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 제19대 숙종 이야기      2019.03.17.일요일,맑음

제19대 숙종;이 순(李 焞)

생졸; 1664년(현종2년)~1720년(숙종46년).60세

재위기간; 1674년~1720,46년간

능; 경기도 고양군 서오릉에 위치한 명릉

가계도;

 부; 제18대 현종

 모; 명성왕후 김씨 

 처; 인경왕후 김씨

        딸(조졸)

        딸(조졸)

        딸(조졸)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

      희빈 장씨

         경종;제20대

         성수(여)

      숙빈 최씨

         영수(여)

         연잉군;제21대 영조

         아들

       명빈 박씨

       영빈 김씨

       귀빈 김씨

       소의 유씨

소개; 

  숙종은 1661년 현종2년,8월15일에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인 효종은 며느리인 명성왕후의 침실에서 용이 이불을 덮고 있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에 효종은 원손을 얻을 좋은 징조로 여겼는데 효종이 죽고 난 뒤 2년 후에 숙종이 태어났다.

  아들을 몹씨 아낀 현종은 신하 중에서 송시열,송준길,김좌명,김수항 등을 뽑아 원자(훗날 숙종)의 교육을

  맡겼다.


  숙종은 1667년 현종8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674년(현종15년).8월18일에 현종이 죽자 14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숙종은 비교적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나이 많은 대신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큰소리를 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는 즉시 유배를 보내거나 사사하는 등 왕으로서 과단성 있는 면모를 보였다.

  부왕인 현종이 재위하는 동안 신하들에게 왕으로서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하고 휘둘리던 것과는 달랐다.

  특히 숙종은 격화된 서.남 당쟁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줄 아는 영민한 왕이었다.

  그는 상황에 따라 남인 혹은 서인에게 치명적인 정치적 패배를 안겨 주는

  이른바  환국 정치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조선의 정치에서 빼놓을수 없는 것이 당파 싸움이며 가장 심한때가 숙종 때였다.

  숙종의 즉위시 집권한 것은 남인이었으며 현종이 죽기 전에 갑인예송을 통해 남인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남인들은 외척인 김석주,김우명 등과 결탁해 서인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명분상 예론을 이용했다.

  남인은 현종 때 벌어진 예송을 통해 송시열 등이 효종과 현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려 했던 것에 대해서

  숙종이 악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남인들에 의해 송시열을 비롯해 갑인예송에 참여했던 여러 서인이 삭탈 관작되고

  숙종 즉위 첫 해에 허적,허목,윤휴,권대운 등의 남인이 대거 기용되어 요직을 차지했다.

 

   숙종은 1671년(현종12년)에 김만기의 딸 인경왕후 김씨와 혼인하여 두 딸을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인경왕후는 1680년(숙종6년)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죽었으며,

   숙종은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 민씨를 계비로 맞이하였으나 후사를 잇지 못했고,

   숙종의 총애를 받은 희빈 장희빈이 낳은 아들(훗날의 경종)이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격화된 서인.남인 당쟁으로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는 폐비되기에 이른다.

 

   1701년(숙종27년)에 인현왕후가 병으로 죽자,

   숙종은 두 번째 계비로 김주신의 딸 인원왕후 김씨를 맞이 했으나 자식을 두지 못했다.

   숙종은 3명의 왕비들에게서는 자식을 낳지 못했으나,

   희빈 장씨 소생의 경종(훗날의 20대 왕)과 딸 성수를 ,

   숙원(종4품;군수 격) 최씨로부터 21대 왕인 연잉군(영조;이금)을,

   명빈 박씨로부터 연령군(이훤;숙종보다 먼저 죽다)을 얻었다.

 

   숙종의 환국정치는 그의 애증 관계와도 깊은 관련이 있으며,

   희빈 장씨 사사 이후에 펼쳐진 노론,소론 당쟁은 숙종이 그의 아들들에게 가졌던 태도도 무관하지 않다.

