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왕 제18대 현종 이야기   2019.03.13.수요일,

현종; 조선 제 18대 왕,효종의 맏아들

이름; 이연

생졸; 1641-1374,34세

재위기간; 1659-1674,15년

능;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숭릉(崇陵).

가계도

   명성왕후 김씨

     19대; 숙종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

 

재위 기간 중 양란을 겪으면서 흔들렸던 조선 왕조 지배 질서의 확립을 위해 선왕인 효종이 추진해오던

명분론적 북벌은 중단했으나,군비 강화에 힘썼으며 재정구조의 재건을 위해서 호구수의 증가와 농업의

발전,조세징수 체계의 확립에 노력했다.

즉위 직후 벌어졌던 예송 논쟁에서 서인의 주장을 물리치고 기년복을 채택함으로써 서인 정권이 무너지고

남인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여러 국가제도의 개선에 힘썼으며,강화도의 정족 산성에 새로이 사고를 마련해 역대 실록을 보관하게 했다.


1641년 인조19년,현종은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청의 볼모로 있을 때 심양에서 인선왕후 장씨 사이의

장자로 태어났다.

현종은 왕세손 책봉과 11세의 나이로 왕세자가 되었으며,

1659년 효종10년,효종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효종의 죽음과 함께 10년의 재위 기간 내내 이루고자 했던 북벌의 꿈도 물거품이 되었고,

북벌론을 주장했던 송시열 만이 여전히 북벌을 매개로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현종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송시열은 효종의 부름을 받고 입조했으며,그가 효종의 극진한 존경과 예우를 받은 것은 북벌 때문이었다.

그러나 효종의 기대와 달리 송시열의 북벌론은 오히려 효종의 북벌 의지를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가운데 효종이 죽고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송시열은 효종이 장자가 아니었음을 들어 현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까지 취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불거진 두 번의 예송(禮訟)은 현종의 위상을 대변하는 사건이자,

조선 후기의 권력 구도를 규정짓는 주요한 사건이였다.

 

현종은 김육의 아들인 김우명의 딸인 명성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1남3녀를 두었으며,

장자가 19대 왕 숙종이다.

송시열의 시대에 현종이 의지할 곳은 외척인 청풍 김씨 집안 밖에 없었다.

 

서인과 남인의 당쟁 속에서 무시된 왕의 권위 속에서 두번의 예송이 일어났다.

첫번째 기해예송으로 효종이 죽자 일어났다.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장렬왕후)의 상복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논쟁의 핵심이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효종이 인조의 적장자였다면 당연히 그 어머니가 3년복을 입어야 하지만,
효종이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중자복인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인들은 효종이 왕실의 종통을 이었으므로 적장자로 보아 3년복을 입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결국,이 문제는 단순한 상복 문제를 넘어 효종이 적통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는 효종은 물론이고 아들인 현종의 정통성마저 위협하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송시열은 4종설을 들어 1년복을 주장했다.

4종설이란 3년복을 입을 수 없는 4가지 이유를 말하는 것으로,

 1.적자로서 병 때문에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경우,

 2.서손이 뒤를 이었을 경우,

 3.서자가 뒤를 이었을 경우,

 4.적손이 뒤를 이었을 경우 그 부모는 1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송시열은 효종이 세 번째 이유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이는 효종과 그의 아들인 현종을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송시열의 태도가 그대로 반영된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효종에 대한 정통성 논란으로,

자칫 조정에 커다란 분란을 불러일으킬 것을 염려한 영의정 정태화는 서둘러 장자,차자 구별 없이 1년복을 입는다는 규정을 들어 기년복으로 확정했다.서인인 송시열 역시 동의했다.

그러나 1년 뒤인 1660년 현종1년3월,남인인 허목이 1년복이 잘못되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면서 논쟁에 다시 불이 붙었다. 허목은 장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장자로 삼을 수 있으므로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도 종통을 이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송시열이 4종설을 들먹이며 말한 서자는 중자(衆子)가 아니라 첩자(妾子)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효종에게 해당되지 않을 뿐 아니라 대를 이은 둘째 아들을 위해 1년복을 입는다는 규정은 찾아볼 수 없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에 송준길과 송시열이 다시 반박했다.

허목의 주장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지만 서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허목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윤선도의 상소가 올라오면서 예송은 학설 논쟁에서 정치 논쟁으로 번졌다.

