 판단한 일제는 이들을 강제 해산

시키기 위해 '함흥 학생사건'을 꾸며 조선어 학회의 사전 편찬을 맡고 있는 정태진을 관련자로 검거하고

조선 어학회가 독립 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민족주의 단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이에 따라 33명이 내란죄로 기소를 당했다.

이들 중 16명은 기소되었고, 나머지 12명은 기소 유예되어 석방되었다.

이윤재와 한징이 옥중에서 사망하고,장지영·정열모 두 사람이 석방되어 공판에 넘어간 사람은 12명이었다. 이들은 1945년 해방을 계기로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조선 어학회는 강제로 해산되었다가 해방 후 조직을 정비한 뒤

1949년9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창립 초기부터 우리말인 한글을 통해 민족 사상을 고취시키려 하던 조선 어학회 회원들은 1929년 10월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조직해 '사전'의 편찬을 시도했다.

조선어 사전 편찬회의 발기인 108명 모두가 민족주의 사상을 지녔다고 판단한 일제는 이들을 강제해산하기 위한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이에 회원들은 사전 출판을 서둘러 1942년4월, 그 일부를 대동 출판사에 넘겨 인쇄하기 시작했다.

이때 일제는 조선 어학회 사건을 조작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함흥 학생 사건'을 꾸몄다.

함흥 영생 여자 고등 보통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태극기를 그리며 '우리나라 국기'라고 속삭이다가 경찰에게 발각되어 취조받게 되었는데,

취조 결과 조선 어학회의 사전 편찬을 맡고 있는 정태진이 관련되었음을 알았다.

1942년9월5일, 정태진이 검거되어 조선 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거짓자백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42년10월1일,이중화·장지영·최현배·이극로·한징·이윤재·이희승·정인승·김윤경·권승욱·이석린 등 핵심 인물 11명이 검거되어 함경남도 홍원으로 압송된 뒤,

1943년4월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어 고문을 당했다.

사건을 취조한 홍원경찰서에서는 33명 모두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기소했다.

이들 중 16명은 기소,12명은 기소 유예되었으며 기소자는 예심에 회부되고 나머지는 석방되었다.

함흥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이윤재가 1943년12월 8일에,1944년2월22일에는 한징이 옥중에서 사망하고, 장지영·정열모 두 사람이 공소 소멸로 석방되어 공판에 넘어간 사람은 12명이었다.

1945년1월16일, 함흥 지방 재판소에서는 이극로 징역 6년,최현배 징역4년,이희승 징역2년6개월, 정인승·

정태진 징역 2년, 김법린·이중화·이우식·김양수·김도연·이인 각 징역 년 집행유예 3년,장현식 무죄 등의

판결을 내렸다.

실형을 받은 이들은 1945년 해방을 계기로 풀려났으며,

이 사건으로 조선 어학회는 강제로 해산 당했다가 해방 후 조직을 정비한 뒤

1949년 9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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