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 제9대 성종 이야기        2014.04.20.일요일.맑음

성종; 이 혈(娎),조선 제 9대 세조의 큰아들 덕종의 둘째 아들.

생졸; 1457(세조 3)~1494(성종 25)

재위기간; 1469~1494

능;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릉(宣陵)


조부; 세조

조모; 정희왕후 윤씨

부; 의경세자(덕종德宗)

모; 소혜왕후(한확의 딸)

      월산대군(1445-1489)은 조선 전기의 왕족, 시인이다.

         이름은 정(婷)이다.

         덕종에 추존된 의경세자의 장남이었으나 월산군에 책봉되었다가 아버지 사후, 1470년 대군으로 진봉

         되었다. 아버지 의경세자가 1470년 의경왕에 추존되고 1475년 회간대왕에 추존되고 덕종의 묘호를

         받았지만, 그는 세자에 추존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북촌에다 별장을 지어놓고 그 곳에서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자연 속에 묻혀 일생을 보냈다.

         친조카인 중종의 계비장경왕후 윤씨의 친정아버지 유녀필은 그의 처제의 남편으로 동서간이 되는데,

         다시 윤여필의 딸 중 1명이 그의 서자 덕풍군 이이와 결혼하여 이중 겹사돈이 되었다.

 

         세조 유의 장손으로, 덕종에 추존된 의경세자 이장의 맏아들로 성종의 친형이며, 세조의 첫손주이자

         장손이다. 어릴 때에는 할아버지인 세조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며 문장에도 뛰어나 중국에까지

         그의 시가 알려졌다. 1457년 아버지 의경세자가 갑자기 사망하였으나 조부 세조에 의해 궁중에서

          양육되었다.

          1460년(세조 6) 정의 대부(正義大夫) 월산군(月山君)에 임명되고, 1462년 중의대부가 되었으며

          1466년 병조창판 박충선의 딸과 혼례를 올렸다.

          영순군 이부의 집에서 친영하였고, 부인 박씨는 상원군 부인에 봉작되었다가 뒤에 승평부부인으로

          개봉되었다. 예종 즉위 후 1466년(예종 즉위) 10월8일 현록대부(顯祿大夫)에 가자되었다.

           그해 11월 예종이 갑자기 죽자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배제당하고 그의 동생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였다. 한때 한성을 떠나 전라도 깊은 산 속 절에 들어가 숨어지내있기도 했다 한다.

           1473년 되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집 뒤쪽에 풍월정을 지었고, 경기도 고양군의 북촌에다 별장을

           지어놓고 그 곳에서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자연 속에 묻혀 일생을 보냈다.

           예종의 사후 장손인 자신 대신 동생인 자을산군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불평불만을 나타낼 것을 내다본 정희왕후의 지시로 그는 반발 무마용으로 특별히

           좌리공신 책록된다. 성종실록의 그의 졸기에 의하면 그후 한때 문소전 제조직과 종부시 제조직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한다.

            1476년 조선에 사신으로 온 명나라 호부시랑에게 시를 지어주었다.

            1483년 봄 정희왕후와 인수대비, 인혜왕대비가 함께 온양온천에 행차할 때 호종하여 다녀왔으며,

            이때 전주에 있는 태조의 영정에 참배하였다.

            그의 시들 중 일부는 명나라에도 소개되어 중국의 '전우산열조시집'에도 일부 수록되었다.

            1488년10월 부터 11월 어머니 인수대비의 병간호를 하다가 과로로 11월부터 2개월간 병석에

            누웠다가 1489년에 사망하였다.

      태안군주(여)

      잘산군(자산군;제9대 성종)

      삼촌;해양대군(제8대 예종)

      고모;숙의 공주

왕비 공혜왕후 한씨(영의정 한명회의 네째딸; 생졸 세조 2~1474 성종 5)

계비 정현왕후 윤씨(자순대비)

            성종의 계비인 자순대비는 영원부원군 평정공 윤호와 연안부부인 전씨의 딸로

            1462년에 태어나 1530년에 69세로 사망하였다.

            자순대비는 1473년 아버지가 병조 참지로 있을 당시 숙의로 뽑혀 입궁했고,

            1479년 중전윤씨(연산군의 어머니)의 폐위로 새로이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가 친정 아버지 윤호와 육촌 윤필상 등과 함께 폐비 윤씨 폐출 당시 17세였던 정현왕후가 윤씨를

            폐출하는 데 일조했다.

            진성대군(중종)과 여러 공주들을 낳았는데,공주들은 일찍 죽었다.1480년에 성종의 세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이후 폐비윤씨 소생 연산군은 그를 생모로 알고 자라다가,1493년 성종의 묘비명과

            행장을 쓸때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을 알게 되면서 갑자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학살하는 원인을

            제공했다.1506년 중종 반정때 반정의 주도 세력이 진성대군(중종)을 왕위에 세울 것을 주청하니

            이를 승낙하였다.중종 반정시 중종을 왕으로 세우는 것을 승낙한 인물로 유명하다.

            능은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선정릉 내에 위치한 선릉으로, 남편 성종과 동원이강의 형태로 같이

            묻혀있다.

        진성대군(성종의 둘째 아들;제11대 중종)

        순숙공주(요절)

        신숙공주(요절)

        3녀(요절)

        4녀(요절)

숙의 폐비 윤씨

       연산군(성종의 장남;10대 연산군)

영빈 김씨  무산군

귀인 정씨 

       안양군 봉안군(두 형제 연산군에 의해 죽음)

       정혜옹주(연산군에 의해 직위 폐함)

귀인 권씨  전성군

귀인 엄씨(엄소용) 공산옹주(연산군에 의해 직위 폐함)

숙의 하씨  계성군

숙의 홍씨  완원군 회산군 건성군 억양군 거명군 은천군 양원군 혜속옹주 정순옹주 정숙옹주

숙의 김씨  희숙옹주 경숙옹주 희정옹주

숙의 김씨  이성군 영산군 경순옹주

숙용 권씨  경희옹주

  

성종

       

성종은 세조의 큰아들인 덕종의 둘째아들이며,계비는 우의정 윤호의 딸 정현왕후다.

