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 제22 정조 이야기           2019.07.30.화요일,맑음

정조(이산); 조선왕 제22대

생졸; 1752년(영조28년)-1800년(정조24년).49세

재위기간; 1776년-1800년

능; 경기도 화성군에 위치한 건릉(健陵).

가계도

 정조;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죽자 영조의 큰아들 효장세자(주촌왕 진종)에게 입적되었다.

   효의왕후 김씨; 김시묵(金時默)의 딸로 1762년(영조38년)에 세손빈에 책봉된 후 왕비가 되었으나 후사가

                        없었다.

   의빈 성씨

      문효세자

   수빈 박씨

      23대 순조

      숙선옹주

   원빈 홍씨

   화빈 윤씨

       공주


정조는 1752년(영조 28) 9월 22일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사랑했다.

1762년(영조38년),정조의 나이 11세 때 생부인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다.

정조는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영조와 집권 세력인 노론들은 그런 정조를 외면했다.

사도세자가 죽자 정조는 영조의 큰아들 효장세자에게 입적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마음속으로 언제나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잊지 않았다.


엄격한 영조와 등을 돌린 외척(경의왕후;혜경궁 홍씨)과 노론세력에 둘러싸인 세손(정조)의 처지는 외롭고 괴로웠다.그런 세손을 비호하며 충복을 자처한 사람은 시강원 춘방관이었던 홍국영이었다.

야심가였던 홍국영은 의지할 곳 없는 세손의 신뢰를 얻었고,

홍국영은 세손이 홍인한(홍봉한의 동생),영빈이씨 소생인 화완옹주의 양자인 정후겸을 위시한 외척 세력

(부홍파)과 척을 지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부홍파는 처음에는 세손을 등에 업고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세손이 자신들을 배척하자

등을 돌려 견제하기 시작했다.부홍파는 세손의 왕위 등극을 막기 위해 협박과 방해도 서슴지 않았다.

 

1775년(영조 51), 영조가 세손의 대리청정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이런 의도는 극명하게 드러났다.


동궁께서는 노론과 소론을 알 필요가 없으며,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알 필요가 없으며,조정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이 알 필요가 없다라고 하는 홍인한의 이른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은 세손의 권위를 전면적

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조의 병환이 깊은데다 소론계 서명선이 세손을 지지함으로써 세손의 대리청정은 실현되었다.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인 1776년(영조52년)3월에 영조가 세상을 떴고 세손 정조가 그대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정조의 정비는 김시묵의 딸 효의왕후로, 1762년(영조 38)에 세손빈에 책봉된 후 왕비가 되었으나 후사가

없었다.

후궁인 의빈 성씨가 1남(문효세자)1녀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세상을 떴고,

수빈 박씨가 23대 왕 순조를 비롯해 1남 1녀를 낳았다.


왕위에 오른 정조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자신을 배척했던 외척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영조 재위 시절 완론 중심의 탕평책은 외척 세력의 득세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탕평파가 외척이 된 것이다.

이들은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을 중심으로 한 부홍파와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 김씨 가문을 중심으로 한 공홍파가 나뉘어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정조는 이들 외척 세력에 대해서 불만이 컸다.

정조는 홍국영,서명선,김종수 등을 앞세워 홍인한과 정후겸을 유배시키고 그 일당을 처벌했다.

이로써 정조의 즉위를 방해했던 부홍파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다만 외조부인 홍봉한과 고모인 화완옹주는 왕실의 권위를 지킨다는 이유로 처벌하지 않았다.


이어 정조는 또 다른 외척인 경주 김씨 가문을 겨냥했다.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구주에게 혜경궁 홍씨(정조의 어머니)에게 병문안을 하지 않았다는 죄를 씌워 유배

시킨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공홍파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이렇듯 왕권 강화의 걸림돌이었던 두 외척 세력의 핵심 인물을 제거한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했다.

정조의 탕평은 영조의 탕평과는 그 성격이 많이 달랐다.

