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분단              2019.11.03.일요일,맑음

1939년9월1일 부터 1945년9월2일 까지 치러진 제2차 세계 대전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추축국들과 프랑스,영국,미국,소련,중국의 연합국 간의 전쟁으로,

유럽 대륙 전역과 태평양의 섬들,중국과 동남아시아,북아프리카,세계의 바다를 무대로 전쟁이 전개되었다.

1943년9월8일의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항복에 이어,

1945년5월8일의 독일의 항복,

이어 1945년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 전쟁은 종식되었다.

4000만-5000만명의 희생자를 낸 인류 역사상 가장 피비린나는 전쟁이었다.

대전 결과 소련의 세력이 동유럽으로 뻗치는 결과를 낳았고,중국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세계의 지배력이 서유럽 국가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옮겨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43년11월22일-26일,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의 루즈벨트,영국의 처칠,중국의 장제스가 참가한 가운데

   일본과의 전쟁 및 일본 처리 문제에 대한 논의와 동시에 한국의 독립 문제가 처음 언급되었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해방시키며 독립 시킬 것을 결의했다.

   카이로 회담에서 언급된 한국의 독립 문제는 스탈린의 동의로 재확인되었다.

1945년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는 미국의 루스벨트,영국의 처칠,소련의 스타린은

   한국의 독립 문제는 논의되지 않은 채 독일의 전후 처리문제,소련의 대일 전쟁 참여만이 결정되었다.

1945년7월17일,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의 트루먼,영국의 처칠,소련의 스타린 등 수뇌들은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를 실시한 뒤 독립을 부여한다는 것만을 논의하였다.


1945년8월15일,대한민국은 해방되었다.그것은 완전한 독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한국의 운명은 국제 질서를 좌우하던 세계 열강들에게 달려 있었다.

1945년9월2일,맥아더의 조선 분할 점령 정책인 '일반명령 1호'에 의거 한반도는 38선이 그어지며

   ·소 양군이 북쪽은 소련군이,남쪽은 미군이 점령함으로써 두개의 분단된 국가가 형성하게 되어 

   통일 정부의 수립이 요원하게 되었다.


1945년8월 초,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배가 기정화되자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일본의 항복과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의 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를 앞세워 조선의

   민족 지도자와의 협상 대상자인 여운형에게  총독부 제안을 제시하였고,받아들여 협상을 타결하였다.

1945년8월15일,여운형은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1945년8월16일 오후1시,서울의 휘문 중학교 교정에서 엔도와의 회담 경과 보고 연설회를 개최함과 동시에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은 한.일 두 민족의 자주 호양을 요망하는 담화를 방송하면서,

   정규병의 무장대를 편성하여 질서를 도모할 것과,통화와 물가에 대한 신정책을 수립하고 근본적인 정치

   운영 대책을 발표하겠다고 하였다.

   '건준'은 서울 풍문 여자중학교에 사무소를 두고 건국 준비사업 선전 공작과 치안 활동을 개시하였다.

1945년8월17일,'건준'의 중앙 조직에는 위원장 여운형,부위원장 안재홍,최근우,이규갑,정백,조동호,권태석

   으로 갖추었다.

1945년8월18일에는 여운형이 제1차 위원회를 개최하고,건준 명의로 ‘3천만 동포에게 지령’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민족주의 계열 일부 및 공산주의 계열 내부에서 건준의 조직상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김병로,백관수,이인 등은 민족주의 계열과 건준 합작을 위해 여운형 안재홍과 담판을 제의하였고,

1945년8월19일,‘전국 유지자 대회’를 소집하기로 합의하였으나 그날 밤 여운형이 테러를 당하면서 실행

   되지 않았다. 또한 테러로 여운형이 공석인 상황에서

1945년8월21일, 고경흠,윤형식,정백 등 소위 장안파 공산주의 계열에서 상의 없이 '건준 경성 지회'를

   휘문 중학교 강당에서 조직하고 15명의 위원을 선출하여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1945년8월22일,이런 상황에서 '건준' 2차 중앙 조직이 구성되었다.

