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 제8대 예종 이야기     작성일자; 2011.06.09.목요일,맑음

 

예종; 요절한 덕종 의경세자의 동생 해양대군 이 광으로 세조의 둘째 아들이다.

생졸; 1441-1469

재위기간; 1468-1469 (1년2개월)

능; 창릉은 제8대 예종(1450~1469)과 계비 안순왕후 한 씨(1445?~1498)의 능이다.

 

가계도;

부; 세조

모; 정희왕후 윤씨 

  정비; 장순왕후 한씨는 제8대 얘종의 정비로 한명회의 셋째딸(생졸1445-1461)이다.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셋째 딸로 세자빈때 17세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 인성대군-3살 때 요절

         

   한명회는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했으나 세자빈으로 죽자

   다시 넷째 딸을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과 혼인 시킨 후에 소혜왕후(인수대비)와 합심하여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려 놓으니 넷째 딸이 왕비가 된다.          

   셋째 딸은 세조에게서 장순빈의 시호를 받았다가 그후 제부인 성종이 장순 왕후로 추존했다.        

 

    계비; 안순왕후 한씨(생졸 ? - 1498)는 청주 부원군 한백륜 딸로 예종이 세자 시절 한명회의 딸(장순왕후)이 세자빈에

             책봉되었다가  다음해 산후병으로 요절하자 세조 8년(1462)에 두 번째 세자빈이 된 후 예종의 즉위와 함께 왕비에 

             오르지만 즉위 14개월만에 남편 예종이 승하하고,왕비 한씨는 어린 나이로 청상이 되었다가 

             1498년12월 23일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자; 제안대군-어리다는 이유로 왕위 계승 못함

         딸;현숙공주

 

예종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 형인 의경 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세자가 되었다가 19세에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원래는 의경 세자의 아들인 원손 월산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이 적통 계승의 원칙에 맞는 것이었으나,

월산군은 불과 4세 였으므로 8세가 된 세조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훗날 예종)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1468년9월7일, 19세인 세자인 해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날 세조는 승하 하였다.

예종은 왕이 되었지만 19세로 성년이 되지 않아 모친인 세조비 정희왕후가 조선 왕조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한명회,신숙주,정인지,구치관 등의 중신이 원상(세조가 죽기 전에 신하들에 의한 섭정제도)으로 현직 의정부 대신들 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정희왕후는 정무를 처결하는 등 실질적 권력을 장악했다.

  

                             

                                                               ▶ 왼편이 예종릉이며 오른쪽이 인순왕후릉.

      

 

이러한 상황 속에서 원상 세력(한명회,신숙주,정인지,구치관)과,

이시애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뒤 정치적 지위가 상승한 강순,남이,구성군 등 간의 권력 다툼이 노골화되어

결국 강순.남이.구성군 세력이 반역 혐의로 제거되었으며,

이후 한명회는 영의정 이자 임금의 장인으로서 절대적 권력을 누렸다.

 

세조(世祖, 재위 1455~1468)는 즉위 초 부터 왕권 강화와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구사했다.

세조는 실추된 왕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대신 6조 판서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나랏일을 직접 왕에게 보고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했다.

또 사육신 사건 과정에서 세조와 정면으로 대치했던 집현전을 해체하고,

국왕의 비서실 격인 승정원(承政院)의 기능을 보강해 비서실 중심의 측근 정치를 펼쳤다.

세조는 동시에 국가 재정과 국방력을 키우기 위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대폭 강화했다.

조세 수입을 확충하기 위한 양전(量田) 사업,호구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호패법 복원 등도 이 같은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과거 세종 시절 6진 개척으로 조선 영토에 편입된 함길도(咸吉道, 함경도) 지역의 토호층이 반발하였다.

6진 개척 당시 세종은 이 지역에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함길도 남부와 삼남 지역의 백성을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이주시키면서 각종 국역을 면제하는 등 다양한 혜택을 베풀었다.

이른바 북방사민 정책으로, 이 지역을 확실히 조선의 영토로 삼아 여진족이 다시 넘보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였다.

당시 이곳에 이주한 백성들은 주로 땅을 가지지 않은 가난한 농민들이었고,

지역 토착 세력인 토호층이 이들을 예속민으로 지배하며 중앙 정부로부터 비교적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종의 지방 자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세조는 중앙집권 정책을 강도 높게 시행하면서 함길도의 이 같은 특혜를 인정하지 않았다.

과거처럼 현지 토호들에게 관직을 내리는 대신 지방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는가 하면,

호패법을 통해 주민들의 이주를 제한했고, 군역과 부역 등을 부과했다.

특히 1453년,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이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해 난을 일으키면서 이 지역에 대한 통제는 높아졌다.

이 과정에서 토호층의 예속민에 대한 지배력은 차츰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 수령과 토호층 사이에 갈등도 불거졌다.

 

 

이시애의 난; 1467년5월(세조13년)

세조의 중앙집권 정책으로 함길도의 특혜가 없어지자 불만과 위기감이 누적된 토호층이 난을 일으킨다.