영조는 반복되는 충역시비를 거치면서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왕의 절충안을 따르는 완론을 주로 기용했다. 반면에 정조는 의리에 바탕을 둔 준론(강경파) 탕평을 펼쳤다.

  여기서 의리란 왕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정조는 색목(色目,당파의 파별)의 구분 없이 오로지

  의리를 지키는 사람을 중용하겠다는 정치적 원칙을 고수했다.


이러한 의리 탕평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붕당 타파가 가장 큰 화두가 아닐 수 없었다.

우선 정조는 노론의 일방적인 독주를 막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정조는 노론도 소론도 아닌 남인에게 주목했다.

숙종 때 이후 몰락하다시피 했던 남인을 탕평에 끌어들이는 것에 대한 노론의 반발은 당연했다.

노론은 남인을 역당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조는 노론의 반대에도 남인인 채제공을 재상의 자리에 앉히는 등 준론 탕평의 뜻을 펼쳤다.

정조는 탕평을 통해 당파 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충복을 자처해 온 홍국영을 앞세워 외척 세력의 핵심 인물들을 제거했다.

하지만 여전히 주변에는 정조의 신변을 위협하는 인물들이 존재했다.

특히,임오년에 나경언을 사주해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하게 했던 홍계희를 비롯한 그의 일가는 정조를 시해하려고 궁으로 자객을 들여보내기도 했다.

이 일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왕을 직접 죽이려고 했다는 점에서 정조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뒤이어 발생한 '은전군 추대 사건'은 홍계희의 팔촌인 홍계능이 주도했는데, 혜경궁 홍씨의 친동생,

즉 정조의 외숙인 홍낙임까지 가담하고 있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신변에 커다란 위협을 느낀 정조는 친위 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1777년(정조1년)에 왕궁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숙위소를 설치하고 숙위대장에 홍국영을 임명했다.

이로써 정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있던 홍국영은 여러 요직을 차지한 데 이어 병권마저 장악하게 되었다.


홍국영은 점차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기에 이르렀고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모두 홍국영의 눈치를 보았다. 홍국영의 세도정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홍국영의 권세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홍국영이 초심을 잃고 과욕을 부린 것이 원인이었다.

홍국영은 정조의 정비 효의왕후가 후사를 잇지 못하자 자신의 누이를 정조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누이 원빈 홍씨가 정조의 후사를 잇는다면 더욱 막강한 권력을 누릴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원빈 홍씨는 후사를 잇지 못한 채 후궁이 된 지 1년 만에 죽고 말았다.


조바심이 난 홍국영은 정조의 이복 동생인 은언군의 아들  상계군 이 담(湛)을 죽은 원빈 홍씨(홍국영의

누이)게게 양자로 삼은 후 왕세자에 책봉하려고 했다.


홍국영의 이러한 행동은 정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정조의 뜻에 따라 외척 제거에 앞장섰던 홍국영이 권력 욕심에 눈이 멀어 스스로 외척이 되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홍국영의 권력욕에 염증을 느낀 정조는 신하들의 탄핵상소를 유도했고,

1779년(정조 3)에 김종수의 탄핵을 계기로 홍국영을 쫓아냈다.

홍국영의 세도정치는 3년 만에 끝이 났다.


정조가 준론 탕평을 펼치면서 정치 세력은 시파(時派)와 벽파(辟派)로 나뉘었다. 시파와 벽파는 새로운 당파가 아니라 기존의 노론, 소론, 남인의 3색 당파 내에서 정조의 정국 운영에 동조하는 사람을 시파, 반대하는 사람을 벽파라고 했다. 따라서 노론 중에도 시파와 벽파가 있었고, 소론과 남인 중에도 시파와 벽파가 있었다. 시파와 벽파가 나뉘게 된 데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임오의리(壬午義理)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큰 몫을 차지했다. 시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동정적인 입장이었던 반면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시파와 벽파가 계속해서 대립하는 가운데 1788년(정조12년)에 정조는

노론 김치인,소론 이성원,남인 채제공을 삼정승에 임명하는 획기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이후 정국의 주도권은 채제공의 지휘 아래 노론 시파에게 넘어갔고 노론 벽파는 점차 세력이 위축되었다.

