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경례의 난           2019.08.05.월요일,맑음

1811년(순조11년)12월,홍경래·우군칙 등이 중심이 되어 이듬해 4월까지 약5개월간에 걸처 일으킨 대규모 농민 반란이다.

조선 후기 봉건 사회는 17,18세기에 이르러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었다.

토지 겸병이 광범하게 진전되어 지주전호제가 양적으로 팽창되어 갔다.

특히, 이앙법.이모작으로 대표되는 농업 생산 기술의 변화,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로 농민층의 분해가 촉진

되었다.이 결과 지난날의 봉건 지주와는 다른 서민 지주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주가 등장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개선된 농업 생산 기술과 시장의 확대라는 유리한 여건 속에서 차경지의 확대를 통해

상업적 농업을 하는 경영형 부농이 성장하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수의 소농민들은 몰락해 영세 빈농,전호가 되었다.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들은 유민이 되거나 임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층 분해는 다수의 소농민들을 중세 사회의 특징인 토지에 대한 긴박을 해체 시켜 임노동자로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부농,서민 지주로 양극 분해 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상공업은 상품 경제의 발달로 인해 부분적으로는 수공업자의 전업화가 이루어지고 봉건적인 특권 상인에게 도전하는 사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특히 개성 상인이나 의주 상인들은 대외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등 상권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봉건적인 신분 질서의 구조에도 부(富)를 통한 신분 상승의 확대로 양반의 증가와 평민.천민의 감소,몰락

양반의 다수 존재라는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에 따라 양반 신분의 절대적인 권위도 동요되었다.

                

사회.경제적 변화는 19세기가 되면서 더욱 심화되어 봉건 사회의 해체를 촉진시켰다.

특히,정치적으로 치열했던 17, 18세기의 당쟁이 끝나고 노론에 의한 안동 김씨 척족의 일당 전제가 성립

됨으로써 삼정 문란은 농민층 분해를 더욱 촉진시켰고,특권 상인과 지방 사상 인간의 대립도 심화되었다.

더욱이 평안도 지방은 대청무역이 정부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더욱 활발해져서 송상.만상 가운데는 대상인

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많았다.

또, 18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견직물업,유기 등 수공업 생산과 담배 등 상품작물의 재배,금·은의 수요 급증으로 인한 광산 개발이 활발하였다.

그에 따라 양반지주,상인층에 의한 고리대업의 성행으로 소농민의 몰락도 심화되었다.

일부 농민층은 부를 축적해 향촌의 향무층으로 진출했으며, 빈농.유민들이 잠채광업에 몰려들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상황에서 이 난은 10여 년 간 준비되었던 조직적 반란이었다.

여기에는 홍경래,우군칙,김사용,김창시 등으로 대표되는 몰락 양반.유랑 지식인들의 '정감록' 등에 의한 이념 제공이 있었다.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새로이 성장한 향무 중의 부호,요호.부민 등 부농.서민 지주층과 사상 인층의 물력 및 조직력이 결합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역노 출신으로 대청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가산의 부호 이희저의 집이 있는 다복동을 거점으로

삼고,각지의 부호,부상대고들과 연계를 맺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운산 촛대봉 밑에 광산을 열고 광산 노동자,빈농,유민 등을 고용해 봉기군의 주력부대로 삼았다.

봉기군은 남진군,북진군으로 나뉘어 거병한 지 열흘만에 별다른 관군의 저항도 받지 않고 가산.곽산.정주.

선천.철산 등 청천강 이북 10여 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것은 특히 각지의 내응 세력들의 적극적인 호응 속에서 가능하였다.

이 때의 내응 세력은 주로 좌수,별감,풍헌 등 향임과 별장.천총.파총.별무사 등 무임 중의 부호들이었다.

이들은 부농이나 사상인들로 대부분이 돈을 주고 향임을 얻게 되는 계층이었다.

그러나 곧 전열을 수습한 관군의 추격을 받은 농민군은 박천.송림.곽산.사송야 전투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급속히 약화되어 정주성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농민군의 전세가 이와 같이 급격하게 변화하게 된 것은 주력 부대가 지닌 취약성 때문이었다.

