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석영과 종두법            2019.08.15.목요일,맑음

지석영이 1879년(고종16년),지석영이 종두법을 위시해서 일본인 군의로부터 서양 의학의 지도를 받은 것은 매우 예외적인 일인 동시에 특기할 만하다.

병자수호조약(강화조약)으로 국교가 열린 일본에 제1차 수호사 김배수의 수행원으로 박영선은 일본 동경, 순천당 의원 의사 오타츠 토미조에게 우두법을 배우고 돌아왔다.

그는 당시 그가 가지고 온 '종두귀감'과 함께 지석영에게 우두종법을 전수하였다.

그러나 지석영은 이 법을 응용하지 못하고 1879년(고종16년) 부산 일본 제생의원에 가서 2개월간 다시

배운 뒤 그해 12월 하순 서울로 돌아오는 도중 부인의 고향인 충주군 덕산면에서 두 살된 처남을 비롯하여 어린이 40여 명에게 종두를 실시하였다.

1880년(고종17년)5월,그는 두묘 제조를 배우기 위해 제2차 수신사 김홍집 일행을 수행하여 일본으로 가서 일본 정부 내무부 소속 위생국 우두 종계소장에게 종두법, 두묘 제조 및 저장법 등을 배우고 두묘를 얻어

돌아오는 도중 같은 해 11월에 동지들과 같이 일본 공사관 부속 군의로부터 서양 의학의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한말 정치적 변혁기에 활동한 지석영의 생애에는 남다른 파란이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종두술을 들여왔다고 하여 친일파로 몰려 체포령이 내려지고 종두장이 난민에 의해 방화되는가 하면 일본과 손잡은 개화당 박영교와 함께 도당을 만든다 하여 전라도로 유배당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고종 19년(1882) 전라도 어사 박영효의 청으로 전주 성내에 우리나라 처음으로 우두국을 신설, 공식으로 종두를 실시하고 종두법을 가르쳤으며,

1885년(고종22년,) 우리나라 사람의 손으로 쓴 최초의 종두서 '우두신설'을 저술하였다.

1892년(고종29년), 모든 혐의가 풀리어 귀양살이에서 서울로 돌아온 지석영은 서울 교동에서 우두보영당을 설립하고 아이들에게 종두를 시술했다.

그는 한성부윤 등 행정의 수장으로 대한제국의 국사에 종사하는 한편 의학 교육에 남달리 관심이 많아 정부에 의학교 설립의 필요성을 요청하여 이에 따라 대한의원 의육부의 전신인 ‘의학교’가 광무 3년(1899) 설치되었고, 그는 이 곳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의학교육이 1907년 세워진 대한의원으로 넘어간 뒤에는 대한의원의 학감을 지냈다가 한일합방과 더불어 자리를 물러나 다시는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또한 국어 교육에도 일가견이 있어 고종황제에게 이에 대한 진언을 했으며 그 밖의 정책상의 건의를 담은 상소문을 많이 올렸다.

현재 대한의원 건물 중 속칭 ‘시계탑’ 건물 앞에는 서울대학교 병원과 동문들이 거출한 기금으로 지석영 동상이 세워져 있다. 지석영은 정부에서 정한 ‘이달의 문화인물’(1993년 7월)로 선정되었고, 대한의사학회는 서울대학교 의대와 병원에서 그의 업적을 기리는 학술 심포지엄을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이렇게 새로운 의술을 배우고자 했던 한 청년의 꿈은 그 실현이 이루어지기까지 숱한 오해와 박해를 거쳐야 했고, 종두술의 도입은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땅에서의 서양의학교육의 길을 터놓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종두술 자체의 도입과정만 본다면 종두술을 확실히 이 땅에 뿌리 내리게 한 지석영이 있기까지 다산 정약용, 초정 박제가와 경기도 포천의 이름 모를 지방관리가 있었고, 지석영과 거의 같은 시기, 즉 고종 18년(1881)에 청국 길림성 우두관을 통해 도입하여 종두를 실시한 이유현과 연대는 불확실하나 청인으로부터 종두법을 학습한 박득하, 최창진, 이재하 등이 있었음을 명기할 필요가 있다.

나라를 잃기 전까지의 시기에 일인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술은 대한제국 광무 11년(1907년) 설립된 대한의원에서 위력을 최대한으로 과시하게 된다.

이에 관해서는 관립 병원과 의학교에 관한 부분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다만 여기서 언급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당시 한국인으로서 일본에 가서 의학공부를 하고 돌아와 우리나라 의학교에서 교육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 한 사람은 김익남으로 광무 3년(1899) 일본 동경 자혜의원 의학교에서 의학 전과 졸업증을 받고 돌아와 광무 4년(1900)의 학교 교관을 지낸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안상호로서 광무 6년 같은 자혜의원의 학교를 졸업, 광무 8년 의학교 교관이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일본에 들어온 서양의학을 직수입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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