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판서 홍봉한                        작성일자; 2019.07.30.화요일,맑음

 

호조판서 홍봉한; 조선 후기 우의정,좌의정,영의정 등을 역임한 노론의 문신.사도세자의 장인

생졸; 1713(숙종39년)-1778년(정조2년)

본관;풍산

호; 익익재(翼翼齋).

가계도

   증조부; 이조판서 홍만용

   조부; 홍중기

   부; 홍현보

   모; 임방의 딸 

     자; 혜경궁 홍씨(경의왕후)

    사위;사도세자

 

 

1735년(영조11) 생원이 되고, 음보로 참봉에 등용되어 세자익위사세마로 있을 때인

1743년 딸이 세자빈(혜경궁홍씨)으로 뽑혔다.

이듬해 세마로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해 사관(史官)이 되었다.

다음 해 어영대장에 오르고, 이어 예조참판으로 연접도감제조를 지낸 뒤 1752년 동지경연사가 되었다.

그리고 비변사 당상이 되어 청인들이 애양책문 밖에서 거주하며 개간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임진절목'을 편찬하였다.

1755년, 구관 당상·평안도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이어 좌참찬에 승진하였으며,

1759년, 세손사가 되었다.

1761년 ,세자의 평양 원유 사건으로 인책 당한 이천보,민백상 등이 자살하자 우의정에 발탁되었다.

그 해에 좌의정을 거쳐 판돈녕 부사를 지낸 뒤 영의정에 올랐다.

한때 세자 문제로 파직되기도 했으나 곧 좌의정으로 복직되었다.

1763년에는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영조의 정책에 순응해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특히, 당쟁의 폐해를 시정하고 인재를 발탁할 것 등의 시무6조를 건의해 시행하게 하였다.

또한 백골 징포와 환곡 작폐의 엄금, 은결의 재조사 등을 단행하게 해 국고를 채우고 백성의 부담을 경감하도록 하였다.

1768년 다시 영의정에 올랐다.

그리고 울릉도의 사적을 널리 조사한 내용을 책으로 엮음으로써 그곳에 대한 영토 의식을 높였다.

1771년 영중추 부사로 있던 중 반대 세력에 의해

사도세자의 아들 은신군 진,은언군 인의 관작이 삭탈되고

나아가 세손(훗날의 정조)까지 그 권위가 위협 당하자 이를 막다가 삭직되고 청주에 부처되었다.

그러나 홍국영의 기민한 수습으로 풀려나온 뒤 봉조하가 되었다.

사도세자의 장인이며,세손(정조)의 외할아버지로서

영조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친정 인물인 김구주 세력과 권력 다툼을 하였다.

영조대 중반 이후 김구주 중심의 남당에 대립했던 북당의 중심 인물로 평가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 노론·소론이 대립하는 가운데

1762년 세자가 죽음을 당할 때에 방관적인 태도를 취해 후일 정적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

그러나 영조가 사도라는 시호를 내리는 등 세자에 대한 처분을 뉘우치자,

그 사건을 초래하게 한 김구주 일파를 탄핵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세자 죽음의 전말을 상세히 적은 '수의편'을 편찬해 반대파를 배격하는 구실로 이용하였다.

정조 연간에는 그의 행적에 대한 시비가 정파 대립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래서 그를 공격하는가 또는 두둔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벽파(僻派)와 시파(時派)를 구분하기도 하였다.

영조를 도와 조선 후기 문화부흥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국정 운영에 대한 주장을 정조가 친히 편찬한 '어정홍익정공주고'가 있으며,

그 밖에 '정사휘감''익익재만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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