농민군은 비록 안동 김씨의 세도 정권으로 대표되는 봉건 지배층에 대한 공동의 이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부인 부농,상인층과 일반 병졸을 구성하는 소농,빈농,유민,임노동자층이 가지는

상호 대립적 성격으로 인해 이들 하층민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에 대해 격문의 내용에서는 단지 서북인의 차별대우, 세도 정권의 가렴주구,정진인의 출현 등

만을 언급할 뿐 정작 소농·빈민층의 절박한 문제를 대변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지휘부가 점령 지역에서 이임,면임 등에게 병졸들을 징발하도록 한 데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그러나 일단 정주성으로 퇴각한 농민군은 고립된 채 수적인 면에서나 군비에 있어 몇 배나 우세한 경군.향군.민병.의 토벌대와 맞서 거의 4개월간 공방전을 펼쳤다.

이러한 강인한 저항은 곧 주력부대의 구성상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정주성의 농민군은 이전의 급가 고용이나 소극적 참여자가 아니라 주로 박천.가산 일대의 소농민들로

구성되었다.이는 관군의 초토 전술에 피해를 입은 이 지역의 대다수 농민들이 정주성에 퇴각해 적극적으로 저항했으며, 관군의 약탈에 피해를 입은 성밖의 농민들의 협조와 또 지휘부에서도 부민에 대한 징발을 통해 평등한 분배를 제공한 때문이었다.

관군의 화약 매설에 의한 성의 폭파로 농민군은 진압되고,1,917명과 홍경래 등 주모자가 모두 처형되었다.


이 난은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조선 사회에 큰 타격을 가해 그 붕괴를 가속화시켰다.

홍경래는 죽은 뒤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존재로 민간의 의식 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난에서 부농과는 달리 소극적인 구실만을 담당했던 광범한 소농.빈민층은 이후 임술민란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인 주도층으로 성장해 나아갔다.

또, 이 난에서는 이씨 왕조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새로운 정치체제가 구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평안도 지방이 주요 무대였지만,

동시에 도성에서 소론 박종일을 중심으로 중인,서얼층이 연계해 정권 탈취를 계획한 것이라든지,

기타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층의 산발적인 소요는 같은 맥락 속에서 파악해야 할 것이다.

이 난에 대한 평가는

그 주도층의 성격을 농민층 분해 과정에서 성장한 향무 중의 부호,경영형 부농,서민 지주,사상인 및 일부

몰락한 양반 지식인 등이 광산 노동자,유민,빈농을 동원해 일으킨 반봉건 농민 전쟁으로 규정하고 있다.

 

홍경례; 1771(영조47년)-1812(순조12년)

홍경래는 '조선왕조실록'에 역적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세도 정권의 부패,삼정의 문란 등 조선 후기의 사회적 모순에 저항해 농민 반란을 일으킨 인물로 일반 백성들에게는 전설 속의 영웅이며 민중의 지도자였다.

그의 사후 그를 흉내 낸 크고 작은 봉기가 잇달아 일어나는 등 홍경래는 수많은 농민 봉기에 영향을 주었고, 조선 후기 사회 변화의 기폭제가 되었다.

서른세 살의 짧은 생에도 역사 속에 엄청난 삶의 자취를 남긴 셈이다.


홍경래는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평안남도 용강군 다미면에서 태어났다.

외숙부인 유학권에게 글을 배웠는데 어렸을 때부터 힘이 세고 총명해서 동네에서는 이름난 소년이었다.

유학원은 그의 총명함과 야심가적인 기질을 발견하여 더 이상그를 가르칠 수 없다고 여겨 그를 돌려보냈다.

그는 1798년(정조22) 사마시에 응시했다가 낙방하자 실력보다는 문벌과 혈연으로 인재를 뽑는 과거 시험을

유랑을 시작하면서 그는 청룡사에서 명문가 출신인 우군칙을 만나게 되었다.

우군칙은 서얼로 태어나 집을 나와 떠돌며 지관으로 명성을 얻던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거사를 위해 향촌에서 부를 축적한 신흥 지방 유력자, 황해도·평안도 일대의 사상인 지방 차별

정책으로 관로가 막혀 불만을 품고 있던 양반 지식층 에게 접근했다.

