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당 창당              2019.12.18.수요일,맑음

진보당은 1956년11월10일 조봉암을 중심으로 박기출,김달호 등이 결성된한 정당으로.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민주사회주의를 지향하였으나,

15개월만에 ‘진보당 사건’으로 등록이 취소되어 1958년2월25일 해체되었다.


조봉암은 일제 강점기 조선 공산당 당원으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조선 공산당 창당 보고를 하기도 했다.

1946년2월,

해방 직후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과 결별을 선언하고 독자적인 정치 노선을 모색하였다.

1946년7월,

좌우합작 위원회가 구성되고 10월,좌우합작 7원칙이 발표되자 이를 지지하였다.

1947년2월1일,

조봉암은 '화요파' 동지였던 김찬,배성룡 등과 함께'조선민족독립전선결성준비임시위원회'를 구성하여 “좌우익 정객들의 반민족적 편향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 독립을 완수하기 위하여 혁명적 애국자를 중심으로 민족의 통일 전선을 결성코자”하였다.

1948년,

5·10선거에서 제헌의원으로 당선되고 이승만 정권때 초대 농림부장관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51년10월,

조봉암은 일제 때 만들어져 해방 이후에도 존속하였던 농회조직을 바탕으로 한국농민회의를 창립하고 의장에 선출된다.

그는 이외에도 그동안 접촉해온 중도파나 혁신계,족청계와 노동 조합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자유사회당’이란 비밀 서클을 조직하였다.

1951년12월,

이승만은 이영근을 비롯한 50여 명을 연행하는 ‘대남 간첩단사건’을 발표하여 조봉암의 신당조직 중심부에 대한 탄압을 가하였다.

1952년8월5일,

2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나는 계급독재 사상을 배격한다. 공산당 독재도 자본가와 부패 분자의 독재도 이를 강고히 반대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려한다.”는 정강을 내걸고 11.3%의 득표율을 얻었다.

그는 선거에서 패배하였지만 이승만에 대항한 정치인으로 부각되었다.

1955년9월1일,

한국전쟁이 끝난지도 2년이 되었다.

조봉암,서상일,장건상,정화암,최익환,윤길중 등 40여 명의 진보적 민족주의자와 혁신계 인사들이 새로운 혁신 정당을 모색하기 위한 간담회인 ‘광릉 회합’을 열어 진보 정당을 만들기

위한 합의를 하였다.

1955년10월24일,

진보당 결성 제1차 추진준비 위원회가 개최되고,

12월2일,조봉암,서상일,박기출,이동화,김성숙,박용희,신숙,신백우,양운산,장지필,정구삼,

정인태 등 12명의 발기인 명의로 ‘강령초안’이 발표되었다.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의 신익희 대통령 후보가 급서하면서 자연스럽게 야당의

대통령 후보는 조봉암으로 단일화되었다.


조봉암은 전체 유효 투표자 수의 30%인 216만표를 얻어 이를 바탕으로 

11월10일, ‘제3의 길’을 표명하면서 진보당을 창당하였다.

1956년12월9일,

진보당은 경남도당 결성 대회를 시작으로

1957년4월15일,

서울시당 결당대회,1957년7월18일,전남 도당 결성대회,1957년 10월 전북도당 결성대회를 여는 등 지방당 조직을 확대하여 전국적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1958년1월13일,

서울시 경찰국은 민주 정부를 변란할 목적하에 진보당을 창당 조직하고 평화 통일을 선전

하는 등 북한의 무력재침의 선전,평화 통일 공작에 호응,친소 용공정책으로 적과 합세하여 정부 전복을 기도하였다는 등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간부들을

검거하였다.

4대 총선을 5개월 앞두고 ‘진보당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5월에 실시될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진보앋은 최소한의 독자적 교섭 단체를 구성 할 수 있는 20석 이상의 의석 확보를 목표로 선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진보당 사건’의 발생으로 진보당 중앙당 사무실의 수색, 당원 명부 등 각종 서류 압수 등

진보당에 대한 전면적인 수사 착수로 당 활동은 마비되었고,

정부는 2월 5일 진보당의 등록을 취소하였다.

진보당은 서울 고등법원에 진보당 등록 취소의 행정처분취소신청을 내기도 하였으나,

대법원의 최종 판결에서 기각되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