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圃隱) 정몽주            작성일자; 2007.08.02.목요일,맑음

 

 

 

생졸; 1337년(충숙왕6년)-1392년(공양왕4년), 56세

본관; 영일(迎日).

출생지;영천(永川).

아버지; 정운관(鄭云瓘)

어머니; 이씨(李氏)    

 

                                                                   

부모가 난초 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 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몽란이라 하였으나

후일 몽룡으로 개명하였고 성인이 되자 다시 몽주라 고쳤다.

1357년 (공민왕 6))에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급제해,

1362년 예문관의 수찬이 되었다.

   이때 김득배가 홍건적을 격파해 서울을 수복하고서도 김용의 음모로 상주에서 효수되자,

   그의 문생으로서 왕에게 시체를 거둘 수 있도록 청해 장사지냈다.

1363년,이성계와 함께 여진 토벌에 참가하였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해져서 사대부들이 모두 백일 단상(短喪)을 입었는데,

   홀로 부모의 상에 여묘(廬墓)를 살고 슬픔과 예절을 극진히 하므로써

1366년, 나라에서 정려(旌閭: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를 내렸다.

1372년,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중 풍랑으로 배가 난파되어 일행 12인이 익사하였으나,

   13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명나라 구조선에 구조되어 이듬해 귀국하였다.

1376년(우왕 2), 이인임,지 윤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 방침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되었으나

   이듬해 풀려났다.

        

당시 왜구의 침략이 심해 나흥유를 일본에 보내어 화친을 도모했으나  그 주장(主將)에게 붙잡혔다가 겨우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으나 그에게 앙심을 품었던 권신들의 추천으로 구주의 패가대에 가서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건너가 설명해 맡은 임무를 수행했고,

왜구에게 잡혀갔던 고려 백성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80년,이성계를 따라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하였다.

 1382년, 청시사(전왕의 시호를 요청하기 위해 보내는 사신)로 두 차례 명나라에 갔으나 모두 입국을 거부당해 요동에서

   되돌아왔다.

1384년,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명나라는 고려에 출병하려고 세공을 증액하고 있었고  5년간의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 하여

   고려 사신을 유배시키는 등 고려와의 국교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이에 모두 명나라에 봉사하기를 꺼려했으나 사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5년,우홍명 등 33인을 뽑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가서 증액된 세공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의 면제를 요청해

   결국 관철시켰다.

1389년(공양왕1년),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세웠다.

   '이초의 옥사'가 일어 났을 때 당시 조정에서 물러난 구파 정객들에 대한 대간의 논죄가 끊임없이 계속됨을 보고

   이를 부당하다고 말했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고 사하려 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391년,이성계의 위망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남은,정도전이 그를 추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석(奭)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 떨어져

   벽란도에 드러눕게 되자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함을 고해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역으로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였으나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등에게

   살해되었다.

1401년(태종 1),권근의 요청에 의해 추증되었다.

1517년(중종 12),문묘에 배향 될 때 묘에 비석을 세웠는데 고려의 벼슬만을 쓰고 시호를 적지 않음으로써 

두 왕조를 섬기지    않았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개성의 숭양서원 등 13개의 서원에 제향되었고 묘 아래에 있는 영모재,영천의 임고 서원 등

몇 곳의 서원에는 그의 초상을 봉안하고 있다.

 

시조 '단심가'는 그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에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다.

문집으로 '포은집'이 전하고 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준  (0) 2007.08.05
목은 이색  (0) 2007.08.05
조사의의 난과 함흥차사  (0) 2007.07.20
이성계와 위화도 회군  (0) 2007.07.20
환조 이자춘  (0) 2007.07.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