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 유등 축제  

위치; 경남 진주시 진주성,남강 일원(망경동 남강 둔치 특설 무대-촉석루 건너편)

기간; 2014.10.1/수~10.12/일(12일간)

소개;

  진주 남강 유등 축제에 마련된 모든 등에 처음으로 불을 밝히는 행사로 

  수만명의 지역민과 관광객이 하나되어 화려한 불꽃놀이와 함께 남강의 유등은 일제히 불을 밝힌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불꽃이 하늘을 가르고 일순간에 남강의 유등이 불을 밝히는 감동을 맛 볼수 있다.

  미국,일본,러시아,인도,태국,독일,프랑스,싱가포르,그리스,터키,이집트,덴마크,이란,스페인 등

  여러나라를 상징하는 등이 한국 전통 등과 함께 남강에 이국적인 풍광으로 장식된다.

  세계 각국의 풍물을 상징하는 등과 한국의 전통 등을 한  장소에서 관람 할 수가 있다.

  진주 남강에 유등을 띄우는 유등놀이는 임진왜란의  진주성 전투에서 기원한다.

  1592년10월 김시민 장군이 3.800명의 수성군으로 진주성을 침공한 2만여명의 왜군을 크게 물리친 일은

  임진왜란의 3대 대첩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 진주성에서 성밖의 의병등 지원군과 연락하기 위한 군사 신호로 풍등을 올리기도 했고,

  햇불과 함께 남강에 햇불을 띄워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는 군사 전술로 쓰였으며,

  멀리 두고온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수단으로 쓰였다.

  이듬해 1593년 6월에 진주성은 10만 왜군에 점령 당했다. 

  현재까지 이 일을 계사순의(癸巳殉義)로 기리고 있다. 

  이후로 당시 순절한 7만 민.관.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유등을 띄워다.

 이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오늘의 유등축제로 자리 잡은 것이다.

탐방일시; 2014.10.09.목요일. 맑음

탐방시간; 15;00~20;00  (5시간)

가는 길;

  대구 성서 홈플러스-성서IC-남대구IC-옥포JC-남해 고속도로 칠원JC-문산IC-상평공단(진주)

 -시외버스 터미널(산청)-터미널(진양호.진주성)-진주성 주차장 (촉석문 앞) 

   (네비;경남 진주시 본성동 478-1번지-124km,1시간40분 소요,통행료5.900원)

 

 

이미지 보기

진주성 공북문에 들어서면

 

입구에 매표소에서 매표 후

 

맨처음 만나는 이정표.

우측 북장대(220m) 방향으로 향한다.

 

넒찍한 공터를 지나

 

맨처음 김시민 장군 동상을 만나고

 

넒은 잔듸 숲 쉼터 공간을 지나

 

다시 만난 이정표에서

영남포정사/창령사,호국사/비석군/북장대,포루 방향으로 가면

 

영남포정사 문루를 지나

 

진주성 비석군을 지나면

 

머슴이 과부가 된 마을의 군수딸을 사모하다 이루지못하고 죽었다는 전설의 용다리 전설 안내판을 지나면

 

북장대에 도착한다.

 

북장대 앞 경절사(擎節祠)와 

고려의 문신 하공진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향례를 받드는 사당이다.

하공진의 출생은 언제인지 알려지지 않았고,

1009년 목종 12년, 중랑장의 신분으로 강조의 정변에 참가하여,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즉위시키는 데 공을 세워 상서좌사랑중이 되었다.

 요나라(거란)이 쳐들어 오자 남쪽으로 피난 중이던 현종을 뒤따라가 양주에서 거란군의 철수 교섭을 자청하였다.

그는 현종의 사절로 거란 성종을 만나서 스스로 볼모가 되는 조건으로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사후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에 추증 되었고, 영정을 기린각에 모셨다.

현재 경절사에 배향 되어 있다.

 

 경절사 앞에는 하공진의 사적비가 서 있고 맞은 편으로 경절사가 있다.

경절사 오른 편으로는 탑림이 있다.

 

문익점의 장인으로 실질적으로 면화를 재배했던 정천익을 모신  청계서원이다.

 

경절사와 청계서원을 빠져나와

 

바라본 영남포정사 모습이다.

 

청계서원 정문.

 

 

 

 

 

 

 

 

창렬사(晋州 彰烈祠)는1593년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순국 선인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경상도 관찰사 정사호가 건립하여 1607년(선조 40년) 사액을 받은 곳이다.