   여운형,최근우,이동화,이병학,이여성,이상도,장권,권태석,권태휘,김약수,박문규,이강국,최용달, 이광,

   정의식,정화준, 교영,홍기문,고경흠,윤행식,최성환,최익한,정백,안재홍,양재하,이승복,이의식,유석현,

   이규갑,김준연,함상훈,이용설,정순용 등 총 33명으로 확대되었다.

   중앙조직이 발표된 다음 날부터 좌우협상 및 건준 확대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1945년8월23일,선전부장 권태석은 백관수를 만나 좌우를 아우른 건준 확대위원을 논의하였고,

   여운형은 건준이 신국가 권력을 독점하려는 행위라는 민족주의 계열의 비판을 겨냥해 건준은 신정권이

   수립될 때까지의 준비와 치안 확보를 위한 것이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1945년8월25일,권태석은 다시 김병로,백관수,이인,박명환,김용무,박찬희,김약수 등과 만나 확대 위원

   명단을 합의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위원장 직무 대리인 안재홍이 직권으로 5명의 우익 인사를 추가하고

   건준 내부에서 좌익적인 소장파 백여명을 추가하는 등의 문제로 좌우간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러한 중앙 집행부 내부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건준은 8월말까지 전국적인 조직을 완료한다는 목표를

   위해 지역 조직을 구성하였다.

1945년8월26일,위원회의 기획부 전조선직역자치본부에서는 각 지역 종업원들에게 지역별 자치회의

   조직을 통고하고, 또 각 지방에는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무경부 산하에는 장근을 대장으로 하는 치안대가 조직되어 사무국장에 정상윤,총무부장에 송병무 등이

   17개 부서를 맡게 되었다.

1945년9월2일, 서기국을 통해 발표된 강령에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

   국내 질서의 자주적유지 등 3개 항을 내세웠다.

   그러나 건준과 민족주의계열의 협상이 결렬된 상황에서

1945년8월31일,여운형은 사직을 선언하고,안재홍도 건준에 사표를 제출했다.

1945년9월1일,건준은 사회주의 계열 인사 중심으로 135명의 확대위원 명단을 발표하였다.

1945년9월4일에는 확대 위원회가 열렸으나 135명 중 일부만이 참석한 가운데 여운형과 안재홍의 사임

   수리건을 18대17로 부결시키고,허헌을 부위원장으로 추가하였다.

   같은 날 허헌,박헌영,여운형,정백 등 4인이 회동하여 인민 공화국 수립 문제와 구성을 협의했다.

1945년9월6일,위원회는 600여 명으로 된 ‘전국 인민 대표자대회’를 서울 경기 여자중학교 강당에서 소집

   하였다.

   이 회의는 헌법 기초위원을 겸직하는 전국 인민 대표위원에 이승만·여운영·허헌·김규식·김구·김성수·

   김병로·안재홍·이강국·신익희·조만식 등 55명을,고문에 오세창·권동진·김창숙·이시영 등 12명을 각각

   선출하고,'조선 인민공화국 임시조직법'을 통과시킨 다음 ‘조선 인민 공화국’ 수립을 발표하였다.

   따라서1945년9월7일, '건국 준비위원회'는 해체되었고,여운형은 2차 테러를 당하였고

1945년9월11일,주석에 이승만,부주석에는 여운형,총리에는 허헌이 각각 추대,임명되었으며,

1945년9월14일, 인공중앙위원회에서 인공의 정부 부서 및 정강,시정 방침 등을 발표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환국을 기다리던 송진우·김성수·장덕수 등은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이들 조각을 인정

   하지 않았고,

1945년10월10일,미군정은 조선 인민공화국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환국한 이승만도 주석 취임을 거절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자연적으로 해체되었다.


