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 제7대 세조(世祖 ) 이야기          작성일자; 2012.08.14.화요일,맑음

 

세조; 수양대군 이 유(瑈),세종의 둘째 아들

생졸; 1417.09.29~1468.09.07

재위기간;1455년~1468년

능; 경기도 양주의 광릉.

     본래 묘호를 신종으로 하려 하였으나 아들인 예종의 강력한 주창으로 묘호가 세조로 정해졌다.

 

 가계도;

   부 : 제4대 세종

   모 : 심온의 딸 소현왕후 심씨

   왕비 : 정희 왕대비 윤씨(貞熹王大妃 尹氏),윤번의 딸

   후궁 : 근빈박씨  

            덕원군,창원군

 자녀 (5남 2녀)

      1438 (정희왕후 윤씨 生) : 의경 세자 장 : 제9대 성종의 아버지,아들에 의해 추존된 덕종

      1442 (정희왕후 윤씨 生) : 의숙 공주 세선

      1449 (근빈 박씨 生) : 덕원군 서

      1450 (정희왕후 윤씨 生) :해양대군 황: 제8대 조선 왕 예종

      1458 (근빈 박씨 生) : 창원군 성

      미상  (정희왕후 윤씨 生); 의령공주 세령 ; 야사 속 인물로 생존 확인 불가능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수양대군은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반정을 일으켜 집권한 지도자로,

1455년 계유정란으로 즉위한 후,사육신,생육신 등의 반발과 사림세력의 비판을 초래하였다.

단종 복위 운동을 진압하고 사육신과 그 일족을 대량 숙청하였으나 후일 죄를 뉘우치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비록 의롭지 못한 행위로 왕위에 오르고 상왕이 된 자신의 조카의 작위를 격하시킨 뒤 다시 그를 죽여서

큰 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후 스스로 뉘우치고 정사에 몰두하여 재위 14년간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조선 초기의 왕권 확립에 공헌이 많았다. 글씨에 뛰어났다는 평도 있다.세조는 왕위에 오르는데 큰

기여를 해준 공신들을 대부분 죽인 할아버지 태종에 반해, 세조는 공신들을 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대

하여 결국 조선의 당파 싸움을 최초로 시작한 훈구파의 형성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417년9월29일 충녕대군인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제3대 태종이 어린 손자들과 산책을 하던 중

한 고승이 두번째 손자분이 할아버지의 기상을 많이 닮았다고 하자,

어떻게 닮았느냐고 묻자, 둘째 손자(수양대군)가 같은 운명을 걷게 될 것이라는 예언하였다.

그가 태어날 무렵 태종은 자신의 뒤를 이을 양녕대군(장자)이 세자로서의 위치가 상당히 불안하고,

주색을 즐기는 등의 많은 문제를 일으키자,태종은 세자를 교체할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의 나이 2살때,

숙부인 성녕대군(네째)이 세상을 떠나고,아버지인 충녕대군이 왕세자를 거쳐 세종으로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진평대군이었으나,후에 함평대군,진양대군으로 개봉되었고,

세종10년 1428년.수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수양대군은 박식하고,병약했던 형 문종과는 달리 무예 실력도 출중했다.

승마와 격구, 활쏘기 재주가 뛰어났고 사냥을 즐겼다.

세종이 병들고 세자였던 문종이 대리청정을 하자,

그는 동생인 안평대군(세째)과 함께 신하들에게 세종과 문종의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형제는 당시 조정 중신들이 왕권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것을 보고 탐탁치 않게 여겼다.

세종의 병약함을 기회로 일부 국정 전반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는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철저히 숨겼고,정치 보다는 학문과 서적 간행에 힘쓰면서 인맥을 형성하고

정치를 하려는 기회를 노리던 중 한명회,권람을 알게 되고 그들로 부터 후에 신숙주 등의 인재들을 포섭하게 된다. 

문종의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았고, 후사도 나이가 어렸다.

세종 자신도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문종은 세종보다도 더 병약하여 일찍 사망할 우려도 있었다.

세종은 일찍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여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고,

세종은 또, 자신이 일찍 죽고 세자 역시 오래 못갈 것을  예상하고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어린 세손의 보필을 부탁하였는데

그는 이를 기회로 여기게 되었다.

 

1450년 세종이 승하하고

그 뒤를 이은 문종은 병약하여 왕위에 오른 지 2년여 만에 승하하고 12살의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였다.

