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작성일자; 2008.03.18.화요일,맑음

 

황희

생졸; 1363(공민왕 12)∼1452(문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 구부(懼夫),

호; 방촌(厖村).

가계도;

황석부(黃石富)의 증손

조부; 황균비(黃均庇)

부;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黃君瑞)

모; 김우(金祐)의 딸

출생; 개성 가조리(可助里).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다.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일정 기간 은둔생활(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는 설화)

1394년(태조 3), 태조의 적극적인 출사(出仕) 요청을 수용하여 성균관학관에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를 겸임하였다.

   이 후 직예문춘추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398년, 문하부우습유 재직 중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의했다고 문책되어 경원 교수로 편출되었다가,

1398년(정종 즉위년), 우습유로 소환되었다.

이듬 해 언사로 파직되었다가 그 해 2월경 문하부우보궐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언사로 파직되었으며, 곧 경기도 도사를 거쳐 형조·예조·이조·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01년(태종 1)경 ,지신사 박석명이 태종에게 천거해 도평의사사경력에 발탁되었다.

   그 뒤 병조의랑에 체직되었다가

1402년, 아버지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 해 겨울 군기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다.

1404년,우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인에 오르고, 이듬 해박석명의 후임으로 승정원지신사에 발탁되었다.

1409년,참지의정부사가 되고,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대사헌 등을 지냈다.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 해, 질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1415년, 이조판서 재직중 송사 처리와 관련해 육조에 문책이 내려지면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행랑도감제조에 복위된 데 이어, 참찬·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에는 세자인 양녕대군의 실행을 옹호하다가 다시금 파직되었다.

   그 뒤 조정으로 복귀해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윤,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1418년,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로 유배되고, 곧 남원부에 이치(移置)되었다.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고 아울러 태종의 노여움이 풀리면서,

1422년(세종 4) ,남원에서 소환,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고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1423년, 예조판서에 이어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구휼하였다.

   그리고 판우군도총제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대하였다.

1424년, 찬성,

이듬해에는 대사헌을 겸대하였다.

또한 1426년에는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하였다.

1427년, 좌의정 겸 판이조사가 되었고, 그 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이어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되어 약산성기(藥山城基)를 답사하였다.

   이 때 약산이 요충지라 해서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한 뒤 평안도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하였다.

1430년, 좌의정으로서, 감목을 잘못해 국마 1,000여 필을 죽인 일로 해서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의 일에 개입해

   선처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일국의 대신이 치죄에 개입함은 부당할 뿐더러,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래서 한때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하였다.

1431년, 다시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統理)하였다.

   그리고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처럼 그는 왕을 보좌해 세종성세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리고 1455년(세조1) ,아들 수신(守身)이 좌익공신에 책록되면서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상주의 옥동서원과 장수의 창계서원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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