자금을 모으기 위해 광산을 개발하고 염전을 운영해 각종 물자와 무기를 구입하고 비축했으며,

노동자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몰려든 가난한 유랑민들을 모아 군사 훈련을 시켰다.

이렇게 10년 동안 꾸준히 준비를 거듭한 후 홍경래는 1811년 가을,거사 준비를 완료했다.

약 2,000여 명의 병력은 거사일은 1812년 정월로 정했으나 12월 15일로 당겨졌다.

혁명군은 평양 감사의 관저 밑에 설치한 폭약이 터지는 것을 신호로 거사를 시작하려 했으나 당일 비가

내리는 바람에 화약이 물에 젖어 폭발하지 않았다.

대원들은 폭발을 기다리다가 난이 실패로 돌아간 것으로 생각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게다가 대원 한 명이 관가에 붙잡히는 바람에 근거지마저 노출이 되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한 홍경래는 12월18일 스스로를 평서 대원수라 칭하며 출전의 격문을 선포

아여 가산 군아를 습격해 군수 정시를 죽이고, 군대를 남북으로 나누어 각 군읍을 공략했다.

북진군은 곽산을 선두로 정주, 선천, 태천, 철산, 용천 등을 점령했고, 남진군은 박천을 점령했다.

그러나 진격 목표를 두고 지도부 내에서 의견이 나뉘어 4일간 지체되었는데 그 사이에 평안도 병마 절도사 이해우가 이끄는 군사 1,000여 명이 안주로 들어오고, 중앙에서 파견된 양서 순무사 이요헌의 정예군이

합세했다.

□ 우군칙; 1776년(영조52년)-1812(순조12년)

본명은 우장유며,서얼 출신으로 가산군 동북면에 살면서 풍수,복설 등을 업으로 생활했다.

청룡사에서 용강의 지사인 홍경래를 만나 의기투합하여 여진 땅에서 마적을 지휘하던 정민시를 만나 군사적 행동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이들은 차력술,축지법을 동원하고 풍수 지사로 자처하면서 서북 지방의 지식인·좌수·상인·하급군관들을

끌어 모았는데, 김사용·이희저·김창시·홍총각·최이륜·김이대·윤언섭 등이 주요인물이었다.

이들은 가산 다복동을 근거지로 하고 서울의 김재찬, 의주부호 임상옥, 정주부호 김약하 등에게 지원을 받는 한편, 운산 촉대봉에 광산을 개설한 뒤 광산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금을 채굴하고 추도에 염전을 개설했다.

1811년10월, 각지의 중심 인물들이 다복동에 모인 뒤 '임신기병'의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고 광산

노동자들을 봉기 군사로 하여 마침내 12월18일 전면 봉기를 단행했다.

이때 그는 도원수 홍경래의 참모로 제갈량을 흉내내어 학창의를 입고 부채를 손에 들고서 군대를 둘로

나누어 남진군은 가산,북진군은 곽산을 치게 했다.

봉기군은 27일까지 정주 등 7개군을 점령했으나, 송림·의주 전투에서 관군에 패해 정주성으로 후퇴하여

항전했다.이후 4개월 동안 버티다 4월 \19일 관군에 의해 성이 함락되자 이희저와 함께 도주했으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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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경래의 난                 2019.08.04.일요일,맑음

홍경래의 난은  지역 차별 철폐를 주장한 피지배층의 반란이다.

1811년, 평안도에서 각계각층이 참여한 대규모 민중 항쟁이 일어나 조선 왕조의 말기적 모순과 폐단에 맞섰다. 이들의 항쟁 명분은 서북인에 대한 차별 철폐와 안동 김씨 세도 정권의 타도였다. 이 홍경래의 난은 19세기 중엽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민중 항쟁의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19세기 첫 임금인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이후로 왕권은 급격히 약화되고, 노론 명문가의 세도가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들이 정치를 농단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으면서 나라의 기강은 흐트러지고, 국가 재정의 근간인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의 삼정(三政)이 부정부패의 온상으로 전락하였다. 삼정의 문란에 따른 피해와 고통은 고스란히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특히 뇌물로 자리를 산 향리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농민들을 수탈했다. 19세기 초 정약용이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지방 향리들을 ‘큰 도적과 굶주린 솔개’에 비유했을 정도다. 또 세도가들이 중앙의 주요 벼슬자리를 독점함으로써, 지방 선비들이 중앙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은 사실상 막혔고, 지방의 신흥 상공업자들도 세도가들이 보호하는 중앙의 상인들에게 밀리면서 경제적 활동을 억압받게 된다.





