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 제2대 정종  이야기        작성일자; 2008.01.16.수요일,맑음

 

 

제2대 정종(방과;芳果);

    정종은 1357년(고려 공민왕 6년)에 함흥 사저 시절에 태조 이성계와 첫째 부인 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377년(고려 우왕 3년)에 아버지를 도와 왜구 토벌에 나섰으며,

    1389년(고려 창왕 1년)에는 절제사 유만수와 함께 해주에 침입한 왜적을 방어했다.

    1390년(고려 공양왕 2년)에도 지밀직사사 윤사덕과 함께 양광도에 침입한 왜적을 영주 도고산 아래에서 격파하는 등

       전공을 많이 세웠다.

      특히 아버지 이성계가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적극 가담해 그 공로로 공신에 책록되기도 했다.

      또한 장남 방우가 역성혁명에 반대해 아버지와 척을 진 이후로는 실질적인 장남 역할을 했다.

 

     이성계는 조선 개국 후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 소생의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정종은 정도전 등의 견제를 받아 다섯째 아들인 방원과 함께 개국공신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이후 방원의 비호로 세자에 책봉된 후 왕위에 올랐다.

     정종은 김천서의 딸인 정안왕후와 7명의 후궁을 두었다.

     정비인 정안왕후와의 사이에는 후사가 없었고 후궁들로부터 15명의 아들과 8명의 딸을 얻었다.

     이 밖에 정식 후궁이 아닌 애첩들로부터 2명의 아들을 더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졸; 1657년(공민왕6년)~1419년(세종1년) (63세)

재위기간; 1398.9~1400.11(2년 2개월)

능; 능은 풍덕에 있는 후릉(厚陵)이며 살았어도 죽어서도 후대 260 여년간 조선의 군주로써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묘호가 없는 왕으로 종묘에 봉안되어 있다.

가계도;

   부; 태조 이성계

   모;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

    왕후; 정안왕후(定安王后) 김씨

    성빈 지씨; 덕천군,도평군

    숙의 지씨; 의평군,선성군,임성군,함양옹주

    숙의 기씨;순평군,금평군

    숙의 문씨;종의군

    숙의 윤씨; 수도군,임언군,석보군,장천군,인천옹주

    숙의 이씨; 진남군

    가의궁주 유씨;불노

    시비 기씨; 지은군

    신원미상; 덕천옹주,고성옹주,전산옹주,함안옹주

 

소개;

1377년(우왕 3)에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했고,

1389년(창왕 1) 절제사 유만수 밑에서 해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으며 조선이 개국되자 영안군에 봉해지고,

    

태조 이성계는 젊고 총명하며 친정이 권문세가며 태조에게 힘이 되어 준 둘째 부인 강씨를 총애하였으며 많은 부분을

의존했으며 태조의 집권 거사에 직접 참여하여 막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392년7월,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고 한 달 뒤에 소년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을 때 장남 방우의 나이는 39세였고,

   방석의 세자 책봉에 대해 가장 불만이 많았던 정안대군 이방원의 나이는 26세였다.

   태조 이성계와 강비,정도전의 이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 등 이것이 화근이 되어 조선왕조는 개국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내해야 했다.

   그간 꾸준히 병권 집중 운동을 벌여오던 정도전 일파는 이른바 진법 훈련 강화를 내세우며 왕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방원은 이방의와 이방간 등 형제들과 함께 도전 일파를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정도전 일파의 밀모설을 만든다.

   즉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밀모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398년8월25일,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이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남은,심효생 등 반대파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세자 방석을 폐위하여 귀양보내고

   후일 방번과 함께 죽인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1398년(태조7년),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동생인 이방원의 영향력 아래에서 태조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1399년(정종1년) 3월에 개경으로 천도했고 집현전을 설치했다.

   

이방원은 정도전 제거했지만 자신이 권력을 잡자 세력 강화를 위해서 왕족들의 사병을 혁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훗날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왕자의 난'으로 방석과 방번 형제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태조는

그 다음달인 1398년 9월,

   둘째 아들 방과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났고  방과는 동생 방원의  뜻에 따라 조선 제2대 왕으로 등극했다.

 

태조가 물러난 것은 자의 보다는 타의에 의한 면이 짙다.

이미 조정은 방원의 세력이 포진해 있었고 태조는 와병중 이어서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이방원의  양보로 즉위한 정종이 비록 왕좌에 있긴 했으나 정종때의 정치는 거의 정안대군 이방원의 뜻에 따라 진행되었다.

정종은 재위시에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 오락에 탐닉했는데 이런 보신책 덕분에 정종은 방원과의 우애를 유지할 수 있었다.

 

1400년2월 ,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하여 아우 이방원을 세제로 책봉한 뒤 사병을 혁파하고 병권을 의흥삼군부에 집중시켰다.

   또한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면서 군,정 분리 체제를 이룩했다.

1400년11월,

   세제 이방원에게 선위한 뒤 상왕으로 인덕궁에 거주하면서 격구·사냥·연희를 즐기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상왕으로 물러나는 것은 그와 그의 정비 정안왕후의 목숨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왕위에서 물러난 19년 후인 1419년(세종1년)에  63세로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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