1983년7월20일,경남 문화재 자료 제5호 창열사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12월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후에 1868년 (고종5년),흥선대원군의 사원 철폐령으로 김시민 장군을 모신 충민사가 철폐되자 이 곳에 모시게 된다.

창열사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셔 두었고,

진주목사 서예원,창의사 김천일과 충청도 병마사 황진, 경상우도 병마사 최경회 등의

임진왜란 순국 선열 39인의 신위를 모시고  매년 음력 3월 초정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창령사를 지나 불교 조계종 호국사에 도착한다.

 

월영산 호국사로 들어가

 

대웅전 들을 둘러 본 후 

 

성곽을 따라 돌계단을 오른다

 

돌게단을 오르다 뒤돌아본 호국사 모습이다.

서장대로 가는 길이다.

 

서장대 서장대(晋州城 西將臺)는 진주성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장대이다.

1983년 7월 20일,경남 문화재 자료 제6호 서장대으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 12월 20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장대는 진주성 서문에 속하는 곳으로 지휘하는 사람이 올라서서 명령하는 대를 가리킨다.

'여지도서'에 보면 회룡루로 나오며, 

지금의 건물은 허물어진 것을 1934년 서상필씨가 새롭게 고쳐지은 것으로 목조 기와집이다.

 

서장대에서 보는 남강과

천수교,남강 위에 띄어 놓은 유등이 보이고,

평거동의 석갑산(170m)이 보인다.

 

 

 

 

 

 

 

 

 

 

 

 

성곽의 많은 인파.

 

성곽에서 보는 진주교와 진주교 뒷편으로 보이는 선학산(137.4m)이 보이며

 

성곽 아래 남강에는 강건너고자 하면 음악 분수대에서 매표하는 부교가 보인다.

 

남강 건너 세계 풍물과 한국등을 전시한 강변과 유등.

 

천수교와 석갑산이 조망된다.

 

 

 

 

 

 

촉석류에 도착한다.

 

 

개방시간 안내판

 

 

촉석루 현판

 

의기사(晋州 義妓祠)는 논개의 영정과 위폐를 모신 사당이다. 

촉석루 입구에서 뒷쪽으로, 정면에서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다.

1983년7월20일,경남 문화재 자료 제7호 의기사로 지정되었다가, 2018년12월20일,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의기사는 조선조 선조 26년(1593)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의기 논개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인조 7년(1629) 진주의 선비들은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전각하였고,

경종 2년(1722)에는 그 위쪽에 '의암사적비''를 세웠다.

영조 16년(1740) 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왕의 윤허를 받아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이후 세 차례의 중수와 중건이 있었다.

지금의 건물은 1956년 의기 창렬회에서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하였다.

 

논개 사적비가 있는 '의기 논개 지문' 현판이 보이는 암반 위.

부표와 진주교,선학산이 조망된다.

 

노개 사적비가 위치한 '의기 논개지문' 현판과 안내판이다.

진주 의암사적비(晉州 義巖事蹟碑)는 조선 시대의 사적비로 2000년1월 31일,경남 유형 문화재 제353호로 지정 되었으며,

선조 26년(1593년)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관군이 순절하자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논개의 사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진주의 사민(士民)들은 명암 정식(明庵 鄭拭:1683∼1746년)이 지은 비문으로 경종 2년(1722)에 세웠다.

영조 16년(1740년) ,병사 남덕하(南德夏:1688∼1742)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의암사적비'에는 비각을 건립하여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이라는 현판을 게시하였다.

이 비는 아래의 의암(義巖, 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과 마주하고 있어 의기 논개의 순국정신을 한층 더 흠모케 하고 있다.

이 비의 비문에는

'그 바위 홀로 섰고, 그 여인 우뚝 섰네. 여인은 이 바위가 아닌들 어찌 죽을 곳을 찾았고,

바위는 이 여인이 아닌들 어찌 의로운 소리 들으랴.

남강의 높은 바위, 꽃다운 그 이름 만고에 전해지리”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암반에서 보는 남강 

 

촉석루 성곽과

 

상류로 바라보면 부표와 진주교,그리고 선학이 보인다.

 

 

하류 방향으로 보면 천수교와 석갑산이 보이고

 

 

남강변에는 논개가 떨어져 죽었다는 남강의암이 위치하고 있다.

진주 시내를 가로지르는 남강 변에는 강을 뒤로 하여 진주성이 있으며, 

논개가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안고 빠져죽은 의암으로,

남강 다리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교각마다 논개의 가락지를 상징하는 두 개의 고리가 있다.