단종이 즉위하면서 김종서,황보인등의 신하들이 정권을 장악하자 왕실과 훈신들은 위기 의식을 느끼자  

이때 안평대군(세째)과 금성대군(여섯번째) 등이 두각을 드러내고 ,

안평대군 계열에서 왕권에 뜻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되자 수양대군 역시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종이 즉위하자 왕족의 대표로서 자신을 단종을 최측근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라고 말하였고,

무신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평대군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신권을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왕족과 성리학자들의 지지를 획득한다.

이어 정인지,한명회,권람 등과 공모하고 홍윤성,홍달손등을 통해 병력을 모은 뒤

문종의 명으로 단종의 보호책임을 맡은 황보인,김종서 등을 죽이고,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키고  

영의정 부사가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 안평대군을 탄핵하여 사형시킨 뒤,훈신들의 추대로

1455년.단종을 강제적으로 상왕으로 올려 조선의 새로운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1455년.즉위하여 14년간 왕위에 있었다.

1453년.함길도 종성에서 이징옥 난이 발생했으나 부하들이 이징옥을 배신하는 내분으로 쉽게 토벌했다.

1456년 2월 단종을 복위시킬 목적으로 성상문,성승,유응부등이 거사를 도모하다가 세조의 측근인 정창손의

 사위 김질의 밀고로 일망 타진 되었고,세조가 즉위한 이듬해(1456년)에 성상문,유성원,하위지등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과 무인들은 연회때 별운검을 설치한 뒤 세조3부자를 제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계획을 수립하였다.그러나 가담자의 한명인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에게 이를 말하고,

 정창손의 설득에 의해 사육신의 정변 기도를 폭로한다.

1456년.성상문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한 후 강원

 영월로 유배보내고,집현전을 폐지하였다.세조는 사육신 중 성상문,하위지,박팽년,유응부등을 회유하려

 하였으나 이들은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세조는 사육신과 그 가족 6백여 명을 처형하고,유배 보냈으며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의 노비와 관비가 되었고, 4촌 이상의 친척들은 노비로 삼거나 외지로 유배를

 보내는 등의 대숙청을 감행한다.

1457년.넷째 동생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계획을 세운다.

  동생 금성대군,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또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금성대군을 죽이고 단종도 같이

  죽였다.또한 사육신과 관계된 여인과 재산을 공신의 노비로 분배하여 멸문시켰다. 

  사건은 세조로 하여금 의심을 더욱 부추기는 원인이 됐고,조카인 단종을 죽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

  하였다.사육신등을 처형한 뒤 문사들을 억압,탄압한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그는 정몽주의 후손들과 문도들을 발굴해서 등용한다.이때 김숙자와 김종직 역시 등용되는데,

  김종직은 세조에 의해 등용 되었으면서도 후일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의 반정을 조롱했고,

  김종직의 제자들과 그의 학파는 세조의 반정을 찬탈로 규정하고 조롱하였다.

 

1457년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영월에 유배하였다.

1459년 신숙주를 파견하여 여진족을 타이르게 했고,경고를 듣지 않자 토포사를 보냈다.

1460년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간경도감을 신설하여 불경을 간행 했으며,불교를 숭상하여 '원각경'을 편찬하게 하고 원각사를 창건했다.

   또한 과전을 폐지하고 직전제를 실시토록 하였다.  

 

   한편, 그가 며느리뻘인 귀인 권씨와 소훈 윤씨를 범하려 했다는 추문이 돌았다. 

   권귀인과 윤소훈은 세조의 장남 의경 세자의 후궁들이었다.

   김일손은 이 사실을 그대로 사초에 실었다가 사화의 원인이 되었고 자신도 희생되었다.

   김일손은 귀인 권씨의 조카이자 양자 허반에게서 들은 것을 사초에 기록하였는데

   연산군은  사초 기사 중 권 귀인은 바로 덕종의 후궁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는 구절과 '세조는 소훈 윤씨에게 많은 전민과 가사를 내렸고 항상 어가가 따랐다'는 사초의

   내용을 구실삼았다.

  1461년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해 많은 불경을 국역하도록 명하기도 했다.

  함경도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카 귀성군을 파견하여 평정케 하고,

  강순을 파견하여 건주위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1468년 세조는 자신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고,

   한명회,신숙주,구치관 등을 불러 그들에게 왕세자 해양대군을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했다.

   9월6일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 날,향년 52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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