1945년8월15일,

   여운형이 1944년8월10일.사회 주의자와 민족 주의자들이 건국 준비를 위해 결성한 자신의 지하 조직인

  '조선 건국 동맹' 을 중심으로 안재홍,정백,최근우,조동호,권태석등과 함께 해방후 조직된 최초의 건국

   준비  단체인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결성하였으나 임시 정부의  지사들과 대립되었고 '건준위' 내부 박헌영이 주도하는 극좌익 세력과 정치 투쟁으로 내분에 휩싸였다.

   '조선건국 준비 위원회'의 여운형과 우익 세력인 김규식이 좌우 합작을 추진하자

김구,이승만,이시영,서재필,조병욱 등 이 포함한 '한국민주당'은 이를 냉대했다.


1945년8월17일, 평양의 조만식은 '평안남도 건국 준비 위원회' 등 각지에 건국 준비 조직이 결성되었으며,

   이러한 조직들은 소련군의 명령으로 좌·우 합작의 '인민 위원회'로 개편되었다.

   북한은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구성되었고,이후 북한은 공산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갔다.



1945년8월17일,조만식은 평양에서 ‘평안남도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조만식은 8월18일.평안남도 도청에서 있었던 일본군 항복 조인식에 입회하는 형식으로 참석하였다.

1945년8월26일에는  소련군이 "건국 준비 위원회" 와 공산당을 평양 호텔로 초청하고 연립 정권을 수립

   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조만식이 위원장이 되고 '건국 준비위원회' 측에서도 여러 명이 조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연립 정권의 수립은 이때까지는 조만식의 지도력을 배제할 수 없어 이뤄진 부득이한 방편이었다.

   이러는 가운데 한편 공산당의 위상은 날로 떠오르고 소련군정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인민 위원회'는

   날치기 행정으로 제 세력을 키워갔다.


1945년12월16일-25일 까지 개최된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해서는 미·영·중·소 4국 대표에 의한 신탁통치를 기본 취지로 하는 미국측 제안과 민주주의적

   임시정부 수립을 기본 취지로 하는 소련측의 수정안이 토론되어

12월28일,영국의 동의로 협정이 체결되어 발표 한 것은 5년 이내로 기한으로 하는 4대 강대국에 의한 

   신탁 통치의 협정은 한국 임시 정부의 협의를 거처 4개국이 심의하여 제출한다고 결정 하였다.

1945년12월30일. 사회 단체와 정당의 이름으로 '반탁 전국 대회'를 열고 신탁 통치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1945년12월31일에는 권동진을 위원장,안재호,김준연을 부위원장으로 '신탁통치 반대 민총동원위회'

    조직하고 반탁 시위 대회를 전개하였다.

    신탁통치에 대한 반응은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조선 민주당'의 주도로 광범한 반탁 운동이 전개되었고,공산주의자들도 반탁의

    뜻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삼상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는 세력은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할 수 없다'

    주장하자 공산 주의자들은 찬탁으로 나서게 되었다.



또한 1946년1월, 모스코바 협정에 따라 한국의 신탁 통치와 완전 독립을 토의 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의

   대표가 서울에서 미.소 공동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미,소에 의해 신탁 통치 결정이 내려지자 국내에서는 소련의 지지를 받는 공산주의 좌파와 미국의 지지를

받는 우파 간의 신탁통치 찬반을 놓고 대립이 급격히 심화되었다.

이후 미국과 소련은 두 차례에 걸쳐 '미·소 공동 위원회를 열어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였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설치되어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통일 정부 수립이 결의되었다.

하지만 소련은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38선 이북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므로,

유엔은 선거가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세울 것을 결의했다.


1946.1.2. 공산주의 정당과 사회 단체 연명의 모스크바 결정 지지 공동성명서,

1946.1.3. 북조선 행정 국장회의 성명서 등이 잇달았는데,이 성명서들은 한결같이 임시정부

수립의 의의를 강조하고 신탁 통치는 후견제라고 역설하였다.

