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일 합병 조약 (일제 강점기)            2019.09.19.목요일,맑음           

1910년8월29일,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을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강제로 체결,공포한 조약이다.

한일 합병 조약을 경술 국치 조약.일제 병탄 조약이라고도 하며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1904년2월8일,일본 함대가 뤼순 군항을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제는

1904년2월23일,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고,

1904년5월,각의에서 대한방침,대한 시설강령 등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편성키 위한 대한정책을 결정하여 1904.8월22일,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재정·외교의 실권을 박탈하여 국정 전반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러,일전쟁이 일제가 유리하게 전개되자 한국을 보호 국가로 삼으려는 정책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러자면 열강의 묵인이 필요하였으므로 일본은 열강의 승인을 받는데 총력을 집중하였다.

1905년7월27일, 미국과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체결하여 사전 묵인을 받았으며,

1905년8월12일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양해를 받았다.

1905년9월5일에 끝이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미국의 포츠머스에서 맺은 러시아와의 강화조약에서

   한국 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1905년10월, 포츠머스 회담의 일본 대표인 외무 대신 고무라,주한 일본공사 하야시,총리대신 가쓰라 등이

   보호조약을 체결할 모의를 하고,

1905년11월, 추밀원장 이토(이등방문)를 고종 위문 특파 대사 자격으로 한국에 파견하여 '한일협약안'을

   한국정부에 제출하게 하였다.

1905년11월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다음날 고종을 만나 일본왕 친서를 봉정하며 1차 위협을 가하였다.

1905년11월15일,고종을 재차 만나 '한일협약안'을 제차 제출했으나 중대한 사안이라서 조정의 반대에

   부딪혔다.

1905년11월17일,일본공사가 한국 정부의 각부 대신들을 일본 공사관에 불러 '한일협약'의 승인을 꾀했으나

   오후 3시가 되도록 결론을 얻지 못하자, 궁중에 들어가 어전회의를 열게 되었다.

   이 날 궁궐 주위 및 시내의 요소요소에는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를 선 가운데 쉴새없이 시내를 시위행진

   하고 본회의장인 궁궐 안에까지 무장한 헌병과 경찰이 거리낌없이 드나들며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어전회의에서는 일본측이 제안한 조약을 거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이토'가 주한일군사령관 '하세가와'와 함께 세 번이나 고종을 배알하고 정부 대신들과 숙의하여

   원만한 해결을 볼 것을 재촉하였다.

   고종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다시 열린 궁중의 어전회의에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자 일본공사가

   이토를 불러왔다. 하세가와를 대동하고 헌병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이토는 다시 회의를 열고,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조약체결에 관한 찬부를 물었다.


   이 날 회의에 참석한 대신은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이었다.

   이 가운데 한규설과 민영기는 조약 체결에 적극 반대하였고,이하영과 권중현은 소극적인 반대의견을

   내다가 권중현은 나중에 찬의를 표하였다.

   다른 대신들은 이토의 강압에 못이겨 약간의 수정을 조건으로 찬성 의사를 밝혔다.

   격분한 한규설은 고종에게 달려가 회의의 결정을 거부하게 하려다 중도에 쓰러졌다.


이날 밤 이토는 조약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가한 뒤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조약을 승인받았다.

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의 5명이 조약체결에 찬성한 대신들로서,

이들을 ‘을사오적()’이라 한다.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끝까지 이를 비준하지 않자 을사5조약은 체결되지 않았다.


이로써 일제는 먼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1906년1월17일, 대한제국 외부를 폐지하였으며,

1906년1월20일에는 대한제국의 외교관·공사·영사제를 모두 폐지하였다.

1906년2월1일,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문을 열었다.


이후 일제 통감부가 중심이 되어 대한제국의 완전 병탄을 위한 공작과 정책이 강행되기에 이른다.

통감부는 즉각 고문 경찰 제도를 실시하여 한국의 경찰권을 장악하고,

1907년5월,이완용 내각을 수립하여 통감부 밑에 두었다.

1907년6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고종은 을사5조약을 황제 자신이 승인하거나 서명 날인하여 비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조약 체결은 무효

이며,따라서 일제의 국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는 불법이란 사실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이상설.이준.이위종 등 세 특사를 파견하였다.


이것을 트집 잡아 1907년7월19일,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황태자 순종을 즉위시켰다.

그리고 5일 후인 7월24일,일본인 관리를 대한제국 정부의 차관으로 임명하고,

통감부가 내정을 직접 지배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강제 체결하였다.

7월22일,대한제국의 사법권과 감옥 사무를 통감부에 이양하게 하였다.