 

   숙종의 즉위와 함께 남인이 집권하기는 했지만 주도권은 허적,권대운,탁남 등이 잡았다.

   탁남은 외척 김석주(김육의 손자이자 현종의 장인인 김우명의 조카)와 결탁해 재상 자리를 차지했다.

   김석주는 갑인예송에서 현종을 도와 서인 정권의 몰락을 주도한 인물이다.

   김석주는 서인이지만 송시열과 척을 지고 있어 김석주가 남인을 지지한 이유도 그 때문이다.

   허적,권대운 등은 남인이었으나 서인인 김육,김석주의 도움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김석주에게도 

   어느 정도 정치적 빚을 지고 있었다.


   숙종 초기의 남인 정권은 탁남과 척신 김석주의 연합 정권 형태를 띠었다.

   허목,윤휴 등의 청남은 사실상 김석주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탁남에 불만을 가지고 서로 반목했다.

   갑인예송 때 서인의 축출을 사실상 주도했던 김석주는 숙종의 깊은 신뢰 속에 정국을 좌지우지했다.

   정적이었던 송시열을 몰아낸 김석주에게 새로이 견제해야 할 대상이 생겼다.

   인조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세 아들 이른바 '3복'이라 불리던 현종의 사촌들로

   복창군,복선군,복평군이었다.

   외아들이라 가까운 친척이 많지 않았던 숙종에게는 의지가 되는 종친이었다.

 

   외척인 김석주에게 이들은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그 당시 숙종에게 후사가 없어 숙종의 유고시 서열상 그들이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숙종의 수라상을 일일이 점검했다고 하는데 그만큼 외척인 청풍 김씨의 불안감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김우명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복평군 연의 형제들은 효종께서는 자기의 친아들같이 생각하셨고,

    선왕 현종에게 친형제같이 사랑하시는 은혜를 입어서 궁궐 안에 드나들더니,

    추문이 궁궐 밖에까지 들리게 되어 선왕께서 놀라고 근심하셨으며,

    대비께서도 난처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전하께서도 선왕에게서 말씀을 들으셨을 것이기 때문에 소신이 일찍이 선처하시도록 어전에서 주청한 것

    입니다.가정에서 일어난 일이 조정에 미치는 관계는 지극히 중대합니다.

    김일제가 부자의 은의를 끊은 것을 후세 사람들이 잘한 일이라고 칭찬했고,

    비구가 계율을 범하면 승려들도 부끄러워하는 것인데,

    이제 모든 전내에 임신을 한 궁녀들이 있게까지 되었는데도 금지하지 못하오니……'.

 

   복평군 형제가 정말로 궁녀와 간통해 임신까지 시켰다면 이는 엄히 다스릴 사안이었다.

   이에 숙종은 복평군 형제는 물론 함께 추문을 일으킨 궁녀들을 불러 국문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숙종은 이들을 벌줄 생각은 없었다.

   다만 상소를 올린 외조부 김우명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형식적인 국문을 명한 것이었다.

   결국 복평군 형제는 무죄로 풀려났다.

   비록 무죄로 풀려나기는 했지만 이 일이 있은 후부터 3복은 행여 화가 미칠까 스스로 조심했다.

   이 때문에 3복을 통해 권력에 줄을 대 보려고 했던 3복의 외가 동복 오씨를 비롯한 여러 남인들도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숙종의 즉위와 함께 집권한 남인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자 허적을 비롯한 남인 세력을 대하는 숙종의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1680년(숙종6년), 마침내 남인 세력이 제거되고 서인이 재집권을 하게 되는 경신환국이 일어났다.

    경신환국은 이른바 '유악(油幄, 기름 먹인 장막)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1680년(숙종6년) 3월, 탁남의 영수 허적은 조부 허잠이 시호를 받은 것을 축하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당시 허적의 권세를 증명이라도 하듯 연회장은 문전성시였다.

   이 자리에는 서인인 김석주와 김만기도 초대되었다.

   그러나 김석주는 불참하고 김만기도 뒤늦게 연회장에 나타났다.

