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장군과 이성계           작성일자;2007.080.08.수요일,맑음

 

최영과 이성계는 고려 말기 신흥 무인들을 대표하는 양대 산맥이다.

고려 국경을 침범해오던 왜구와 북방 민족들을 정벌해 고려의 수호신이라고 불리기까지 한 전설적인

명장들이다.

그러나,최영은 고려의 마지막 명장이라는 무인으로서는 최고의 영예 타이틀로 불리는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 대해서는 '조국을 배반한 변절자'라는 악평이 뒤따른다.

최영과 이성계는 전장에 함께 출전하며 우애가 깊은 전우였다.

이성계는 최영의 후배였지만 최영은 이성계를 제일 아꼈고,이성계는 최영을 제일 따랐다.


고려 말기는 국내외적으로 격동의 시대였다.

한 세기가 넘도록 고려를 지배하던 원나라가 한족들의 반란과 귀족들의 분열로 무너지고 있었고,

남쪽에는 명나라가 등장해 원나라와 대립하고 있었다.

이런 국제정세에 따라 원 간섭기 동안 원나라를 등에 업고 권세를 휘두르던 고려의 권문세족들의

위세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영향력이 약화된 시점에 반원 개혁정책을 펼쳐 신진사대부 등의 반(反) 문벌 인사들을

대거 양성해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했다.

원나라의 강력한 지배 아래 숨을 죽이던 중국과 만주의 수많은 북방민족들이 원나라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궐기하기 시작했고,

밀려난 홍건적 등의 반란군들도 합세해  고려의 국경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고려 후기 충정왕 시대부터 급증하기 시작한 왜구들도 고려 남부의 해안가에 출몰해 내륙으로 진출하기

까지 하는 등 고려는 개국이래 사상 최악의 외침을 받기 시작했다.

당시 고려의 국력은 약해질 때로 약해져있었고 전국 각지에서 출몰하는 외적들은 출몰할 때마다

고려 영토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가 고려는 점차 황폐화되었다.

 

최영과 이성계는 근본부터 다른 점이 너무 많다.

최영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운 철원 최씨로 최영의 5대조 최유청이 예종 때 집현전 대학사가 되면서
유력 가문으로 성장했고 이후 그의 집안은 승승장구해 고려 말기 대표적인 문벌귀족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최영은 우수한 집안 배경과 자신의 출중한 능력을 인정받아,
젊은 시절부터 무관 생활을 하며 양광도 도순문사 휘하에서 왜구를 토벌하며 경력을 쌓고
1352년 공민왕1년,
공민왕이 원나라 불모 생활을 할 때,
공민왕을 보좌한 공으로 총애를 업고 왕권을 위협하며 안하무인의 권력을 휘두르다 난을 일으킨
조일신을 안우,최원 등과 함께 처단해 정사품의 호군직으로 임명돼면서 본격적인 출세 가도를
걷기 시작했다.
이후 최영은 공민왕과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고려 국경을 침범한 장사성의 난군을 막아내고,
명나라와 원나라가 대립하는 정세를 기회로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과 함께 쌍성총관부를 공격해
고려의 옛 영토를 수복하였으며,
홍건적의 난으로 고려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반란을 일으킨 김용을 처단하는 등 안팎으로
고려의 안위를 지켜내며 명실상부한 고려의 충신으로 자리 잡았다.
신돈이 정권을 잡았을 때 모함에 빠져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공민왕의 무한한 총애를 받으며 최영은 왜구를 토벌하고 제주도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그가 처단한 외적의 숫자만큼 최영의 권세와 명성도 점점 높아져갔다.

최영의 권력도 시대가 바뀔 때마다 계속 불어나면서 우왕이 장성했을 당시에는

이성계와 함께 이인임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문하시중으로 임명된 후

우왕에게 딸을 시집 보내 왕의 장인으로써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된다.

이성계는 고려의 변방 중 변방인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나 쌍성총관부 소속 여진인들을 통솔하는

직책인 천호 관직의 아버지 이자춘 밑에서 여진족과 활발히 교류하며 청년기를 보냈고

아버지 이자춘이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는데 기여해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되면서

쌍성총관부 공격 당시 아버지를 도와 활약을 펼쳤던 이성계가 고려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자춘이 병으로 죽자 이성계는 그 뒤를 이어 동북면의 세력가로 성장했다.