홍경래(洪景來)의 난을 필두로 한 19세기의 민란에 각계각층이 주도적이고 조직적으로 참여한 것은 이 같은 시대 상황에 대한 피지배계층의 광범위한 불만을 반영한다. 특히 홍경래의 난에서는 ‘조선 왕조 개국 이래 서북인 가운데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서울 사대부는 서북인과 혼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보듯, 지역 차별에 대한 불만이 짙게 깔려 있었다.

항쟁은 홍경래를 중심으로 우군칙(禹君則), 이희저(李禧著), 김창시(金昌始) 등이 주도했다. 용강 출신인 홍경래는 1798년 과거에 낙방하자, 평안도 출신에 대한 차별 때문인 것으로 여기고, 풍수(지관)가 되어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는 병서(兵書)와 술서(術書)를 익혔으며, 정감록에도 능했다. 1800년, 홍경래는 가산에서 역시 풍수인 태천 출신의 우군칙을 만났다. 양반의 서자로 알려진 우군칙은 경서와 병서에 밝은 지식인으로, 홍경래와 함께 시국을 논하다가 봉기를 도모하였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이들은 서북인을 중심으로 세력을 규합했다. 가산의 대상인(大商人)인 이희저는 이들과 뜻을 같이해 군자금을 대기로 했고, 곽산 출신의 진사 김창시는 관직을 얻으려고 서울을 자주 왕래했으나 여의치 않자 불만을 품고 있다가 이들과 합류했다. 이어 정주의 거부인 이침(李琛), 안주 상인 나대곤(羅大坤), 우군칙의 제자로 태천의 향임(鄕任) 가문인 김사용(金士用), 곽산의 평민 홍총각(洪總角), 개천의 몰락한 양반 이제초(李濟初) 등이 합류했다. 이들은 가산 다복동을 근거지로 삼고, 자금 마련을 위해 광산을 채굴하거나 법으로 금지된 물품을 매매하기도 했다.

오랜 준비 기간을 거친 이들은 순조 11년인 1811년 12월 18일, 다복동에서 김창시가 다음과 같은 격문을 공표한 것을 시작으로 1,000여 명의 군사를 일으켰다.

조정은 서토(西土)를 썩은 땅과 다름없이 버렸고, 심지어 권세 있는 집 노비들도 서토의 인사를 보면 ‘평안도 놈’이라 말한다. (……)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왕위에 있으니, 권세 있는 간신배가 날로 치성하여 김조순, 박종경의 무리가 국권을 농간하고 있다. (……) 그러나 다행히 세상을 구할 성인(聖人)이 청천강 이북 선천 검산 일월봉 아래 군왕포 위의 가야동 홍의도에서 탄생했으니 (……) 절대로 요동하지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서북인의 차별에 대한 반감과 무도한 세도 정권에 대한 불만, 여기에 정감록 사상까지 포함시켜 항쟁에 동조할 것을 알린 것이다.

이어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를 맡은 홍경래가 연설을 통해 가야동 정진인(鄭眞人)의 지휘를 받아 거사했다며, 승리를 기원한 뒤 군사를 출동시킨다. 군사는 남진군(南進軍)과 북진군(北進軍)으로 나눴다. 남진군은 홍경래를 중심으로 모사 우군칙, 선봉장 홍총각 등으로 이뤄졌고, 북진군은 부원수 김사용, 모사 김창시, 선봉장 이제초 등으로 구성됐다. 남진군은 가산읍으로 들어가 군수 정시(鄭蓍)를 죽인 뒤 박천읍에 이르렀고, 북진군은 곽산을 별다른 충돌 없이 점령한 데 이어 정주에 입성했다.

