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계 이황(李滉)과 조식     2015.08.17.월요일.맑음

이황;퇴계(退溪)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생;1501(연산군 7)∼졸1570(선조 3).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

났다.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을 잃고,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 아버지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나빠져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1527년(중종 22)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와 교유하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에 귀향 도중 김안국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537년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했고,

1539년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임금으로부터 사가독서의 은택을 받았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하다.

1543년 10월 성균관 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명종 1)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의 동암에 양진암을 얽어서 산운야학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하여,

1548년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 서원에 편액·서적·학전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이다.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1552년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1556년 홍문관부제학,

1558년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1543년 이후부터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아호를 ‘도옹’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으로 하여금 도산기 및 도산잡영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에 임명하며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1567년 명나라 신제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며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1569년(선조 2)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1570년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다.

1574년 죽은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하여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09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그 뒤 그를 주사(主祀)하거나 종사하는 서원은 전국 40여 개 처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제5공화국 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국비 보조로 크게 보수·증축되어우리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 되었다.

 

조식

생졸; 1501-1572

연산군 시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 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매진했다.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중요시 여겨 ‘경’과 ‘의’를 강조했고, 경상우도 학문의 특징을 이루었다.

1568년 상소문에서 당대 서리들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했다.

 조식이 살았던 시기는 왕실의 외가에 의한 훈척 정치의 폐해가 가장 극심한 때였다. 조식은 두 차례의 사화를 지켜보면서 훈척 정치의 폐해를 직접 체험했다.

기묘사화 때에는 숙부가 죽고 아버지는 좌천되었으며, 을사사화 때는 많은 친구들이 희생당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그는 한두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곧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자처하면서 오로지 학문과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흔히 두 사람이 비교되곤 한다.

이황은 37년간이나 벼슬살이를 했고 최고의 품계까지 올라갔으나,

조식은 벼슬을 단념했고 13차례나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거절했다. 이황은 기묘사화의 교훈을 거울삼아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사림의 세력을 키우고 국왕을 성학으로 인도하기 위해 출사할 만하다고 여겼다.

반면 그는 문정왕후나 윤원형이 집권하고 있는 세상에 나가 봐야 뜻을 펼 수 없다고 여겨 끝까지 나가지

않았다.

조식은 1501년 경상도 삼가현 토동의 외가에서 승문원 판교 조언형(曺彦亨)과 인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식의 집안은 아버지 대에 와서야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판교에 올랐고, 작은아버지 조언경(曹彦卿) 역시 문과에 급제해 이조 좌랑에 올랐으나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했다.

아버지도 좌천되어 벼슬길이 순탄치 않았다.

그는 특별한 스승을 두지 않고 일곱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시(詩)와 서(書)를 배웠는데 나름대로 독특한
방법을 터득하여 체계적으로 학업에 매진했다. 그는 고문(古文)을 즐겨 읽는 한편, 사서와 삼경 등 유학의 기초 경전의 의미를 깊이 탐구했다.

그가 열아홉 살 되던 해 그의 작은아버지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는 아직 조정에 출사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어머니의 강력한 권유로 과거 시험을 보았고 진사시와 문과의 초시에는 합격했으나 다음 해 있던 생원·진사시 회시에는 응시하지 않았고 문과 회시에는 떨어졌다.

스물두 살에 남평 조씨 가문의 사위가 된 그는 처가를 따라 김해에서 살았다. 그가 평생 일정한 생업이나
녹봉 수입 없이 처사의 신분으로 공부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산가였던 처가의 덕이 컸다.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성리대전》을 읽은 후 그는 크게 깨달음을 얻고 성리학 공부에 전념했다.

그가 특히 마음에 둔 글귀는 “뜻은 이윤(伊尹)의 뜻을 가지고, 학문은 안자(顔子)의 학문을 배운다.

나가면 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 물러나면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라는 대목이었다.

나가서도 하는 일이 없고 물러나서도 지키는 바가 없으면 뜻을 둔 바나 배우는 바가 장차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식이 입신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성화에 조식은 서른세 살이던 1533년(중종 28) 문과 향시에
1등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최종 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과거를 통한 출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후 어머니를 설득해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 후 이언적과 이림의 추천으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제자들과 산 속에서 공부에만
몰두했다. 게다가 을사사화가 일어나 친했던 이림과 곽순, 송인수 등이 차례로 화를 입자 벼슬의 뜻을 완전히 접었다.무오사화, 기묘사화 이후 그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제자들이 몰려들자 우선 《소학》을 가르쳐 기본을 세우게 하고 《대학》으로 시야를 넓히도록 했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여러 번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그는 나가지 않았다. 1555년(명종 10)에 쓴 사직소를 보면 그의 생각을 잘 알 수 있다.

“임금의 정치가 이미 그릇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이 이미 떠났고, 인심이 이미 이산되었다. 문정대비는 생각이 깊지만 궁중의 한낱 과부에 지나지 않고 명종은 유충해서 다만
선왕의 일개 고단한 후계자일 뿐이니 천재의 빈발과 인심의 여러 갈래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아래로 소관이 주색으로 희희낙락하고 있고
위로는 대관이 뇌물을 받아 챙기고 있어 백성들을 착취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나와 같은 하잘 것 없는 신하가 무엇을 어찌 하겠는가. 지금이라도
전하께서 마음을 바로잡고 서정을 쇄신한다면 그때 가서 도울 수 있으면 돕겠다.

1565년(명종 20), 문정대비가 세상을 떠나고 윤원형이 실각하면서 드디어 사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와 더불어 그가 출사를 거부할 명분도 줄어들었다. 윤원형을 몰아낸 명종은 재야의 인사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66세의 조식은 경상도
관찰사 강사상의 추천으로 서울로 올라왔지만 11일 만에 사퇴했다. 명종에게 개혁의 뜻이 없음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오래지 않아 명종이 세상을 뜨고 선조가 즉위했다. 선조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사림을 기용할 뜻이 있어
널리 인재를 구했다. 다시 조식이 천거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경상도 진주에 살고 있는 백성 조식은 진실로 황송한
마음으로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라고 시작하는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렸다. 이 상소를 통해 조식은 정치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했다.>특히 지방 아전들이 저지르는 공납의 폐해를 단호하게 지적했다. 조선 시대에 문관은 시와 문장으로 시험을
치렀고, 무관은 활쏘기와 말 타기로 선발했기 때문에,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하는 관리들은 실무를 전혀 몰랐다. 게다가 인사이동이 심해서 관리들은
실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파악할 능력도 없었다. 따라서 모든 행정이 아전들 손 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라에서 필요한 지방
특산물과 수공업 제품을 농민을 대신해서 공인(貢人)에게 맡겨 바치게 하는 공납제는 공인들이 아전들과 서로 짜고 공납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이면서
백성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었다.
결국 남명은 평생 13번이나 나라의 부름을 받고도 한 번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1572년 72세로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대사간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그는 어려운 시대에는 처사(處士)로 일관하여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 반궁체험(反窮體驗)을 중시하여 실천
없는 공허한 지식을 배격했다. 투철한 의리와 비리를 용납하지 않았던 그의 사상은 경상우도의 학풍으로 이어졌다. 훗날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 합천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서 투철한 선비 의식을 보여
주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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