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균       2018.12.19.수요일,맑음

허균; 조선 선조,광해군 시대의 문신이며 문인

생졸; 1569(선조)∼1618(광해군).50세

 

허균은 국문학사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이며,

한글로 된 '홍길동전' 을 남김으로써 한국 문학사에 일획을 긋는 대업을 이루었다.

 

대대로 고관직을 누리던 양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수제자격으로 높은 벼슬을 지낸 동인의 거두였으며, 
맏형 허성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다녀와서 일본 침략을 정확하게 예단한 인물로

알려졌으며,둘째 형 허봉은 명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조천기'를 쓴 인물로 유명하다.

또 누이는 여류 시인 허난설헌이다.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일찌기 12세 때에(1580년 선조13년) 아버지를 잃고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했다.

학문은 영남학파의 거두 유성룡에게 배웠으며,

시는 삼당시인(이달,최경창,백광훈을 묶어서 부르는 용어)의 하나인 이달에게서 배웠다.

 

이달은 허균의 둘째 형 허봉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에 살고 있었다.

이달은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으며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허균은 '손곡산인전'을 지어 이달을 기렸다.

 

허균은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에 문과에 급제하고 설서를 지내다,

1597년(선조 30)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이 되어 이듬해에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나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한지 6달 만에 파직됐다가
그 뒤에 춘추관기주관 형조정랑을 지냈다.

1602년 선조 35년에는 사예,사복 시정을 역임했으며 원접사 이정구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했다.

1604년 선조 37년에는 수안 군수로 부임했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허균은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학식을 높이 평가 받았고,

누의 허난설헌 의 시를 보여 중국에 책을 출판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다시 삼척부가가 되었으나,

세달이 못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고 세번째로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의 학식을 높이 평가하던 조정은 그에게 다시 공주목사로 기용하였으나,

서류 출신들과 지내며 관직을 너럽힌다는 이유로 네번째 파직을 당하고 만다

그 뒤에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을 만났다.

 

허균은 1609년 광해군1년에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에 이상의의 종사관이 됐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됐다.

1610년(광해군 2)에 전시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로

유배됐다.그 뒤에 몇 년간은 태인에 은거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 출신의 서양갑,심우영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에게 아부해 대북에 참여했다.

1614년에 천추사가 돼 중국에 다녀왔고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 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를 비롯해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1615년 이이첨의 주선으로 승정원의 책임자가 되었고,

중국 문헌에 조선 종묘사에 대한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하고 이를 정정시켜 광해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광해군에게 수많은 찬사를 받았고 일약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1617년 광해군 9년 좌참찬이 돼어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시켜 성사시켰다.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과 사이가 벌어졌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 아들 기준격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리니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했다.

 

1618년(광해군 10)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허균의 심복 현응민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 났다.

허균은 자신이 모아온 세력을 바탕으로 반역을 도모하였고 서얼차별을 없애고 신분 계급을 타파,

붕당을 혁파해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 시킨 끝에 역적 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작거리에서

능지 처참을 당하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