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태억          2019.07.21.일요일,비

조태억; 소론으로 최석정의 문인이다.

생졸; 1675(숙종1년)-1728(영조4년)

본관; 양주

호; 겸재,태록당

조부; 형조판서 조계원

부; 이조참의 조가석

종제; 조태구,조태채


조태억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소론에 속하여 신임사화에 참여했다.

1702년(숙종 28)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지평·정언·북평사·수찬·부교리 등을 지냈다.

1707년 문과중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문학·교리를 지낸 후 이조정랑을 거쳐 우부승지에 올랐다.

1708녀 철원부사로 나갔다가
1710년 대사성에 올라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1712년 왜인의 국서가 격식에 어긋 났다는 이유로 관작을 빼앗기고 한양 밖으로 추방 당하는 문외출송의

   형벌을 받았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714년 다시 기용되어 이듬해 공조·예조의 참의를 지냈으며

1719년 장례원 판결사가 되었다.

1721년(경종1년), 경상도 관찰사를 거쳐 호조 참판으로 있을 때 소론인 조태구,최석항,이광좌 등과 함께

   연잉군(뒤의 영조)의 세자 책봉과 대리청정을 반대하여 철회시켰으며,

   김일경 등 소론의 과격파들과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후에는 대사성,세제우부빈

   객 등을 지냈다.

이어 부제학·형조판서·지경연사 등을 거쳐

1722년 대제학이 되었고,

1724년 호조판서에 올랐다.

1725년(영조1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노론 민진원 등의 논척으로 삭직되었다.

1727년(영조4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좌의정에 복직, 이듬해 병으로 사직하고 영돈녕부사로 옮겼다.

1728년(영조5년)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그는 소론의 과격파가 주도한 신임사화(1721년(경종1년)-1722(경종2년)년에 걸쳐 일어난 사류들의 참변)  이후 소론이 정권을 잡을 때 이에 참여하여 중용되었으나 온건파에 속했다. 

1755년(영조31년), 나주 괘서 사건으로 관작이 추탈되었다.

나주 괘서 사건은 나주 객사에 영조와 노론을 비방하는 내용의 괘서가 내걸렸다.

 영조는 주모자와 연루자 60여 명을 직접 신문하여 괘서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였다.

 이후 괘서를 붙인 주모자가 잡히고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면서,

 나주 괘서 사건은 소론이 몰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영조의 세제 책봉 및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작용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새로운 임금의 즉위를 널리 알리는 반교문을 지었고,

병조판서가 되었다가 우의정에 올랐다.같은 날 호위대장을 제수받았으며 대제학을 겸했다.

영조가 즉위하자 김일경 등 소론 과격파의 국문 때 책임을 맡게 되자,

위관의 직책을 어려워하여 왕의 친국을 청하기도 했다.

영조 초기 소론의 지도자로서 이광좌,이태좌 등과 함께 소론 온건파 완론을 이끌었다.


소론의 지도자로 그는 이인좌의 난(1728년3월15일)에 반대하였으나 노론4대신(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에 저항한 소론5대신의 한사람이라는 이유로  1776년 관작이 추탈되었다.

1907년(융희 1년) 이후 이완용의 여러번의 복권 상소로 1908년 복권되었다.

 

초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새나 짐승 그림을 잘 그렸다.

저서로 〈겸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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