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종과 숙희 공주       2019.03.14.목요일,맑

현종 야사가 거의 전하지 않는 평범한 왕이다.

조선 시대의 왕 중에서는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며,

장기간 왕위에 있었던 왕들 중 유일하게 후궁이 없다.

경종이나 단종같이 병약하거나 즉위 기간이 짧았던 왕들,

또 추존왕 들을 제외하면 후궁이 없는 왕은 현종 뿐이다.

현종 시기에
효종의 죽음으로 인한 1차 예송 논쟁이 일어나고,

인선 왕후(효종의 비)의 죽음으로 2차 예송 논쟁이 일어나 서인과 남인의 갈등이 최고조였다.


현종이 후궁이 없던 이유는 예송 논쟁의 주축이었던 서인 집안의 명성 왕후의 성격이 강해서 말도있고,

'경신 대기근'을 비롯한 흉작이 계속되어 현종의 죄책감을 자극해 후궁을 둘 수 없게 했다는 말도 있다.

당시 조선 인구의 5분의1인 100만명의 백성이 굶어 죽은 그 경신 대기근

1670년과 1671년 사이의 일로 전대미문의 기아 사태였다.

오죽하면 임진왜란을 직접 겪은 노인들이 전쟁 때도 이보다 나았다고 했을 정도란다.

현종 시기의 '경신 대기근'과 숙종 시기의 '을병 대기근'은 일종의 자연 재해로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이었으나 백성들이 수없이 굶어 죽자 젊은 왕 현종은 몹시 괴로워했다고 한다.

신하들은 장렬 왕후의 복상 문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싸우는데 백성들은 구제할 길이 없고,

현종은 그런 상황에서 후궁을 둘 수가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 워낙 몸도 많이 아팠는데 재위 초부터 눈과 습창,종기 때문에 치료 받았단 기록이 끊이지 않는다.

서른 넷의 젊은 나이로 죽어간 현종은 왕들의 고질병인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고생한 것이다.

 

숙휘 공주는 청나라에 볼모로 갔던 효종과 인선 왕후의 넷째딸 이다.

1653년 효종 4년,11살에 정제현에게 시집 갔으나  20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는데,

남편과 시아버지 부부, 그리고 시아버지의 동생이 거의 같은 시기에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본래 정제현은 우상 정유성의 손자이다.

이렇게 죽음이 이어지자 곡절이 있다고 생각해 집주변을 파헤쳐 흉물을 캐내고,

정유성의 관기 출신 첩 설매와 나인,여종들을 국문했지만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숙휘 공주의 아버지 효종은 종기를 치료 받다 과다 출혈로 죽었다.

그때 시술을 맡은 어의 신가귀는 수전증이 있었다고 한다.

 

북벌 의지를 보이며 몹시 검소하게 살았던 효종과 넷째지만 큰딸이 일찍 죽어 실질적인 셋째딸인 숙휘공주 사이에는 재미있는 야사가 전해진다.

 

효종은 여동생 숙휘 공주가 수놓은 치마를 한벌만 해달라 졸랐더니 거절한다.
자수놓은 스란 치마같은 화려한 사치품이 유행해 효종이 단속하고 신하들도 경계하는 경우가 많았다.

효종은 사위가 밥을 물에 말아 먹다 남기니 먹을 만큼만 말아야지 하면서 꾸짖었다고 한다.

효종과 현종이 딸이자 여동생인 공주들에게 무척 신경쓴 건 사실이지만,

효종은 '내가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검소함을 솔선하고자 하는데, 어찌 너로 하여금 수놓은 치마를 입게

하겠느냐'며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 효종은 내가 죽거든 입으라 했지만 공주는 과부가 되어 입으라고 해도 입을 수가 없었다.

숙휘공주가 남편과 시아버지를 한번에 잃고 2남 1녀의 자식들 중 아들 정태일을 제외한 모든 자식들이

죽고  정태일 마저 후손없이 죽는 불행을 겪는 공주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효종이 수치마 하나 쯤은 사줬을 것이다.

 

어쨌든 정사와 야사 속에 등장한 현종은 흠잡을 곳도 없지만 강경하지도 않았던 왕이란 인상이 강하고 ,

숙휘공주는 상당히 귀여움을 받았지만 사치한 공주였단 느낌이 강하다.

숙휘 공주는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홀로 살다 죽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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