   연회 도중 비가 내리자 허적의 집에서 큰 연회가 열리고 있는 것을 알고 있던 숙종은

   특별히 궐내에서 쓰는 유악을 가져다 줄 것을 명했다.

   그러나 숙종이 내주려던 유악은 이미 허적이 가져간 후였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숙종은 권력을 믿고 오만방자하게 행동한 허적과 남인 일당의 행태에 기분이 크게

   상했다.

   그때 임금은 궐내에 저장했던 기름 먹인 장막을 허적이 벌써 다 가져 갔음을 듣고 노해 이르기를 
 "궐내에서 쓰는 장막을 마음대로 가져가는 것은 한명회도 못하던 짓이다." 하고,

   궁중 하인에게 거지 모양으로 해진 옷을 입고 가서 정탐하게 하니,

   잔치에 참석한 서인은 오두인,이단서 등 몇 사람뿐이었다.

   임금이 허적의 당파가 많아 기세가 당당하더라는 말을 듣고는 그들을 제거할 결심을 했다.

   곧 궐문을 닫지 말라고 명하고,유혁연,신여철,김만기를 패초했다.

 

   패초란 조선시대 왕이 필요한 신하의 입시를 명할 때 패를 사용하던 제도다.

   조선시대 임금과 신하가 대면할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한달에 두번 있는 조참(朝參 : 모든 문무 관원들이 정복을 입고 임금에게 문안과 정사를 아뢰는 일) 외에 

   수시로 왕을 배알할 수 있는 신하는 2품 이상의 당상관(정3품 상계 이상)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 밖의 관원들은 왕이 명을 내려 부르기 전에는 왕에게 알현을 청할 수 없는 것이 규정으로 되어 이었다.


   주간에는 승정원에 명령을 내려 필요한 관원의 입시를 명하지만

   긴급사태가 발생하였거나 야간에 긴급히 대면할 필요가 있을 때 패초하였다.

   

    먼저 승지에게 부를 신하의 직위와 성명을 말하여 ‘명(命)’자를 쓴 목패에 쓰게 한 뒤 승정원의 액례를

    시켜서 부르게 한다.

    패초의 유명한 사실은 수양대군이 반정을 계획한 뒤 당시 재상인 황보 인,김종서 등을 영양위궁으로

    불러 죽일 때 사용한 사실이다.

    패초를 받은 신하는 어떠한 어려움과 장애가 있어도 지정된 시간까지 입시하지 않으면 중벌에 처해지는

    엄격한 법률이었다.

 

    유혁연이 잔치 자리에서 패초를 받고 일어나니 김만기도 따라 일어났다.

    허적이 김만기의 손을 잡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일입니까. 공은 알 것이오." 했다.

    김만기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면서 옷을 떨치고 나오니,

    좌중이 모두 놀라 안색이 변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숙종은 곧바로 훈련대장인 남인 유혁연을 경질하고 그 자리에 서인 김만기를 앉혔다.

    이를 시작으로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남인들이 대거 파직되고 그 자리는 서인들로 채워졌다.

    이로써 서인은 갑인 예송 이후 남인에게 빼앗겼던 정국의 주도권을 되찾게 되었다.


    유악 사건이 있던 당일 허적은 "지난 10월부터 주상이 자못 싫어하는 기색이 있어서 청대를 해 봐야

    소용이 없다."라고 푸념했는데, 이미 그때부터 경신환국은 예견된 일이었다.


    탁남과 결탁해 함께 권세를 누리던 외척 김석주는 결국 남인 정권을 배신했다.

    그는 전격적으로 단행된 경신환국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허견 옥사'를 일으켜 남인 세력은 물론이고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종친 세력을

    제거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허적의 서자인 허견은 3복 중에 한 명인 복선군과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다.

    복선군 역시 처형되었으며,허적도 삭직 되었다가 사사되었다.