1461년(세조 7)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가 1468년 잘산군(乽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이해 세조가 죽고 예종이 19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자 세조의 즉위 때 공을 세운 신숙주·정인지·한명회 등의 훈신들이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정치적 지위가 급상승한 남이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에 따라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가운데, 1469년 예종이 죽자 병약한 형 월산군을 대신하여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7년간 정희대비(세조의 비)의 수렴청정을 받아 독자적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못했으며, 훈신세력이 모든 군국사무를 주도했다. 훈신세력은 성종이 즉위하던 해 가장 위협적인 정적이던 구성군 준(浚)(부;세종의 4남 임영대군 구(璆))를 1463년 구성군을 유배시킴으로써 권력을 더욱 안정시킬 수 있었다.

1476년(성종 7) 친정을 시작했으나 세조와 같은 전제권을 확립하지는 못했다.

이해 공혜왕후가 아들이 없이 죽자 윤기견의 딸 숙의윤씨를 왕비로 삼아 연산군을 얻었다.

그러나 윤씨의 투기가 매우 심해 왕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는 사건까지 일어나자 1479년 윤씨를 폐위하고

1482년 사사했다.

성종은 친정을 시작하면서 신진사림세력을 등용하여 훈신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사림세력은 성종대에 이르러 훈구세력을 비판하면서 향사례·향음주례 보급운동과 두 의례에 입각한 유항소 재건운동을 통해 기존의 훈구세력에게 장악된 향촌질서를 성리학적 향촌질서로 재편하고, 나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그들의 이상이었던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림세력의 정치적 지향은 성종의 왕권강화 노력과 많은 부분 일치했으므로, 성종대에는 김종직·김굉필·정여창·김일손·유호인 등의 사림이 정계에 진출하고 1488년 유향소가 부활됨에 따라 조선 중기 사림정치의 막을 열었다.
그러나 사림의 정계진출 및 급속한 성장은 훈구세력과의 필연적 마찰을 불러일으켜 연산군 때부터 시작된
4대 사화(무오사화(1498, 연산군 4)·갑자사화(1504, 연산군 10)·기묘사화(1519, 중종 14)·을사사화(1545, 명종 즉위)를 말한다로 이어졌으며 지방에서는 유향소의 지배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성종은 재위 기간 동안 숭유억불의 정책을 더욱 굳건히 펴 나갔다. 조선왕조 통치체제의 기본방향을 제시하는 '경국대전'은 세조 때 건국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의 원전과 속전, 그리고 그 뒤의 법령을 종합하여 편찬되기 시작하여 원래 예종 때 반포될 예정이었으나 예종의 죽음으로 보류되었다.

성종은 즉위 이후 '경국대전'의 편찬사업을 이어받아 1471, 1474년 2차례의 수정을 거쳐 1485년 이를 최종적으로 완성·반포했다.

 이어 이극증 등에게 명하여 1492년 당시 사회 실정에 비추어 〈경국대전〉과 불일치를 보이는 부분을 보완,<대전속록>을 편찬하게 했다. 이로써 '경국대전체제'라고 불리는 조선 일대의 통치이념과 국가체제가 완성되었다.

한편 성종은 불교를 통제하기 위해 1471년 간경도감을 폐지했다.

이어 1469년 사족(士族) 부녀가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고 1471년에는 도성 안에 있는 사찰을 도성 밖으로 철거했다.

1492년에는 도첩의 법을 중지시켰다. 이러한 억불정책으로 불교 및 사원세력은 세조대에 비해 위축되었다. 반면 유학을 장려하기 위해 1475년 존경각을 세워 왕실소장의 경서를 보관하여 열람하게 했으며 수차례에 걸쳐 성균관과 각도의 향교에 학전과 서적을 지급하고 유생들의 군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특히 1466년 겸예문관제도(兼藝文館制度)를 확충하여 사령(辭令)을 제찬(製撰)하는 고유한 임무에 더하여 경연관(經筵官)·고제연구(古制硏究)·편찬사업 등 옛 집현전의 기능까지 겸하게 했다.

1478년에는 단순한 장서(藏書) 기관에 불과하던 홍문관을 예문관의 집현전적인 기능을 편입시켜 명실상부한 학문연구기관으로 개편했다.

이밖에도 유학의 진흥과 깊은 관련을 가지는 편찬사업에도 힘써 〈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악학궤범〉·〈국조오례의〉 등을 간행했으며,

 1484년에는 갑진자(甲辰字) 30여 만 자를 주조하여 인쇄술을 발전시켰다.

조선의 수조권(收租權) 분급제도인 과전법은 1466년 현직관리에게만 과전을 지급하는 직전법으로 바뀌었다. 이에 관료들이 퇴직 후의 생활보장을 위해 현직에 있을 때 농민을 수탈하고 토지를 겸병하는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1470년 관수관급제를 실시했다. 그 내용은 국가가 농민으로부터 직접 조세를 거두어들인 다음 관리들에게 녹봉을 현물로 지급하는 것이었다. 관수관급제의 실시로 우리나라 토지제도의 한 축이 되었던 수조권적 토지지배가 소멸하게 된다. 한편 국방대책에도 힘을 기울여 윤필상(尹弼商)으로 하여금 1479년 압록강 이북의 건주야인(建州野人)의 본거지를 정벌하게 하고, 1491년에는 허종(許倧)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 이북의 우디거 부락을 소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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