이후 이성계는 동북면의 친고려파 여진족까지 휘하에 둔 거대한 세력을 바탕으로 북으로는 여진족,

남으로는 왜구를 토벌하며 경력을 쌓고 '박의의 난'을 토벌해 공민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이후 원나라를 등에 업은 여진족의 거물 나하추의 여진군과 왕위찬탈을 위해 고려를 침공한 덕흥군,

최유의 군대를 괴멸시켜 북방민족들을 평정하고,

남쪽으로 내려갔을 때 경상도,전라도에서 악명을 떨치던 왜구를 토벌하며

황산에서 왜군의 거물 아기바투의 군대를 최무선의 화포와 함께 초토화시켜 고려의 명장으로 떠올라

후에 최영의 바로 밑인 수문하시중에 임명돼 권력과 지위를 거머쥐었다.


최영과 이성계 모두 당대 최고의 권력과 명성을 가진 대단한 세력가였다.

최영은 우왕과 왕실이 인정한 고려의 수호신이자 조정과 군부의 최고 실세였고,

이성계는 동북명의 지배자로 북방 여진족의 추장들까지도 그의 사병 군단에 소속돼 있을

정도의 거대한 세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권세로는 양대 산맥을 이루는 두 무장을 바라보는 당대 사람들의 시선은 상극이었다.

최영은 유력한 문벌귀족가문 출신이자 왕실과 여러 번 인연을 맺어 집안과 인맥,개인 능력까지

남부러울 것 없는 귀족 군인이었고 최영 개인의 청렴하고 원리원칙을 고수하는 강직한 성격으로

백성들은 물론이고 고려 상류층 인사들에게도 존경과 신임을 받는 완벽한 권위자 였던 반면에

이성계는 고려인과 여진족이 섞여사는 함경남도 변방의 천호 집안 출신으로

여진족 계열의 '자수성가'무장이었다.

여진족은 오랑캐라 부르며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던 고려의 귀족들이기에

이성계는 당연히 고려의 다른 상류층 인사들에게 멸시당했다.

청년 시절부터 고려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며 고려 귀족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 이성계였지만

고려의 문벌귀족들은 언제나 그의 출생 성분을 거들먹거리며 여진족의 피가 섞였다며 무시하고

거리를 두었다.

이성계 본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고려 사회에 뿌리 깊게 박힌 귀족들의 혈통 차별을 극복해낼 수는 없었고

이는 곧 이성계가 귀족 중심사회인 고려에 대해서 은연중에 염증을 느끼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고려의 귀족 중심사회와 혈통 차별 문화에 염증을 느끼고 있는 인물들은 이성계,정도전,
정몽주와 같은

신진사대부 세력들은 고려 문벌귀족들의 폐단과 출생 성분에 대한 차별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들이고 이들도 이성계와 같이 지방의 이름 없는 중소 지주들과 향리 집안 출신으로

오로지 본인의 능력만으로 정계에 진출한 실력파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진작에 기존 고려의 사회체제로는 본인들이 원하는 능력중심의 사회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권문세족들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고려의 내부 사정이 악화되고 있는 현시점을 기회로 혁명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진사대부들은 평생 붓만 잡아온 문인들 뿐이였기에 그들에겐 본인들의 책략과 설계를

실행시켜 줄 무력을 가진 인물이 절실히 필요했다.

특히 정도전은 혁명에 필요한 무력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처럼 혈연 중심의 고려 사회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실력파 무인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바로 이런 정도전에 눈에 적격자로 들어온게 정몽주의 소개로 관계를 가지게 된 이성계였다.

그는 정도전과 여러 신진사대부들과 교류하면서 젊은 시절부터 겪어왔던 고려사회의 혈연
중심적인

풍토에 대한 반감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고,신진사대부들의 개혁적인 사상에 빠르게 동화되어 갔다.

이 시점에 최영은 우왕과 함께 중원에서 원나라를 몰아내고 빠른 속도로 세력권을 넓혀가는명나라와

대립하며 파탄 직전의 민생과 고려 내부의 분열의 조짐을 무시하고 명나라와 전면전을 계획했는데

고려 조정에서 당파를 가리지 않고 믿고 따르던 최영이 저지른 초유의 무리수에

백성들과 신진사대부들이 최영과 국왕에게서 하나둘씩 등을 돌리기 시작한 이때부터

이성계의 역성혁명의 조짐이 잉태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최영(생졸;1316,충숙왕 3년~1388,우왕14년)은 고려 말기의 무신으로 아버지는 사헌규정  최 원직이다.