    허견의 옥사는 1680년 숙종6년 4월에 김석주의 사주를 받은 정원로 등의 고변으로 시작되어

    5월에 마무리되었는데,

    이때 송시열의 숙적이었던 윤휴를 비롯해 100여 명에 이르는 남인들이 처벌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재집권한 서인들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해 서로 반목했고,

   숙종은 그런 서인들에게 또다시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 사이 숙종의 첫 번째 부인인 인경왕후가 후사를 잇지 못한 채 죽고,계비로 인현왕후가 들어왔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가운데 궁녀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했다.

   궁녀 장씨는 3복의 심복이던 역관 장현의 조카로 남인 계열이었다.

   한때 장씨는 대비인 18대 현종 부인인 명성왕후에 의해 궐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지만 명성왕후가 죽은 후

   인현왕후의 배려로 다시 궐로 들어갔다.

   돌아온 장씨는 1686년 숙종12년에 숙원(종4품;군수)에 봉해지고

   1688년 숙종14년에 아들을 낳은 후 희빈에 봉해졌다.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이 태어나자 장씨에 대한 숙종의 총애는 더욱 커졌다.

 

   희빈 장씨도 덩달아 기고만장했다.

   그러자 서인들은 그런 장씨와 그 주변 인물들을 견제하며, 그들의 행실을 문제 삼아 비난하기 시작했다. 

   숙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뿐이었다.

  

   1689년(숙종15년). 숙종과 서인들의 갈등은 원자의 명호를 정하는 문제로 표면화되었다.

   숙종은 장씨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삼아 국본을 세우겠다고 했고,

   여러 신하들은 아직 인현왕후의 몸에서 적자가 태어날 기회가 있으니 원자를 정하는 일을 서두르지 말

   것을 간했다.

   그러나 숙종은 이들의 말을 듣지 않고 5일 후 장씨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정해 버렸다.

   이는 서인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숙종은 서인들의 견제가 계속되는 한 뜻대로 왕권을 행사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을 내칠

   구실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송시열이 원자의 명호를 정하는 것이 너무 성급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새로운 환국의 빌미가 되었다.

   결국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들이 쫓겨나고 경신환국 때 내쳐졌던 남인들이 대거 복귀했다.

   이것이 바로 희빈 장씨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기사환국이다.


   다시 권력을 잡은 남인은 서인에 대한 복수를 시작했다.

   서인의 거두인 송시열이 사사되었고 서인 민유중의 딸인 인현왕후가 폐출되기에 이르렀다.

   폐비를 반대하는 수많은 상소가 올라왔지만 숙종은 기어이 인현왕후를 폐비시키고 희빈 장씨를 왕비의

   자리에 앉혔다.

   뿐만 아니라 폐비 반대 상소를 올렸던 오두인,박태보 등을 잡아다 친히 국문하고 장유에 처했다.


  그러나 1694년(숙종20년), 이른바 갑술환국을 일으켜 다시 한 번 남인을 몰아냄으로써 서인들의 세상을  

  만들어 주었다.

  갑술환국은 노론 김춘택과 소론 한중혁 등이 폐비 민씨를 복위 시키려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시작되었다.

  남인 우의정 민암은 이 사건을 확대해 서인들을 일망타진할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왕비 장씨가 숙빈 최씨(훗날 영조의 생모)를 독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제기되면서

  상황은 일거에 역전되었다.숙종의 총애와 세자의 생모라는 지위를 믿고 경거망동하던 장씨와 그 편당들의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숙종은 인현왕후를 폐비한 것을 후회하고 있던 데다

  남인들이 지나치게 서인들을 제거하려고 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숙종은 다시 한 번 환국을 일으켜 집권당인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을 재등용했다.

  이때 남인은 더 이상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몰락했다.


  이후 폐출되었던 인현왕후가 복위되고,왕비 자리에서 쫓겨난 장씨는 일개 궁인의 신분으로 전락했다.

  그런데 장씨의 처리 문제를 두고 노론과 소론이 서로 의견을 달리했다.