1946.1.4 박헌영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좌익 진영은 신탁 통치를 찬성하고 나섰으며,

신탁 통치 문제는 민주주의적 민족통일 전선의 결성을 통해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반탁 운동은 금지되고 조만식은 연금되기에 이르렀다.

소련은 그들의 점령지역 안의 모든 반탁 세력을 거세하여 북한의 정당과 사회 단체

들을 모스크바 협정 지지로 통일시키고 남한의 좌익 진영도 찬탁하게 하여 미 ·소 공동

위원회에 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좌익 계열의 찬탁을 분쇄하기 위해 민족 진영 단체들이 단결하여

반탁 운동을 전개, 시위,집회,언론 등을 통해 미.소 공동 위원회에 항의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대한 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였다.

·소 공동 위원회가 격렬한 반탁 운동과 미 ·소의 의견대립으로 결렬되고,이를

계기로 우익 민족 진영은 다시 '민족 통일총 본부'를 창설하여 독립쟁취의 기틀을

잡으려 하였다

1946.1.16. 미소 공동위원회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제반

문제 해결을 위하여 예비 회담을 열었고,

1946.2 독립 정부의 수립을 갈망해온 전국민은 이에 분노했다.

조국의 완전독립을 달성하기위한 조직체로 기존의 반탁 운동 기관인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중앙 협의회'와 김구 중심의 '신탁통치 반대국민총동원 중앙위원회'가 통합

하여 '대한독립독촉국민회'‘ 독촉 민회를 발족하였다.

반탁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의 활동 반대, 좌익 운동의 봉쇄 등이 행동 목표였으므로

좌익 진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우익 진영의 대표적 정치 단체였다.

19466, '민족 통일 총본부'로 개편되어 재발족하였다.

총재 이승만,부총재 김구.김규식,고문에 권동진,김창숙,함태영,조만식,오화영,

회장에 오세창이 추대되었다

1946.2.15. 좌익 세력의 총결집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결성되자, 박헌영은

여운형·허헌·김원봉·백남운과 함께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는 등 활약하였다.

1946.3.20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미소 공동위원회는 제1차 회의를 열었다.

미국측 대표로는 소장 아놀드, 소련측 대표로는 중장 스티코프이었다.

벽두부터 난관에 부닥뜨리게 되었는데 가장 큰 논란은 민주주의라는 용어와

민주주의제 정당에 관한 해석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회의에서는 5년 동안의 신탁 통치가 요구되었으나 남한의 우익 정당과 사회단체는

신탁 통치를 반대하였다.

이에 소련측 대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를 반대하는 정당과 사회 단체는 임시정부

구성에 참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측 대표는 의사 표시의 자유 원칙에 입각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 신탁 통치안을

반대한다고 해서 임시 정부 수립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1946년3월, 북한에서는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46.5.1 공동성명 제7호까지 발표하였으나 의견 대립으로 아무런 결실 없이

1946.5.6 휴회에 들어갔다.

1946.10 이범석은 조선 민족 청년단을 결성, 비정치·비군사를 내걸고 국가지상·민족지상의

청년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주위로부터 국수 주의적 극우 단체라는 비난을 받아 대한 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조선민족청년단의 이념은 이후 1공화국 이승만 정부가 내세운 일민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946.11.3. 박헌영은 조선 공산당·조선 인민당 및 남조선 신민당이 합쳐 남조선 노동당으로 결성되자 부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북한에 머물면서 이른바 박헌영 서한을 통해

남로당의 활동을 지도하였다.




1946년12월,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천명하였고,

1947년1월에 결성한 '북조선 인민 위원회'는 1차 회의에서 위원장을 김일성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김구,김규식은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였지만 미·소 냉전 체제로 인해 이들의 뜻은 실현되지 못했다.            

1948년, 남한에서는 5.10 총선거를 통해 이승만 정부가 들어섰다.


또한,1948년9월9일,김일성이 내각 수상에 취임하면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로써 한반도는 두개의 분단된 국가가 형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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