7월24일에는 언론을 탄압하기 위해 신문지법을,

7월27일에는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제정하였다.

일제는 대한제국을 무방비 상태에 두기 위해 7월31일, 대한제국 군부를 폐지하고,

8월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일제의 완전 병탄 정책이 강행되던 1904년 여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항일 의병 무장 투쟁은

1907년8월1일,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급격히 고양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의병 운동이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급속히 퍼지자 일제의 한국 병탄 정책은 심대한 타격을 받고 이에 대응

하느라 일정이 지연되었다.


1909년,일제는 완전 병탄 정책을 다시 강화하기로 하고 이용구·송병준 등이 속한 일진회로 하여금

   한일합방론을 제창토록 교사하였다.

   초대 통감 이토는 1909년4월10일,일본 내각총리 가쓰라,외무대신 고무라 등과 함께 한국을

   완전 식민지로 병탄하기로 합의하였다.

1909년6월, 이토가 통감직을 부통감 소네에게 인계한 뒤 귀국하여 추밀원 의장직을 맡은 직후인

1909년7월6일,일본 내각회의는 비밀리에 한국을 완전 식민지로 병탄하기로 의결하고 즉시 일본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은 1909년9월부터 2개월간 이른바 남한 대토벌을 실시,한국 의병들의 항전을 종결

시킨 뒤 병탄을 마감 지으려고 획책하였다.


그러나 두 개의 큰 사건이 일어나 일제의 계획은 다시 차질을 빚게 되었다.

1909년10월26일,한국 병탄에 대한 러시아의 양해를 얻고 만주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극동을 여행 중이던  

   러시아 재무 대신 코코체프와 회담을 하려고 만주 하얼빈에 갔던 이토가,한국인 의병장 안중근에 의해

   저격을 당해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뒤이어 1909년12월2일, 한국의 친일파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애국청년 이재명의 습격으로 중상을 당해

   집무불능 상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박제순이 임시 내각 총리 대신 서리를 맡았으나 친일 내각 구성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1909년12월4일,일제는 동경에서 낭인 단체인 고쿠류회가 수상의 지시를 받고 초안을 작성,수상 가쓰라의

   검열을 받은 ‘한일 병합에 관한 상주문’과 청원서·성명서를 이토의 장례식에 참석한 일진회 간부에게

   주어 서울에서 발표하게 하는 등 한일 병합 여론을 조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애국 계몽 운동파가 총궐기하여 일진회 일당을 격렬하게 성토하고 일제의 의도를 규탄하여 일제의

   한국 병탄 기도는 다음해로 넘어가게 되었다.

1910년3월26일,일제는 안중근을 처형하여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이 사건을 종결 지은 다음

   서둘러 한국 병탄을 강행하였다.

1910년5월30일,병약한 소네를 통감에서 퇴임시키고 현역 육군대장으로 육군 대신인 데라우치를 통감으로

   겸직하게 하였다.

1910년6월24일, 박제순 내각에 강요하여 한국 경찰 사무를 완전히 위탁하는 협정을 체결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의 경찰 관제는 폐지되고,통감부가 경무 총감부를 설치하여 일반 경찰권까지 완전히 장악

   하였다. 통감부는 헌병 경찰제를 채택,헌병 사령관이 경무총장을 겸임하고,지방의 헌병대장이 각도의

   경찰부장을 겸임하게 하며,헌병 경찰수를 대폭 증가시켰다.

   그리하여 대한제국 정부에 고용되어 있던 한국인 경찰관 약 3,200명, 일본인 경찰관 약 2,000명, 일본인

   헌병 약 2,000명, 한국인 헌병보조원 약 4,000명, 일본군인 2개 사단 등의 무력을 전국 각지에 배치,

   한국인의 어떠한 반항도 탄압할 수 있는 무단 체제를 갖추었다.


1910년7월23일,서울에 온 제3대 통감 데라우치는 일본 수상으로부터 병합 조약 초안의 대강은 물론,

   병합 후의 대한 통치 방침까지 내명받고, 한국에 온 즉시 한국인의 저항 발언을 봉쇄하기 위해 '대한민보'

   발행을 정지시키고, '대한 매일신보'를 판매 금지시켰다.

1910년7월29일.부상에서 회복된 이완용을 다시 총리 대신으로,박제순은 내부대신으로 하여 이완용 내각을

   구성하였다.

1910년8월16일,데라우치는 이완용과 조중응(농상공부대신)을 통감 관저로 불러 이른바 병합조약의 초안을

   보여 주고는 수락을 얻어서 비밀리에 의논한 뒤,

1910년8월18일,이완용 내각의 내각 회의에서 합의를 보게 하였다.