세조 13년인 1467년5월,이시애의 선동으로 일어난 이 반란은 조선 초기 최대의 반란 사건으로 기록된다.

반란군 2만여 명은 정부의 토벌군 5만여 명을 상대로 저항하다가 그해 8월 진압됐다.

세조가 병으로 타계하기 한 해 전의 일이다.

 

이시애(李施愛)는 함길도 길주(吉州)를 기반으로 한 토호층으로, 회령 부사를 지내다 해임된 적이 있었다.

그는 1467년5월,모친 장례식에서 동생 이시합, 매부 이명효와 거사를 모의한 뒤,

토호들이 자주 모이는 유향소(지방 수령의 자문 관청)를 중심으로

‘조정에서 군사를 보내 함길도 사람들을 다 죽이려 한다’라는 내용의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동조 세력을 널리 모았다.

이시애는 또 “조정에서 함길도 사람들을 호패법으로 묶어두는 바람에, 이제 마음대로 옮기면서 살 수 없게 됐다.”라며

민심을 선동하기도 했다.

거사를 결심한 이시애는 5월 10일에 길주를 습격해 중앙에서 파견된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과 길주 목사 설정신,

부령 부사 김익수를 살해하고, 마침내 난을 일으켰다.

이때 이시애는 한양 조정으로 사람을 보내 ‘절도사 강효문이 조정의 한명회,신숙주 등과 내통해 역모를 꾸민 것을 알고,

강효문을 처단했다’라는 내용의 거짓 보고서를 올렸다.

이시애가 함길도 전역의 유향소에도 이 같은 내용을 퍼뜨리자 토호와 농민들이 잇달아 반란군에 합세했다.

이시애의 거짓 보고를 받은 세조는 현지의 진상을 파악할 길이 없었지만, 한명회와 신숙주가 왕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의심이 들어 일단 이들을 하옥시켰다.

이시애의 기만 전술이 제대로 먹힌 셈이다.

조정이 혼란을 겪으며 반란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홍원 이북에서 모여든 토호와 군민 등 반란군 2만여 명은 함길도 전역의 고을 수령들을 대부분 죽이며

단천과 북청, 홍원을 공략하고, 뒤이어 함흥을 점령했다.

심각한 보고가 잇따르자 세조는 5월 17일이 되어서야 뒤늦게 정부 토벌군을 편성했다.

귀성군 이준을 함길,평안,강원,황해 사도병마도총사로 임명하고,호조판서 조석문을 부사로,허종을 함길도 절도사로

삼았다.강순,어유소,남이가 토벌대장을 맡았다.

귀성군은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아들이며,토벌 대장 남이는 태종의 사위인 남휘의 손자다.

당시 귀성군과 남이의 출전은 한동안 소외됐던 종친 세력이 조정에서 다시 일어서는 계기가 됐다.

처음에 2만 명으로 출발한 토벌군은 세조가 한양과 삼남, 평안도, 황해도 출신의 지원군을 계속 추가로 보내면서

나중에는 5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즈음 이시애가 이끄는 반란군은 철령 북쪽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토벌군의 움직임을 관망하고 있었다.

6월 들어 반란군과 토벌군 사이에는 크고 작은 충돌이 잇따랐다.

토벌군이 6월 중순 반란군을 밀어내고 함흥에 들어간 뒤, 세조는 비로소 사태의 진상을 보고받고 하옥된 신숙주 등을

무혐의로 풀어 주었다.

이어 반란군과 토벌군은 북청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그

러자 양쪽은 서로 물러나 한 달 정도 휴전한 후에 7월 중순 다시 맞붙었다. 결국 이 싸움에서 반란군은 퇴각하였다.

결국 반란군의 주력부대는 8월초 이원(利原)의 만령(蔓嶺)에서 강순과 허종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크게 무너지고,

이시애는 길주를 거쳐 경성으로 물러나 국경 넘어 여진으로 달아나려 했다.

이때 이시애의 처조카이자 허종의 휘하에 있던 허유례가 자기 아버지가 억지로 이시애의 무리에 휩쓸렸다는 소식을 듣고,

이시애의 부하인 이주, 황생 등을 설득하였다.

이에 이주 등은 잠을 자고 있던 이시애와 이시합 형제를 묶어 토벌군에게 넘겼고,

이시애와 이시합은 8월 12일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처형당했다.

이로써 이시애의 난은 3개월 만에 진압됐다.

 

병약했던 예종은 재위 1년2개월 만에 20세의 어린나이로 요절하였고,형님 의경 세자도 20세의 어린 나이에 죽고,

예종의 세자빈인 장순왕후 한씨(한명회 셋째 딸)도 궁에 들어온지 2년도 채 못되어 원손을 낳다가 산후병으로 16살에 일찍

죽은후 원손도 어머니를 따라 가는 등 세조의 자식들에게 불행이 연속되자 백성들은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업보라고 하였다.

