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명세자    2019.08.05.월요일,맑음

효명세자(추존왕 익종); 제23대왕 순조의 아들

생졸; 1809년(순조9년)-1830(순조30년)

가계도;

부: 제23대 순조

모 : 순원왕후 김씨

   효명세자(익종)

   신정왕후 조씨

       24대 헌종

서모; 숙의 박씨 


조선 제 23대왕 순조의 아들로 안동 김씨 세도 정권에 맞서 개혁을 추진한 인물.

안동 김씨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조선의 현실은 암울하기 짝이 없었고 양반들의 도덕성은 미로에 갇혔고

관리들의 탐학이 극에 달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자연재해와 사회 불안이 겹치면서 백성들은 정든 고향을 떠나 유랑자가 되었다.

망국의 징조였다.

그런 상황에서 무기력한 국왕을 대신해 정사를 도맡은 효명세자는 정조 시대의 영광을 꿈꾸며 다양한 방법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효명세자는 1827년(순 27년) 2월부터 1830년(순조 30년) 5월까지 약 3년 3개월 동안 대리청정에 임하면서 조선을 경영했던 실질적인 국왕이었다.

그는 세도 정권의 일방 독재로 유명무실해진 왕권을 되살리기 위해 탐관오리의 징치,과거제도의 정비 등

다양한 개혁정책을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평범한 방식으로는 고착된 현실을 타파할 수 없음을 깨닫고 '예약'이라는 기발한 무기를 꺼내들었다.

연산군 이래 조선에서 예악이란 혼군의 상징이자 말세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효명세자는 부왕에 대한 효성을 빌미로 전례 없이 화려한 궁중 연회를 주관하면서 옛 이름만 남아

있던 정재들을 되살리고 연향의 규모를 확대함으로써 희미해졌던 군신간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이전의 정재들이 국가 창업의 정당성을 과시하는 춤이었다면 효명세자는 국왕의 권위와 왕실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수단이었다.


1809년(순조9년) 8월9일, 순조의 정비 순원왕후 김씨가 창덕궁 대조전에서 고대하던 원자를 낳았다.

조선 왕실에서 왕비가 원자를 낳은 것은1661년(현종2년) 현종의 정비 명성왕후 김씨가 숙종을 낳은 이래

150년 만에 일어난 경사였다.

실록에 따르면 원자가 태어날 때 오색 무지개가 원중에서 일어나 묘정으로 뻗쳤으며 소나기가 내리고

우레 치는 소리가 들렸는데,아기가 고고성을 터뜨리자 하늘은 즉시 개이고 궁전의 기와에는 오색 기운이

감돌았다고 한다.

순원왕후 김씨는 아기를 낳기 전 용꿈을 꾸었는데,

연 원자는 이마가 튀어나온 귀상인 데다 영기 어린 용안을 지녔다.

궁인들은 아기가 ‘정조와 닮았다’고 수군거렸다.

순조는 크게 기뻐하며 그날로 원자로 삼았다.

태어나자마자 차기 조선의 군주로 예약된 것이다.

1811년(순조11년)12월부터 시작된 홍경래의 난이 이듬해 4월에 이르러 평정되자

순조는 그해 7월 6일 불과 4세의 원자를 세자로 책봉했다.

절차상 종묘에 세자의 이름을 고해야 했으므로 일(日)자에 대(大)자를 붙인 햇빛 대(旲) 자로 정하고 ‘영’이라 부르도록 했다. 그리하여 세자의 이름은 ‘이영(李旲)’이 되었다.


그때부터 효명세자는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의 관료들의 보필을 받으며 국왕 수업을 받았다.

순조는 청백리로 이름 높은 영의정 김재찬을 세자의 사부로 임명했다.

8세 때인 1817년(순조17년)에 성균관 입학례를 치렀고,

1819년(순조19년)에는 경헌당에서 관례를 치르고 덕인이라는 자를 받았다.

그해 4월에는 부사직 조만영의 딸을 최종 낙점하고 혼례를 밀어붙였다.

풍양 조씨 일문의 선두 주자였던 조만영은 대마도에서 구황작물로 고구마를 들여온 이조판서 조엄의 손자로 불의를 사갈처럼 싫어했으므로 조정에서 강골로 인정받았던 인물이었다.

당시 효명세자의 배필이 된 조만영의 딸은 1890년(고종27년)까지 83세의 장수를 누리며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했고,철종이 승하한 뒤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함께 고종의 즉위를 성사시켰던 신정왕후 조씨이다.