1910년8월22일,서울 거리에 일본 헌병들을 배치해 놓고 순종 앞에서 형식상의 어전 회의를 개최,

   이른바 한일 병합이란 안건을 이완용 내각이 결의하는 형식을 갖추었다.

   그 날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치의 이름으로 이른바 한일 병합조약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민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조약 체결을 숨긴 채,사회 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원로 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1910년8월29일에 이를 반포하였다.


한일병합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본국 황제 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는 양국간에 특수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고려, 상호의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고자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이 선책이라고

확신, 이에 양국간에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고,이를 위해 일본국 황제폐하는 통감 자작 데라우치를, 한국 황제폐하는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각기의 전권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전권위원은 합동 협의하고 다음의 제조를 협정하였다.

제1조.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에 기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전연 한국을 일본제국에 병합함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한국 황제폐하·황태자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로 하여금 각기의 지위에 적응하여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하게 하며,또 이것을 유지함에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제4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전조 이외의 한국 황족 및 그 후예에 대하여도 각기 상응의 명예 및 대우를 향유

          하게 하며, 또 이것을 유지함에 필요한 자금의 공급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폐하는 훈공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히 표창에 적당하다고 인정된 자에 대하여 영작을

          수여하고, 또 은급을 줄 것이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을 담당하고 같은 뜻의 취지로 시행하는 법규를 준수

          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해 주며,

          또 그들의 전체의 복리증진을 도모할 것이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로써 충실하게 신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을 가진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한 한국에 있어서의 일본국 관리로 등용할 것이다.

제8조. 본 조약은 일본국 황제폐하 및 한국 황제폐하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서 공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이상의 증거로서 양국 전권위원은 본조에 기명 조인한다.”

1907년6월(고종 광무11년),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난 뒤 일본 정부는 한국 병합 문제를 공식적으로 처음 

    거론했다.

1907년7월22일,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 황제가 일본으로 부터 강제 퇴위가 이루어졌으며,

1907년7월24일의의 강제 조인으로 ‘한일 협약’(정미조약)이 이루어졌다.


일본은 한국 황제를 강제로 교체하면서 조칙을 위조해 대한제국의 군대마저 해산시켰다.

그리고 독차 사건(광무2년 1898년,순종이 김홍록의 사주로 아편 독소가 들은 커피를 순종이 마신 사건)으로

심신장애 증세에 빠진 순종을 창덕궁에 유폐시키고 통감이 섭정으로 한국을 통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로 인하여 전국 곳곳에서 항일 의병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일본은 병합론이 힘을 받았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자치 육성 정책’을 앞세워 조선의 보호국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 했다.

그것이 국제 여론상 모양새가 난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의병활동이 갈수록 심해지자 병합 단행의 주장을 더 이상 누를 수 없었다.

1909년10월26일,하얼빈 역에서 의병장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대사건이 발생하면서 병합론은

   더 구체화 되었다.한국인이 일본에 병합되는 것을 원한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다시 한 번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1909년12 21일,'일진회'가 앞잡이가 되어 ‘한일 합방’을 건의하는 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선언서가 나오자 수많은 애국단체가 곧 반대 집회를 열었고 항일 의병 전선도 달아올랐다.

1910년5월,데라우치 육군 대신을 통감으로 임명해 병합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시켰다.

1910년6월 초, 한국 문제 전문 고급 관료들로 한국 병합 준비 위원회를 결성해 병합에 필요한 절차를 준비

    하게 하는 한편 서울에서는 한국주차군이 대한제국의 친일 내각으로부터 경찰권을 이양받는 위탁에 관한

    조약을 체결했다.

1910년7월,통감 데라우치가 서울에 부임해 본국 정부와의 긴밀한 연락 속에

1910년8월22일,병합에 관한 조약을 조인시키고,

1910년8월29일,이를 알리는 양국 황제의 조칙들을 공포한 '한일 합병 조약'으로 일점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한일 합병조약은 처음부터 불법이며 무효다.

한일 합병조약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 때 그 제2조에서 ‘1910년8월22일 또는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규정하고 재확인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1905년11월에 체결된 을사5조약이 황제의 승인과 비준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뒤 일제의 통감 및

       통감부가 주체가 된 정책과 조약은 모두 효력을 상실하는게 마땅하다.

둘째,한일 합병조약이 한국측과 한국 황제 및 정부의 자발적 의사로 이루어지지 않고, 일제의 군사적 점령과

       강제하에서 강요되어 체결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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