 다만 예종은 효성이 지극하였는바 예종이 부왕 세조가 세상을 떠난 것에 충격을 받아 건강을 해쳤다며

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환이 생기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한잠도 못 잔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

세조가 돌아가매 슬픔이 지나쳐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건강을 해치게 되어 이 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예종은 평소 공신들의 전횡에 분개하다가 즉위 직후 분경을 금지하는 등 공신들과 맞서다 재위 1년 남짓 만에 독살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같은 구테타로 집권했지만 태종과 세조는 공신을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태종은 공신 집단을 해체해 깨끗한 조정을 세종에게 물려준 반면,

세조는 왕권을 능가하는 공신 집단을 그대로 예종에게 물려주었다.

잘못된 쿠테타의 업보였다.  

 

― 예종 시대 최대의 옥사 "남이(南怡, 1441~1468)의 역모 사건"

남이의 본관은 의령이며 태종의 외손자로서 어머니가 태종의 네째 딸 정선 공주이다.

1457년(세조3) 약관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 급제하였고,

 1467년(세조13)에는 경기도 포천, 영평 일대의 도적떼를 토벌하였다.

또한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였고 그 공로로 1등 공신에 올랐다. 

무관으로서의 여러 공로로 세조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1468년에는 28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예종이 즉위한 해인 1468년에 신숙주,한명회 등의 세력에 의하여 이시애 난 때 등장한 신진 세력을 제거하면서

남이도 강등 당하였다. 

그 후 유자광이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예종에게 고하여 정승 강순과 함께 거열형에 처해졌고 많은 사람이 처형당하였다.

'남이섬'에는 예전부터 남이장군 무덤이라는 불리는 묘가 한기 있는데,

정확한 사실이 확인된 것은 아니고 다만 그가 이섬에 묻혔다는 전설이 담긴 돌무더기가 전하여 왔고

그 돌을 함부로 가져가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인근 주민들사이에는 입으로 전한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는 남이섬에 남이 장군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 남이섬의 남의 장군 묘

                                     

             △ 경기도 화성의  남이 장군묘 

 

 

-창릉 8대 예종과 계비 인순 왕후 한씨-

창릉은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과 그의 계비 안순왕후의 동원 이강릉이다.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 한씨(한명회 셋째 딸)는 파주 삼릉의 공릉에 모셔져 있다. 

예종이 이곳으로 모셔짐으로써 비로소 왕릉이 서오릉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처음 모셔진 의경 세자는 세자 신분으로 죽어 대군의 묘로 상설하였기 때문이다.

 

-역풍수의 묘자리

서오릉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창릉은 예종의 비극적 종말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형님 의경 세자는 세자 신분으로 죽었음에도 세조가 친히 나서서 명당을 찾아 극진히 장사 지냈지만

예종은 왕으로 죽었음에도 (세조가 없자) 명당은 커녕, 졸속한 국장 처리가 일사천리 진행 되었으며,

대신들 중 정인지 만이 '좌청룡 우백호중 백호가 낮다'고 하여 쓸수 없다는 의견을 냈을뿐 그 누구도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예종의 후손 2남 1녀중 큰 아들 인성대군 일찍 죽었으나 

제안대군(1466-1525)은 왕위 서열상 아버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했으나 4촌인 성종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이혼과 재혼을 거듭하는 등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못하고 끝내 자손없이 죽었다. 

현숙공주는 병조판서를 지낸 임사홍의 아들 임광재에게 시집을 갔으나 남편의 문란한 사생활 때문에 

끝내는 별거를 하고 후손없이 죽었다.

예종의 후손들이 절손 된 것이다.

또한 창릉은 이후 여러번의 변고가 있었는바 인조 3년(1625)과 4년(1626)에 봉분이 불에 타 잔디를 다시 입혔고,

영조 32년(1756)에는 정자각에 불이나 중건 했으며,

고종 33년(1896)과 38년(1901)에도 봉분에 불이 나는 등 화재가 빈발했다.

창릉은 서오릉의 여역내의 왕릉으로 조영된 최초의 능으로 

병풍석을 세우지는 않았으나 봉분 주위에 난간석을 두르고 있다. 

창릉은 조선 제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1498)의 능이다.

안순왕후는 우의정 청천부원군 한백륜의 딸로 예종 즉위년(1468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연산군 4년(1498)에 죽었다.

 

예종은 평소 공신들의 전횡에 분개하다가 즉위 직후 분경(인사청탁)을 금지하는 등 신들맞서다

재위 1년 남짓 만에 독살을 당했다는 주장이 있다.

개혁 목표는 옳았으나 현실적인 힘을 확보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특히 남이를 비롯한 신공신 집단을 제거한 것은 구공신에 맞설 세력을 스스로 제거한 결정적 하자였다.

 

-세조의 아픔은 자식이 없음이다.

온갖 공 다들인 장남 의경세자가 20세에 요절하자 차남을 세자 책봉 하였는데

그도 즉위 14개월만에 역시 20세에 요절했다.

예종은 11세 때 아들을 보았다.(조선왕 중 최연소 기록) .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가 낳은 인성대군은 3살 때 죽었다.

장순왕후도 산후통으로 죽었다.

결국 예종의 2남1녀 후손들이 끊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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