최영은 북방의 원나라와 맞서 영토를 회복했으며,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물리쳤고,

왕권을 위협하는 내란도 막아내면서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다.

명나라에 맞서 요동 정벌을 주장하다가,위화도에서 회군해 개경을 함락하며 축출되었다.

1352년(공민왕 1)  안우·최원 등과 조일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호군이 되었다.

1354년 대호군이 되었는데, 그해 원나라에서 남정군을 요청하자,유탁·염제신 등 40여 명의장수 및 군사

   2,000여 명이 함께 파견되어 원나라의 고우·사주 등지에서 장사성의 난군을 토평하고 이듬해 귀국했다.

1356년, 공민왕이 반원개혁을 단행하여 영토수복을 꾀할 때

서북면병마사 인당, 부사 신순·유홍·최부개와    더불어 압록강 서쪽의 8참(站)을 공략하여 원을 내몰고

고려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

1357년,서해·평양·이성·강계 체복사를 거쳐 이듬해 오장포에 침입한 왜구의 배 400여 척을 격파했다.

1359년,홍건적 4만 명이 서경(평양)을 함락시키자 이방실 등과 함께 이를 물리치고

1361년,홍건적이 재침입하여 개경까지 점령하자 이방실·안우 등과 이를 격퇴하고 

1363년,김용이 사주한 흥왕사의 변이 일어나자 우선·안우경·김장수와 함께 이를 진압하였고

1364년,원나라에 있던 최유가 덕흥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군사 1만 명과 함께 쳐들어어자 

   이성계 등 과 함께 정주 달천에서 섬멸했다.

1365년, 강화와 교동에 왜구가 쳐들어오자 동강(東江)을 변경하였다.

   이때  신돈이 집권하여 새로운 개혁정치가 시도되면서 계림윤으로 좌천되었으며 

   훈작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다.

1371년, 신돈이 처형되고 6년 동안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복귀했다.

1374년, 원을 몰아낸 명나라가 고려에게 제주도의 말2000필을 요구하자

   제주도에 있던 원의 목장 호목들은 300필만 보내왔다.

   결국 고려는 탐라를 정벌할 것을 결정했다.

   최영은 염흥방·변안렬·임견미·나세 등과 함께 전함 314척, 군사 2만 5,100명을 거느리고 제주도에 가서

   평정했다.

   이후 제주는 고려에 귀속되었다.

1376년, 외구가 삼남지방을 침입해 원수 박인계가 연산에서 참패하자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출정을

   자원하여 운봉의 홍산 전투에서 적을 섬멸했다. 

1377년, 서강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고, 왜구 방비에 힘썼다.

1378년, 다시 왜구가 승천부에 쳐들어오자 이성계 등과 출정하여 이를 무찌르고 

1380년, 왜구의 침입 때문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일자 천도가 백성들과 농사에 해로우며,

   또 내성을 쌓아서 대비하면 될 것이라 하여 이를 철회시켰다.

   또한 승도를 모집하여 전함 130여 척을 만들어 수군의 전력 강화에 노력했는데,

   이는 이후 수군의 해상 활동에 튼튼한 기초가 되었다. 

 

우왕의 밀명으로 정권을 천단한 염흥방·임견미를 숙청했으며,

자신의 딸을 우왕에게 납비했다.

이때 명나라가 철령위의 설치를 통고하여 북변 일대를 요동에 귀속시키려 하자 요동정을 계획하고

군사를 일으켜  왕과 함께 평양에 가서 군사를 독려했으나,

이성계 등이 위화도에서 회군함으로써 요동정벌이 좌절되었다.

이성계군이 개경에 난입하자 소수의 군사로 이에 맞서 싸우다 체포되어 고봉(고양)에 유배되었다

다시 합포에 옮겨졌다가 공료죄로 개경에 압송되어 참형을 당했다.

 

최영은 고려 말기의 혼란한 내외 정세 속에서 고려를 지탱하려 했으나,

이성계에 의해 제거되었고 이로써 조선 건국을 위한 이성계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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