  노론은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소론은 세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장씨를 극형에 처해서

  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덕분에 장씨는 한동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700년(숙종 26년), 인현왕후가 갑자기 병에 걸려 이듬해에 죽자 상황이 달라졌다.

  숙빈 최씨가 인현왕후의 죽음은 장씨의 저주 때문이라고 폭로한 것이다.

  이에 분노한 숙종은 장씨에게 자진하라는 비망기를 내렸고,결국 장씨는 사사되었다

 

  숙종은 격화된 서인,남인 당쟁을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병권을 장악해 강력한 왕권을 유지했다.

  조선 후기 중앙의 군사 제도의 핵심은 오군영 체제이다.

  숙종은 기존에 설치되어 있던 훈련도감,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에 금위영을 더해 오군영 체제를 확립하고

  수도와 외곽의 방어를 담당시켰다.

  훈련도감을 제외한 어영청,총융청,수어청 등은 인조 반정에 참여했던 서인 공신들이 자신의 사병을

  국왕을 호위하는 수도 방위 병력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창설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인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병권 장악은 곧 권력 장악을 의미했다.

 

  그러다 현종 말에 이르러 남인 유혁연이 훈련대장에 임명되면서 남인들도 병권 경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그들은 서인들이 발족한 정초청에 반발해 훈련별대를 창설했다.


  숙종의 즉위와 함께 집권한 남인은 병권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고, 훈련도감과 어영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총융청과 수어청의 병권은 여전히 서인들에게 있었다.

  이에 남인들은 효종 때 전란에 대비하고 북벌을 추진하기 위해 설치되었다가 현종 때 폐지되었던

  도체찰사부를 복설했다.

   그러나 숙종은 어느 한 당파에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도체찰사부의 복설을 허가하면서도 부체찰사 자리에 서인이자 외척인 김석주를 앉혔다.

  김석주는 수어사를 겸하고 있었다.

  숙종은 병권을 외척에게 위임함으로써 어느 당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세력 균형을 유지했던 것이다.


  한편 1680년(숙종 6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중앙 군영의 대장은 남인에서 서인으로 모두

  교체되었다. 김석주의 군사적 권한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1682년 숙종 8년에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금위영의 창설을 주도했다.

  금위영은 훈련도감, 훈련별대, 정초청의 병력 일부를 흡수해 궁성 숙위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금위영의 설치로 조선 후기의 오군영 체제가 확립되었고,숙종은 든든한 병권을 바탕으로 왕권을 더욱 강화

  할 수 있었다.

  갑술환국 이후 남인이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하고 서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서인은 이미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반목한 지 오래였다.

  서인은 1682년 숙종 8년에 일어난 임술년 고변 사건(김석주의 사주로 김환,김익훈 등이 남인의 역모를

  고변한 사건)과 태조 존호 가상 문제 등을 거치면서

  송시열을 위시한 노론과 박세채와 뜻을 함께하는 소론으로 나뉘게 되었다.


  사실 노론과 소론의 갈등은 송시열과 윤증의 '회니시비(懷尼是非)'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가 죽자 박세채가 지은 행장을 송시열에게 보내며 묘갈명을 써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송시열은 윤증의 기대와 달리 윤선거의 묘갈명을 써 줄 마음이 없었다.

  원래 송시열과 윤선거는 동문 수학한 사이였다.

  하지만 송시열은 윤선거가 평소 자신이 사문난적이라며 배척했던 윤휴를 옹호하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그런 윤선거의 묘갈명을 써 달라고 하니 마음이 동할 리가 없었다.
  결국 송시열은 마지못해 성의 없는 묘갈명을 써서 윤증에게 보냈다.

  실망한 윤증은 몇 번이나 송시열을 찾아가 다시 써 줄 것을 간청했지만 그때마다 송시열은 자구만 조금

  수정할 뿐이었다.