1791년(정조15년)에 이르러서는 채제공이 독상(獨相)에 올라 정조의 여러 개혁 정책들을 추진했다.



1792년(정조16년)에 영남 유생 1만57명이 연명해 사도세자의 죄를 신원하고 그를 모해한 무리들을 처벌


해야 한다는 이른바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영남만인소'를 접한 정조는 감정이 벅차올랐다.

아버지에 대한 애통함을 30여 년간 간직해 온 정조는 비답을 통해 그동안 금기시 되었던 임오의리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소극적으로나마 밝혔다.

이에 벽파는 크게 동요했고,이후 시파와 벽파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정조는 즉위 초부터 외척 제거와 준론 탕평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이 밖에도 정조는 여러 가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개혁 정책을 통해 왕권 강화를 추구했다.

우선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규장각 설치를 준비했다.

왕권 강화를 위한 정치 기반을 확보하는 첫 단추였다.

규장각은 역대 왕들의 어제와 어필 등을 정리, 보관하고 서적을 수집하거나 편찬하는 왕실 도서관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규장각은 단순히 왕실 도서관의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조는 규장각이 측근 세력을 결집시키는 구심점이 되길 바랐다.


1781년(정조 5)에 그 기능이 재정비된 규장각은 정조의 복안대로 승정원이나 홍문관을 대신해 국왕의 통치를 보좌하는 기관으로 거듭났다.

규장각이 정조의 친위 세력을 양성하기 위한 기관이라면

1788년(정조12년)에 설치된 장용영은 무력 기반을 다지기 위한 군영이었다.


즉위 초 친위군의 필요성을 느낀 정조는 숙위소를 설치해 궁궐 수비를 강화했다.

그러나 숙위소는 숙위대장을 맡았던 홍국영이 실각할 때 함께 혁파되었다.

이후 정조는 무예가 뛰어나고 통솔력을 지닌 엘리트 무관 30명을 선발해 장용위를 만들었다.

이 장용위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개편된 조직이 바로 장용영이다. 장용영은 1793년(정조 17)에 이르러 장용내영과 장용외영으로 진용을 완비했고, 장용내영은 수도 방위를, 장용외영은 화성에 위치한 현륭원과

행궁 수호를 담당했다.


1791년(정조15년) 6월에는 좌의정 채제공의 주장에 따라 육의전을 제외한 모든 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

하는 경제 개혁 정책인 신해통공을 전격 실시했다. 금


금난전권이란 육의전과 시전 상인에게 부여된 전매 특권으로, 18세기 이후 시전이 증가하면서 소상인의

몰락, 상품 유통의 지연, 물가 폭등 등의 원인이 되었다. 금난전권의 폐단이 커지자 경종 이래로 이를 시정

하려는 시도가 있어 왔으나 시전 상인들의 반발로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런데 정조가 문제의 해결을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신해통공으로 사상인의 자유로운 상행위가 보장되고 물가가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전 상인과 결탁한

노론 벌족들을 견제하는 정치적 효과를 함께 거둘 수 있었다.


한편 정조는 1789년(정조13년) 7월에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이장하고 현륭원을 조성하는 것을 시작

으로 화성 경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화성 경영은 정조의 야심찬 정치 개혁의 일환으로 준비된 것이었다.

군사적 기반인 장용영을 강화한 것이나 신해통공을 통해 위축된 수원의 상권을 살린 것도 화성을 본거지로 정치 개혁을 완성하려는 사전 포석이었다.


1794년(정조18년) 새해 벽두, 정조는 마침내 화성 축조 계획을 발표했다.

현륭원이 있는 곳은 화산이고 이 부(府)는 유천이다.

화(華) 땅을 지키는 사람이 요(堯)임금에게 세 가지를 축원한 뜻을 취해 이 성의 이름을 화성이라고 했는데 '화(花)' 자와 '화(華)' 자는 통용된다.

