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책략            2019.08.15.목요일,흐림

1880년(고종 17) 공개된 황준헌의 조선 책략은  

개항기 한국이 당면한 국제적 지위를 논하고 그 대외책을 시사한 외교의견서.

원명은 '사의조선책략' 1책.


러시아의 남진정책에 대비하기 위해 조선·일본·청국이 펼쳐야 할 외교정책을 다룬 책으로, 초대 주일 중국(청) 공사 하여장()의 참사관으로 있던 황준헌(1848~1905)이 1880년경에 썼다.

1880년(고종 17년) 8월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 갔을 때 황준헌이 그를 보자고 청해 이 책을 건넸다. 이 책의 내용은 ‘친중(), 결일(), 연미()’, 곧 중국을 더욱 가까이 섬기고 일본 미국과 한편이 돼 연대함으로써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황준헌은 책 서두에서 “조선은 실로 아시아의 요충지여서, 형세가 (외세에 의해) 반드시 다투게 마련이며, 조선이 위태로우면 중동()의 형세도 날로 위급해질 것”이라고 밝히면서, 미국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긍정 평가하였다.

“선왕(워싱턴)의 유훈을 지켜 예의로 나라를 세우고, 남의 토지를 탐내지 않고, 남의 인민을 탐내지 않고, 굳이 남의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 남방에 하와이란 나라가 있어 합중국에 병합할 뜻을 보였으나 저들(미국)이 거절하였다.”

『조선책략』은 황준헌이 작성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실은 하여장의 구상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었다. 청은 이리(: 중국 위구르·신장 지역) 문제로 러시아와의 전쟁이 현실로 다가서자 일본과 손을 잡고 조선을 이용하여 러시아에 대항하고자 했다. 또 속국으로 여기는 조선에 미국과 일본 등을 끌어들이면 미국, 일본 등이 중국 편에서 함께 간섭해 러시아가 조선을 먹는 걸 막을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었다.

1880년 9월에 귀국한 김홍집은 『조선책략』을 고종에게 바쳤으며, 『조선책략』은 필사에 의한 전국 유포로 널리 읽히게 되었다. 그러나 영남 유생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이만손을 필두로 한 이들은 1881년 3월 25일(음력 2월 26일) 상주에서 대회를 가진 뒤 “임금을 그릇된 길로 인도한” 김홍집을 탄핵하는 만인소를 지어 올렸다.

전통적인 위정척사론()을 내세운 만인소는 『조선책략』에 대해 “저절로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쓸개가 흔들리며 통곡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감정을 토로한 뒤 그 내용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요약하면 ▲ 조선은 이미 200년 전부터 중국의 속방으로서 그 직분에 충실해왔는데, 새삼 중국과 친()하라고 한 것은 공연히 중국을 자극하는 일이며, ▲ 이미 우리의 지형지세를 잘 파악하고 있는데다 도대체 믿을 수 없는 일본과 결탁하는 일은 위험하며, ▲ 미지()의 미국을 일부러 끌어들였다가 그들의 꾐과 요구에 말려 감당하기 어려운 국면에 처할 수 있으며, ▲ 러시아의 경우 쓸데없이 그들을 자극하여 침범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므로, 황준헌이 말한 것은 백해()만 있지 일리()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서학(西)을 배우고 상공업에 힘을 다하라는 『조선책략』의 지적에 대해서는 농공업을 경제의 바탕으로 삼아온 선대의 훌륭한 법도를 해치는 것이며, 사교(: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음흉한 속셈이 깔려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책략』은 척사파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조선 정부가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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