  이 일로 송시열과 윤증은 감정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후 송시열과 윤증은 사상적, 학문적으로도 대립했으며,

  결국 윤증이 소론에 참여하면서 정치적으로도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한편 숙종은 고질적인 당쟁의 병폐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국가가 불행해 동인,서인을 표방한 이래 백 년이 되었는데 날이 갈수록 고질이 되고 있으니 한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좁고 작은데다 문벌을 숭상해 사람을 등용하는 길이 이미 협소하다.

  그런데 한쪽이 진출하면 한쪽은 물러나 나라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또 대부분 막혀 있으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숙종은 서남당쟁을 왕권 강화에 이용했던 것처럼  노론과  소론의 대립도 자신의 정치적 이익

  을 위해 이용하는 노련함을 보였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세자의 문제를 둘러싸고 더욱 격화되었다.

 세자가 사사된 희빈 장씨의 아들인 것이 원인이었다.

 갑술환국 이후 남인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된 세자는 지위를 위협 받게 되었다.

 이때 소론이 세자의 보호를 자청하고 나섰다.

 

 소론이 희빈 장씨와 세자의 외숙인 장희재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릴 것을 숙종에게 요청했던 것도 그 때문

 이었다. 노론은 이것을 빌미로 소론을 탄핵했다.

 그리하여 희빈 장씨와 장희재가 사사된 후 소론의 남구만 등이 파직되기도 했다.


 한편 세자에 대한 사랑이 극진했던 숙종의 마음에도 점차 변화가 생겼다.

 이는 숙종이 희빈 장씨에게서 등을 돌린 순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

 숙종의 눈에 숙빈 최씨가 낳은 연잉군과 명빈 박씨가 낳은 연령군 등 다른 왕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를 눈치 챈 노론들은 더욱 강하게 세자와 소론을 압박했다.

 그러던 중 갑술환국 이후 어느 정도 유지되던 노론과 소론의 세력 균형이 깨지는 일이 발생했다. 


 1716년(숙종42년). 이른바 병신처분이다.

 이는 소론의 정신적 지주였던 윤증이 사망한 후 불거진 '가례원류' 파문에 대해서 숙종이 노론의 손을 들어 

 준 사건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소론의 정치적 입지가 급격히 좁아지고 노론의 전제정치가 시작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세자 교체뿐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숙종과 노론이 모종의 결탁을 한 '정유독대'를통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717년(숙종 43년)7월19일, 숙종은 승지와 사관을 물리친 채 노론인 좌의정 이이명과 단독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이 독대 후 숙종은 돌연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세자의 대리정정을 명했다.

   그러자 노론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명을 받들었다.

   평소 세자의 교체를 염원했던 노론이라면 세자의 대리청정을 반대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소론은 이것이 왕과 노론의 정치적 술수임을 알아차렸다.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켜 놓고 실정을 하면 그것을 빌미로 세자를 교체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세자의 편인 소론 쪽에서 세자의 대리청정을 반대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러나 숙종은 요지부동이었고, 결국 세자는 그해 8월부터 대리청정을 시작하게 되었다.

   숙종은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지 3년째 되던 해인

1720년(숙종 46년 6월8일), 깊어진 병을 회복하지 못하고 향년 60세로 죽었다.


결국 숙종 생전에 세자 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대리청정을 했던 세자가 그대로 왕위를 이어받았다.

많은 왕들이 당파의 논리에 휘둘리거나 어느 한쪽을 편들었던 것에 비해 숙종은 자신의 힘으로 당파들 사이의 세력 균형을 유지한 영민한 왕이었다.

다만 너무 쉽게 마음이 변해 여러 번의 환국을 함으로써 수많은 사류의 희생이 따른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숙종은 결국 마지막에 노론의 손을 들어 주었다.

정통 주자학을 신봉하며 관념적 대의명분론으로 양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려고 했던 노론 세력에게 조선 후기 정치의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숙종 때에 이르러 단종과 사육신의 죄가 신원되고,

소현세자빈 강씨가 민회빈으로 복원된 것도 이러한 정치적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이 밖에도 숙종은 대동법을 경상도와 황해도로 확대해 전국적으로 실시했고 화폐 경제 발달을 지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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