그런데 이때 남진군 내부에서 분란이 일어났다. 당초 계획은 박천에 이어 영변을 무너뜨린 뒤 평안도 병영이 있는 안주를 함락시킬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부 인사들은 관군의 반격이 우려되니 곧바로 안주로 나아가자고 주장했다. 서로 티격태격하다가 홍경래는 이마에 부상을 입었고, 이들은 죽임을 당했다. 홍경래는 전열을 다시 갖추기 위해 다복동으로 회군했고, 북진군도 보조를 맞추기 위해 진격 속도를 늦췄다. 봉기군의 자체 내분으로 관군이 시간을 벌 수 있었던 셈이다.

26일, 홍경래는 다시 남진군을 이끌고 안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박천의 송림리에 주둔했다. 북진군은 이틀 먼저 정주에서 선천으로 진격해 선천과 철산을 잇달아 장악했다. 봉기군과 관군이 처음 싸운 것은 29일 송림 전투에서였다. 일전일퇴를 거듭하던 끝에 봉기군은 대패하였다. 평안도에서의 잇단 급보에 놀란 조정이 계속 원군을 보냈고, 이에 봉기군은 수의 열세를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봉기군은 수백 명이 죽고, 30여 명이 생포됐다. 홍경래는 남은 군사를 이끌고 급히 정주성으로 퇴각했고, 관군은 다복동과 박천 등지를 회복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즈음 북진군은 용천을 점령한 뒤 의주로 나아가려다 중간에서 관군에게 밀려 곽산으로 후퇴했다. 그러자 관군도 곽산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시켰으며, 1월 10일 사송야(四松野) 전투에서 봉기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에 북진군도 정주성으로 철수하였다.

당시 정주성에는 인근 박천과 가산 일대의 농민들이 속속 모여들어 항쟁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당초 봉기한 군사보다 농민이 더 많을 정도였다. 관군들이 평안도 일대를 초토화시키며, 양민들까지 적으로 간주해 마구 학살하자, 이에 격분한 농민들이 정주성으로 모여든 것이다. 관군은 연일 정주성을 공략했으나, 죽기 살기로 항전하는 농민들을 쉽사리 꺾지 못했다.

순무영진도

정주성에서 홍경래가 이끄는 봉기군과 순무영군이 맞선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순무영은 전쟁이나 반란이 일어날 때 임시로 설치된 순무사의 군영을 말하는 것이며, 순무사는 이인좌의 난 때 처음 설치된 이래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서 또다시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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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전을 벌이며 승패를 가리지 못하던 중 4월이 되자 관군은 화약으로 성벽을 폭파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관군은 봉기군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성 옆에 모래성을 쌓아 대공세를 펼치며 성의 북장대 쪽으로 몰래 땅굴을 파 들어갔다. 그리고 19일 새벽, 관군은 마침내 땅 밑에 설치한 1,800근의 화약을 터뜨려 정주성을 무너뜨린 뒤, 성 안으로 몰려 들어가 봉기군을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홍경래는 총탄에 맞아 전사했고, 홍총각 등은 사로잡혔으며, 우군칙과 이희저는 달아났다가 이튿날 체포됐다. 당시 정주성에 있다가 체포된 사람은 모두 2,983명으로, 이 가운데 10세 이하 소년 224명과 여자 842명을 뺀 1,917명이 모두 참수됐다. 이렇게 홍경래의 난은 마무리됐다.

홍경래의 난은 지역 차별 철폐를 내세우면서 다른 지역으로까지 봉기를 확산시키지 못했고, 공격 전술을 둘러싼 내분으로 초반의 기세를 이어갈 수 없었다는 점에서 실패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세도 정권을 전복시키려 했던 지도부와 삼정 문란의 개혁에 방점을 둔 일반 농민 사이의 인식 차이도 기본적인 한계로 지적된다. 하지만 관군에게 진압된 이후 10여 년 동안 ‘홍경래가 살아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홍경래의 난은 당시 민중들 사이에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이는 전국 각지의 집단 항쟁과 나아가 동학혁명으로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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