1593년,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지휘대인 진주 촉석루도 일본군과 끝까지 항전을 하다

김천일,최경회 등이 분루를 삼키고  백제의 낙화암 처럼 수많은 순국열사들이 몸을 던진 곳이다.

 

촉석루로 되돌아와 촉석문으로 향하는데

우측으로 바라보면 남강을 건너는 부표가 보이고

 

촉석문을 지나

 

강변 아래 부표 입구를 지나

 

 

진주교가 보이는 방향으로 가면

 

진주교 입구에 도착하여 가락지 모양을 한 진주교를 건너다

 

남강을 바라보면 남강을 건너는 부표와 유등이 보이고

 

다리가 끝날때 쯤이면 강변에 유등축제를 알리는 탑이 보인다.

탑이 보이는 강변으로  내려간다.

 

다리 끝의 도로 위 탑 아래를 지나

 

진주교 아래를 지나 우측으로 강변으로 내려가면

 

화려한 등으로 만들어진 터널을 지나

 

 

 

부표 건너편 촉석루가 보이는 강변에서

 

부표 입구를 지나

 

건너편 촉석루가 보이는 강변을 지나

 

부표 건너 진주교를 바라보면서

 

삼점들이 즐비한 강변을 따라가면

 

연등이 보이는 강변길이다.

 

특별한 악기를 들고 부르는 남미의 악사.

 

어느듯 어둠이 깔리면서 남강의 유등은 서서히 불을 밝히기 시작한다.

 

 

 

 

각종  모양의 연등이다.

 

 

 

 

 

 

 

 

 

 

 

 

 

 

 

 

 

 

 

 

 

 

 

 

■ 진양호

진주 진양호(晉陽湖)는 1970년7월에 완성된 낙동강 유역 최초의 다목적댐인 남강댐의 건설로 형성된 호수이며, 

경남 진주시의 남가와 덕천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진주시의 주요 식수원이다.

호수의 이름은 진주시의 옛 이름인 '진양(晉陽)'에서 따왔다.

콘크리트 중력댐인 진양호에는 남해 사천만으로 흐르는 가화천으로 난 수문이 있다.

1796년(정조 20년)음력5월8일,정조실록에는 장재곤(張載坤)이라는 사람이 남강 물을 사천만으로 절하해

홍수를 방지하여 농토를 확보할 것을 건의한 내용이 있으나 허황된 것이라 여겨 받아 들이지 않고,

오히려 장난성 상소를 올리는 자를 벌한다고 공고한 기록이 있다.

이후 남강물을 사천만으로 절하하자는 주장은 구한말에 다시 제기되었다.

영남춘추에 '남강 홍수를 방지함에는 일거양득의 좋은 방법이 있으니 사천만으로 절하(切下)하는 것이다.

이는 치수와 8000정보의 비옥한 토지를 얻게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방수로를 포함한 진양호 공사를 착공했다가 중단했고,

1949년에 착공했다가 한국전쟁으로 중단한 뒤 1962년에 착공하여 1969년에 준공하였고,

1989년에 보강공사에 착수해 1999년에 다목적댐으로 준공되었다.

 

 

진양호 호반 전망대

 

진양호 공원에 위치한 고(古) 남인수 동상

 남인수(南仁樹;1918년10월18일 생~1962년6월26일 졸)는 경남 진주 출신의 한국의 가수다. 

원래 이름은 최창수 (崔昌洙)였으나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진주 강씨 문중에 들어가면서 강문수로 바뀌었다.

남인수는 가수로 데뷔 하면서 작사가 강사랑이 지어준 예명이다.

1936년 <눈물의 해협>으로 가요계에 데뷔 하였고,

대표곡 1938년〈애수의 소야곡>이 히트를 기록한 이후 약 20여 년간  "가요 황제"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대중적인 최고의 인기를 얻었으며

<무너진 사랑탑,<물방아 사랑>,〈감격 시대〉등 약 1천곡 가까운 노래를 불렀고,

대개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인생의 애달픔, 유랑의 슬픔 등을 그린 동료 가수 이난영과의 로맨스가 유명하다.

이난영은 원래 작곡가 김해송의 부인이었으나 한국 전쟁 때 남편이 실종되면서

남인수의 도움으로 김해송이 운영하던 악단을 운영했다.

1962 남인수가 폐결핵으로 사망할 때까지도 이난영이 간호해 주었다.

 

노을 공원의 해시계.

 

해시계 좌측으로 동상

 

진양호 입석

 

진양호에서 보는 

 

조각품

 

조각품 옆 산길로 가는 계단 입구

 

 

 

전망대에서 보는 진양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