화산의 뜻은 대체로 8백 개의 봉우리가 이 한 산을 둥그렇게 둘러싸 보호하는 형세가 마치 꽃송이와 같다

하여 이른 것이다. 그렇다면 유천성(柳川城)은 남북이 조금 길게 해 마치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면 참으로 의의가 있을 것이다. 어제 화성과 유천의 뜻을 이미 영부사에게 언급한 바 있지만, 이 성을 좁고 길게 해 이미 버들잎 모양처럼 만들고 나면 북쪽 모퉁이의 인가들이 서로 어울려 있는 곳에 세 굽이로 꺾이어 천(川) 자를 상징한 것이 더욱 유천에 꼭 들어맞지 않겠는가. 

                

정조는 화성 축조와 함께 왕권을 더욱 강화하고 10년 후에는 세자에게 전위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정조가 전위를 통해 이룩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도세자의 추숭이었다.

자신은 영조의 뜻을 거스를 수 없지만 새 왕이라면 정치적 부담을 덜고 추숭 문제를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처음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고 현륭원을 조성할 때만 하더라도 효심의 발로로만 여기던 벽파는 화성 축조가 시작되자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장 공론화되지는 않았지만 사도세자의 추숭과 임오화변 관련자의 처벌 문제가 언제 불거질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특히 이 문제의 당사자인 노론 벽파는 크게 반발하며 화성 축조에 반대했다. 그러나 정조는 이들의 반대에 아랑곳하지 않고 화성 경영 계획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남인 재상 채제공과 규장각 학자 정약용의 주도 아래 화성은 당초 계획했던 공사 기간보다 훨씬 빠른 2년

6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화성 축조를 정점으로 정치 개혁에 자신감을 갖게 된 정조는 점차 더욱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자신의 학문적 우월성을 내세운 군주도통론으로 왕이 의리의 주인임을 자처했다.

이러한 정조의 태도는 신료들의 반발을 샀으며, 말년으로 갈수록 반발의 강도는 더욱 거세졌다.


그러한 가운데 벽파의 맹공에 지친 채제공이 물러나면서 위기가 시작되었다.

노론 벽파 이병모,심환지를 중심으로 한 벽파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이에 위협을 느낀 정조는 마침내 강경한 정치적 결단을 내리게 된다.

그것이 바로 1800년(정조24년) 5월 말일에 발표한 이른바 '오회연교(五晦筵敎)'였다.


정조는 오회연교를 통해 탕평을 추진해 온 자신의 통치원칙을 밝히고 임오의리를 천명했다.

즉,기존 노론의 정치적 원칙에 반해 사도세자의 죽음을 억울한 죽음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관련자를 처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이 말은 사도세자에게 반역을 범한 노론 벽파를 향한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정조는 남인 강경파를 재상에 기용할 것임을 암시함으로써 노론 벽파 정권을 압박했다.


오회연교는 노론 벽파를 벼랑 끝으로 내몬 정조의 초강수였다. 정국은 급격히 냉각되었다.

이제 노론 벽파의 결단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정조의 의도대로 노론 벽파가 자신들의 의리원칙을 포기한다면 정조는 그야말로 강력한 왕권을 행사

하며 자신의 뜻대로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정조는 오회연교를 발표한 지 채 한 달이 되기도 전에 갑작스럽게 죽고 말았다.

1800년(정조24년)6월28일,정조의 나이 49세였다.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시기에 정조가 뜻밖의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남인들 사이에서는 노론 벽파에 의한 독살설이 나돌기도 했다.

그 진위는 알 수 없으나 정조의 죽음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이 궁지에 몰렸던 노론 벽파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후 정조에게 동조했던 개혁 세력은 급격히 와해되었다.

탕평책은 폐기되었고,정조의 권력 기반이었던 장용영도 혁파되었다.

평생을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과 한탄으로 산 정조는 그 애틋한 마음을 정치 개혁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당쟁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그는 전 조와는 달리 확고한 탕평의지로 일관된 통치원칙을 고수했다. 누구보다 뛰어난 학식과 문장을 지닌 왕으로서 스스로의 역량으로 왕권 강화를 꾀한 점도 높이

평가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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