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광복군 결성                2019.11.02.토요일,맑음

1940917일,한국 광복군은  중국 충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다.

임시 정부의 한국 독립당을 기반으로 지청천과 이범석 등이 이끄는 만주 지역의 무장 세력이 연합하여 한국광복군은 결성되었다.


9월의 독립 운동가 나월환이 제5지대장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곳이자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된

한국 광복군.

19194월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무장 투쟁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군대를 편성하고자 하였는데,

1919년 대한민국 육군 임시 군제를 제정하여, 군대의 편제와 조직에 관한 법규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육군 무관학교를 설립해 자체적으로 군사 간부를 양성하여 만주 지역 독립군을 관할 하에 두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역적 차이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한국의 항일 무장 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국 정부의 지원과 협조를 받게 되었다.

임시 정부의 주석 김구 선생은 1934년에 뤄양 군관학교(낙양)서 한인 특별반을 운영하였으며,

중국의 중앙 육군 군관학교에서도 한국 청년들을 입교시키는 등 군사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 정부는 군사 위원회를 설치하여 한국 광복군 창설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일본군의 점령 지역이 중국 대륙으로 확대함에 따라 임시 정부는 여러 곳으로 피난처를 옮겨 다니는 등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결국 1940917일,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 정착하게 되면서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었다.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은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거행되었으며,

총사령관 지청천,참모장 이범석,총무처장 최용덕,참모처장 채원개,부관처장 황학수,경리처장 겸 정훈처장 안훈,훈련처장 송호,군무처장 유진동 등이 각각 임명되었다.

백범 김구는 광복군 선언문을 통해 광복군은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제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광복군 창설의 취지를 천명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창립 초기,총사령부 예하에 4개 지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1지대장에 이준식,2지대장에 김학규,3지대장에 공진원,5지대장에는 9월의 독립 운동가인 나월환 선생이 임명되었다.


광복군은 병력 모집을 위한 기구로 5개의 징모분처를 설치하여 산서성·수원성·절강성·안휘성 등지로 대원들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일본군 점령 지역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 공작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광복군 창설 1년여 만에 3백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모집할 수 있었다.


194112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일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1941년1210일,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19425월, 김원봉 선생이 주도하던 조선 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제되었으며,

기존의 4개 지대였던 광복군은 2개 지대로 개편되었다.

이후 19456월 안휘성 부양에서 초모 활동을 전개하던 징모 제6분처가 제3지대로 편제되면서 모두 3개 지대 갖추게 되었다.

 또한 광복군은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미국 전략사무국과 협약을 맺고 특무 공작훈련을 실시하였다.

김구 선생은 미국의 미국 전략사무국(OSS) 책임자와 한·미간 공동 작전을 협의하고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으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직전을 취소하였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광복군 중국 지역에서 일본군으로 끌려 나왔던 한국 청년들을 편입시키면서 군세

확장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이 임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광복군에 대해서도 무장 해제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고,광복군도 무장을 해제한 상태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결국 한국 광복군은 19466월 해체되었다.


한국 광복군은 31운동 이후 한국의 통일 정부를 자처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규군이었다.

당시 의병과 비정규군만으로 항일무장 투쟁을 펼치던 독립 운동의 흐름에서 탈피,정규 중앙군으로서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또한 외교선전의열 투쟁 등에만 국한되어, 그 활동에 한계가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명실상부한

정규 군사력을 상징하는 존재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러나 한국 광복군은 중국 충칭에서 결성되어 중국 정부의 창설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이에 대한 조건으로 한국 광복군 행동준승 9개 조항을 강요 받아 중국의 지시를 따라야만 했다.

그리고 재정적인 지원도 중국 정부의 원조에 크게 의존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재정적인 압박으로 광복군은 전차나 야포 같은 중화기나 비행기전함과 같은 장비도 없었으며,

심지어 개인화기도 부족했을 정도였다.

19448월, 임시정부에서 통수권을 인수하는 등 명실상부한 정규군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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