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 제13대 명종 이야기     2015.4.28.화요일.맑음

명종; 이환(峘),

생졸;1534(중종 29)~1567(명종 22)

재위기간 ;1545∼1567

능;강릉(康陵)으로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가계도;

부;중종

모; 문정왕후 윤씨

왕후;인순왕후(심강의 딸)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에서 인종을 낳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에서 명종을 낳았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했으나 재위 8개월만에 죽자, 당시에 12세였던 명종이 즉위하였다.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 청정을 하였고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이 득세하여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문정왕후가 명종을 낳자,장경왕후의 동생인 윤임은 김안로 등과 함께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겼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실각하고 윤원형 등이 등용되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암투가 더욱 치열해졌다. 이 때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 윤원형 일파를 소윤(小尹)이라고 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한 때 윤임이 득세하여 이언적 등 사림의 명사를 많이 등용해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곧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태는 크게 변하였다.

윤원형은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중종의 여덟째아들)에게 왕위를 옮기려 한다고 무고하는 한편, 윤임이 인종이 죽을 당시에 계성군(성종의 셋째아들)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이를 구실로 왕과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권, 윤임·유관·유인숙 등을 사사하게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당류인 사림을 유배시켰다.

이어서 1547년에는 또다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계기로 그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로써 외척 전횡의 시대가 전개되자, 명종은 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이량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작당하여 정치가 더욱 문란해지고 파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이러한 때를 틈타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이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횡행하였다. 밖으로는 삼포왜란 이래 세견선의 감소로 곤란을 받아온 왜인들이 1555년 배 6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해왔다.

이들은 결국 이준경·김경석·남치훈 등에 의해 영암에서 격퇴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비변사의 설치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1510년(중종 5) 삼포왜란 때 일단 설치되어 임시 기구로서 존속되어오다가

1555년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 기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명종 때는 문정왕후가 불교를 독실히 믿었기 때문에 불교의 교세가 일어났다. 문정왕후는 보우대사(普雨)를 신임하여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삼았다. 그리고 1550년에 선·교(禪敎) 양종을 부활시키고 이듬 해에는 승과(僧科)를 설치하였다.

보우는 뒤에 도대선사(都大禪師)가 되었지만,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잇따른 배불 상소(排佛上疏)와 유림들의 기세에 밀려 승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변협에게 피살되었다.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은 뒤, 관직을 삭탈당하고 강음(江陰)에 안치되어 죽었다.

이 무렵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1563년에 13세로 죽고, 왕위는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 : 중종의 아홉째아들)의 셋째 아들이 계승했으니, 이가 곧 선조이다.


○을사사화

1545년(명종 즉위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과 소윤의 반목으로 일어나, 대윤이 소윤으로부터 받은 정치적인 탄압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후퇴한 사이에 신묘삼간(辛卯三奸 : 중종 20년 신묘년에 사형된 沈貞·李沆·金克愊을 말함.)과 김안로(金安老)와의 싸움과 같은 권신간의 치열한 정권다툼이 일어났다.

김안로는 심정 등의 탄핵으로 귀양중 정신(廷臣)과 내통해, 심정 등이 유배중인 경빈 박씨(敬嬪朴氏)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몄다고 탄핵하였다. 이로써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한 김안로 일파는 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과 결탁해 권세를 누리면서,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내겠다고 위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나 문정왕후(文定王后 : 중종의 제2계비 윤씨)를 폐출하려고 음모를 꾸미다가 윤안임(尹安任 : 문정왕후의 숙부)의 밀고로 귀양간 뒤 사사되었다. 이 때 허항·채무택도 처형되었는데, 이들을 정유삼흉(丁酉三凶)이라 한다.

김안로가 실각된 뒤 정권 쟁탈전은 권신에서 외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중종비 신씨는 즉위 직후 폐위되어 후사가 없었고,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尹氏 : 윤여필의 딸)는 세자 호(岵 : 뒤의 인종)를 낳은 뒤 죽었다. 그 뒤 왕비 책봉 문제로 조신간의 일대 논란이 벌어졌으나, 1517년(중종 12)에 윤지임(尹之任)의 딸이 제2계비 문정왕후로 책립되어 경원대군(慶源大君 : 뒤의 명종)을 출산하였다.

이에 문정왕후의 형제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이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꾀하면서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 : 장경왕후의 아우)과 본격적인 대립·알력이 시작되었다.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형제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는데, 이로써 조신·사림은 서로 갈리게 되고 외척을 중심으로 궁·정 내부의 갈등이 촉발되면서 정계가 양분되었다. 그러던 중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외척인 윤임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파가 득세하였다.

인종은 유관·이언적 등 사림의 명사를 신임하고 이조판서 유인숙은 자파의 사림을 많이 등용하였다. 이 결과 사림은 기묘사화 이후 다시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사림들은 소윤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인종은 원래 중종의 반목·갈등 속에서 성장한 유약한 군주로 문정왕후의 뜻을 얻지 못함을 항상 상심하던 중 병을 얻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인종의 뒤를 이은 명종은 12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정치를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권은 소윤파인 윤원형에게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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