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 제24대 헌종 이야기      2019.08.05.월요일,맑음

헌종; 이환(奐),

생졸; 1827년-1849년

재위기간; 1834-1849년

능;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동구릉 내에 위치한 경릉(景陵)

가계도

효현왕후 김씨; 김조근의 딸

효정왕후 홍씨

경빈 김씨

궁인 김씨

   딸(옹주)


헌종은 1827년(순조 27) 7월 18일에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와 신정왕후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순조의 손자로, 효명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순조의 뒤를 이어 1834년(순조 34)에 즉위했다.

이때 헌종의 나이 불과 8세였다.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탓에 헌종은 순원왕후(순조비) 김씨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이어 1837년(현종3년)에는 안동 김씨인 김조근의 딸 효현왕후를 왕비로 맞이했다.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가 계속해서 이어질 분위기였다.

하지만 순조는 죽기 전에 헌종의 외삼촌인 조인영에게 헌종의 보도를 부탁했고 풍양 조씨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1840년(헌종6년),헌종이 14세가 되던 해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면서 풍양 조씨의 본격적인 세도가

시작되었다.

조만영의 아들이자 신정왕후의 오빠인 조병구, 조득영의 아들 조병현 등이 조인영과 함께 헌종 시대의 세도정치를 이끌었다.

헌종은 매우 잘생긴 외모를 가졌으며 궐의 아름다운 궁녀들과 모두 관계할 정도로 여자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사는 없었다.

1843년(헌종9년)에 죽자 헌종은 효현왕후 김씨가

이듬해 홍재룡의 딸 효정왕후를 계비로 맞이했다.

이 밖에 두 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이들 모두 후사를 잇지 못했다.


헌종이 즉위한 시기는 서양 세력이 조선에 침투하기 시작한 때였다.

18세기 이후 영국, 프랑스 등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군함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해 왔다.

그들은 무역과 포교를 빌미로 동양에 대한 침략 야욕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었다.

조선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잦은 이양선의 출몰에도 국제 정세에 어두웠던 조선의 조정은 쇄국 정책으로 일관했다.


특히 정권을 장악한 풍양 조씨 세력은 척사 정책의 일환으로 천주교 박해를 주도했다.

물론 헌종도 이에 동조했다.

헌종은 1839년(헌종 5)에 조인영이 지어 올린 '척사윤음(斥邪綸音)'을 전국에 반포했다.


'척사윤음'은 유학을 정학으로 규정하고 그에 반하는 서학(천주교)은 사학이므로 배척해야 한다는 척사귀정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1839년(헌종 5)에 시작해 1840년(헌종 6)까지 프랑스 인 신부 모방과 샤스탕을 비롯해 천주교도 70여 명을 처형한 기해박해는 이러한 척사귀정의 원칙이 적용된 것이었다.

풍양 조씨 세력은 천주교 탄압을 통해 천주교에 비교적 관대했던 안동 김씨 세력을 함께 제거하고자 했다. 이때 이러한 정치적 목적 때문에 천주교 박해 때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도 많았다.


이후에도 헌종과 풍양 조씨의 천주교 탄압은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1846년(헌종 12)에 프랑스 해군 함장 세실(Cécille)이 군함 3척을 이끌고 나타나 충청도 홍주에 위치한 외연도에 정박했다. 그들은 조선의 왕에게 전달할 국서를 가지고 있었다.

국서의 내용은 기해박해 때 프랑스 인이 처형된 것에 대한 항의와 자국민에 대한 탄압이 계속된다면 본국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조선에 대한 협박이자 문호 개방에 대한 압력이었다.

세실은 국서를 조선의 왕에서 전할 것을 요구했으나 외연도의 지방관과 주민들은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자 세실은 국서를 두고 떠나면서 다음 해에 다른 군함이 답변서를 받으러 올 것이라고 했다.


이 내용은 곧바로 헌종에게 보고되었다.

헌종은 영의정 권돈인과 이 문제에 대한 처리를 의논했다.

헌종은 이를 청나라에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고 여겼으나 권돈인은 앞서 기해년에 프랑스 인 신부를 죽인

일도 보고하지 않은 마당에 이 일을 보고하면 괜한 오해를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 번 사술이 유행하고부터 점점 물들어 가는 사람이 많고, 이번에  프랑스 배가 온 것도 반드시 부추기고 유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할 수 없으니, 모두 내부의 변입니다."라고 했다.

결국 두 사람의 대화는 천주교를 더욱 탄압해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어 헌종은 당시 체포되어 옥에 갇혀 있던 사학 죄인 김대건을 효수에 처할 것을 명했다.

김대건은 기해박해 때 처형된 모방 신부에게 발탁되어 마카오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사제로서 포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헌종은 세실 제독의 군함 출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한다는 명목으로 김대건과 여러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천주교는 고단한 조선 백성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듬해 프랑스의 군함 글로아르 호가 세실 함장이 전했던 국서에 대한 답변을 받아가겠다며 조선의 앞바다에 나타났다. 그런데 이 군함이 전라도 만경의 고군산열도 해안에서 폭풍을 만나 좌초되었고, 선원들은 고군산도에 약 1개월간 머물다가 중국 상해에서 빌려 온 영국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선 조정에서는 행여 후환이 있을까 우려해 대책을 마련했다.

결국 세실이 보냈던 국서에 대한 답변의 형식으로 그간 조선 앞바다에 나타난 프랑스 선박의 동정과 기해년에 프랑스 신부를 죽인 사실 등을 적은 문서를 작성해 청나라 예부에 전달했다.

청나라에서 이 문서를 프랑스에 전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이 문서는 조선이 서양에 보낸 첫 외교문서였다.

                 

이후에도 이양선의 출몰은 계속되었고 그럴 때마다 민심은 흉흉해졌다.

외세의 침투가 시작되고 세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백성들도 서서히 깨달아 갔다. 그

런데도 조정에서는 그에 합당한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척사 정책을 고수하는 것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이 또한 견제 세력이 없는 세도정치의 폐단이었다.


한편 어엿한 청년이 된 헌종은 점차 외척인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헌종은 궁에 들어온 외숙 조병구를 불러 그의 죄를 따지며 "외숙의 목에는 칼이 들어가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이는 조병구에 대한 경고이자 풍양 조씨 세도에 대한 경고였다.

이 말에 충격을 받은 조병구는 황급히 궁을 빠져나와 수레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만 수레가 뒤집어져 조병구는 땅에 머리를 박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러나 외척 세도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뜻을 펼쳐볼 새도 없이

헌종은 1849년(헌종15년)6월6일, 23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런데 헌종이 혈육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서 문제가 생겼다.

왕실에는 그의 뒤를 이을 6촌 이내의 친족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남은 친족들도 신유박해로 모두 죽고 없었다.

이것은 500년 가까이 이어 온 왕실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헌종 사후 그 후사를 잇는 일은 흔들리는 왕실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또한 이것은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 사이의 세력 다툼에도 커다란 변수로 작용했다.


순원왕후 김씨는 헌종이 죽자마자 옥새부터 찾았다.

그리고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전계군(全溪君,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의 아들 이원범(李元範)을 자신의 아들로 삼아 후사를 잇게 했다.

결국 다시 안동 김씨 세력에게 정권이 넘어간 셈이었다.

헌종 재위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자연재해가 빈번히 일어나고 역병이 돌아 삶의 터전을 버린 백성이 수없이 많았다. 삼정의 문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고, 민란도 여러 차례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지도층은 권력 다툼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진정으로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강화도령' 이원범이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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