윤선도는 상소에서 허목의 주장이 옳고 송시열의 주장이 틀리며,

송시열과 송준길이 효종의 덕은 있는 대로 다 받고 효종에게 각박한 까닭이 무엇이냐고 공격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상소가 받아 들여지는가 받아 들여지지 않는가는 왕의 권세가 든든한지 그렇지 않은지와 관계가 있고,그것으로 국운이 이어지고 이어지지 않음을 판단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러한 윤선도의 상소는 파란을 몰고 왔다.

서인들은 윤선도가 예론을 빙자해 상하를 이간질한다며 맹렬히 비난하고 그를 문책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윤선도의 상소문은 불태워지고 그는 삼수(三水)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현종은 내심 윤선도의 주장에 동조했으나 여론에 밀려 그를 처벌할 수 밖에 없었다.

서인들의 뜻대로 1년복으로 마무리되었으나 논란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예송은 중앙 정계에서만 논란이 된 것이 아니라 성균관과 지방 유생들에게까지 번져나갔다.

저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당파의 주장을 옹호하면서,

상대 당파를 비난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전국에서 끊임없이 올라왔다.

이는 조선 후기의 당쟁이 중앙의 벼슬아치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림에게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두번째 갑인예송으로 선왕의 정통성을 다시 세운 현종이다. 
1674년 현종15년 2월,효종비인 인선왕후 장씨(우의정 장유의 딸)가 죽었다.

이번에도 대왕대비인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었다.

즉,인선 왕후를 조대비의 장자부(長子婦)로 볼 것인가,중자부(衆子婦)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또다시
거론된 것이다.

그런데 예조에서는 처음엔 조대비의 상복을 1년복으로 정했다가 나중에 다시 대공복(9개월복)으로 고쳐

올렸다.이는 현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해예송 때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던 발언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그해 7월,영남 유생 도신징이 기해 예송 당시 조대비의 복제는 장자복이었고,

따라서 이번에도 장부복인 1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현종은 이 상소를 가지고 있다가 대신들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에게 내보이며 조대비의 복제를 9개월복

으로 바꾼 까닭을 따져 물었다.

또한 김석주에게 기해년의 복제가 어디에서 유례된 것인지 조목조목 따져서 보고하도록 명했다.

김석주는 현종의 외척인 청풍 김씨의 일원으로,같은 서인이지만 송시열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김석주는 현종의 명에 따라 '의례주소'를 해설해 올리면서,

기해년에 의견이 갈렸던 '서자'의 해석을 허목의 의견과 같이 '첩자'로 규정했다.

이는 송시열의 주장을 우회적으로 비난하는 것이었다.

결국 현종은 이를 근거로 인선왕후 상에 대한 조대비의 복제를 1년복으로 다시 바꾸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가시의 소에 이르기를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가 낳은 둘째 아들을 취해 세우고 이를 역시 장자라 한다." 했으니,경들이 오늘날 종묘의 일을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지고 인증한 것은, 종묘의 일을 주장하지

못하는 자는 산 사람을 일컫는 것이요, 세워서 역시 장자라고 부른다는 것은 죽은 자를 일컬음이니,

경들이 이와 같은 이치에 맞지 않은 어그러진 말을 가지고 예율을 정하고,

선왕을 가리켜 '체이부정(적자이면서 장자가 아닌 경우)'이라고 지목하니,

임금에게 박하고 어느 누구에게 후하게 한단 말인가. 내 실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니 결단코 막중한 예법을 자기 당파에 덩달아 붙은 의논으로써 제도를 단정할 수 없으니, 당초에 마련한 국가의 법전에 있는 기년

제도에 의해서 시행하도록 하라.

기해예송 때 서인들에게 밀려 달성하지 못했던 효종과 자신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고자 했다.

이틀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열린 빈청 회의에서

"중자가 승통(承統)하면 장자가 된다."는 결의를 얻어 내고자 했던 것도 이러한 의도 때문이었다.

현종은 이러한 조항을 '경국대전'에 새로 보완해 넣으려고까지 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런 가운데 서인의 반발이 계속되자,

현종은 김석주를 앞세워 서인 세력을 몰아내고 남인 세력을 끌어들였다.
이것이 서인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현종의 조치는 숙종 때에 펼쳐진 환국으로 이어지며 왕권을 강화할 빌미로 작용했다.

현종은 그해 8월에 갑작스럽게 병세가 악화되어 서거했다.

향년 34세, 재위 기간은 15년이었다.

예송에 가려지기는 했어도 현종은 재위하는 동안 양란으로 혼란해진 조선의 지배 체제를 재확립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비록 효종의 북벌 정책은 포기했지만 군비 강화에는 여전히 힘썼다.

조세징수 체계의 확립에도 노력을 기울였으며,대동법을 호남 지방으로 확대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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