그때부터 풍양 조씨 일문이 안동 김씨와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세도정치의 주역으로 발돋움했다.


조만영은 딸이 세자빈이 되자 대사성·금위대장·비변사 제조·예조판서·어영대장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면서 이조판서와 어영대장을 겸임해 인사권과 군사권을 장악했다.

효명세자가 붕어한 뒤에도 형조·호조·예조판서·한성부 판윤·판의금부사·지중추부사 등 요직을 지냈다.


세도 정권의 서슬 때문에 정사에 흥미를 잃고 있던 순조는 궁중의 주요행사에 수시로 효명세자를 데려갔다. 그런 부왕의 뜻을 잘 알고 있던 세자는 내심 자신이 이끌어갈 조선의 미래를 구상하고 있었다.

훗날 조선의 개화를 선도한 박규수와의 만남은 실로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1825년(순 25년) 5월6일, 효명세자는 창덕궁 후원의 요금문을 통해 박규수가 살고 있던 연암 박지원의

옛집 계산초당을 방문했다.

그때 효명세자는 박규수에게 글을 읽고 글씨를 써보게 한 다음 크게 칭찬하고 격려하며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다 삼경이 되어서야 돌아갔다고 한다.


기실 두 사람의 인연은 1823년(순조23년) 5월 단오 다음날이었다.

당시 박규수는 선발된 동몽 중에 한 사람으로 입궐하여 창덕궁 희정당에서 순조를 배알한 다음 단옷날 비가 내린 것을 기뻐하는 내용의 한시를 지었다.

이때 효명세자와 만나 낯을 익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두 사람이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난 1830년(순조30년)에 자하동에서 처음 만난 것

으로 되어 있고, 창강 김택영도 비슷한 기록을 남겼지만 두 사람의 만남은 훨씬 빨리 이루어졌던 것이다.

북학파의 태두였던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는 그 무렵 정체된 조선의 현실과 온갖 부조리로 얼룩진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었다.

효명세자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패악은 물론이고 유교 근본주의에 함몰되어 있던 선비들의 아집, 문화선진국인 청나라를 외면하는 국수주의적 태도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단숨에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그는 박규수와 함께 차근차근 집권 이후의 청사진을 그려나갔던 것이다.

박규수는 그 후 성균관에 입학했고,

1827년(순조27년) 효명세자가 성균관 유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일차전강에서 다시 만난다.

당시 박규수가 주역을 강하고 물러나자 세자는 근신에게 그의 문재에 대한 세간의 평판을 물었다.

때문에 세자가 박규수를 총애한다는 소문이 장안에 널리 퍼졌다.

그때부터 박규수는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효명세자의 대리청정기에 빈번히 실시한 과거에 급제

하지 못했다. 정상적인 시험이라면 충분히 합격할만한 실력이었지만 세도 정권에 충성하는 자만을 가려

뽑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효명세자는 순조에게 청하여 창덕궁 후원의 영화당 북쪽에 있는 독서처를 고쳐짓고 그 곁에 작은 건물을

따로 한 채 지었다.

곧 기오헌과 의두합이다.

과거 주합루가 개혁군주 정조와 규장각신들의 공개된 회의실이었다면 기오헌과 의두합은 효명세자가 홀로 미래의 정국을 구상하는 은밀한 공간이었다.

1827년(순조27년) 2월 9일, 순조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다.

당시 순조의 나이 38세,세자는 19세였다.

전례에 따라 순조는 인재 등용, 형벌 집행, 군사권을 관장하고 나머지 서무는 모두 세자가 직접 처결하게

되었다.

드디어 정사를 맡게 된 효명세자는 부조리하고 나태한 현실을 적극적으로 개선했다.

우선 안동 김씨 일파가 장악하고 있던 비변사 당상들을 감봉 조치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어서 초산 출신의 탐관오리 서만수를 징치하고 우의정 심상규를 축출했으며 부왕 순조를 기만한 조봉진을 유배형에 처했다.

세자는 또 세도가문의 등용문으로 변질된 과거제도의 부정과 비리를 혁파하고 50여 차례의 과거를 실시하여 전국의 인재들을 끌어 모았다.

이때 김노, 홍기섭, 김노경, 이인부 등의 신진세력이 조정에 대거 진출했다.

이들은 대부분 외척의 세도정치를 반대하는 노론 청명당 계열이었으므로 안동 김씨 일문은 자못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세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인 조만영과 그의 동생 조만영, 조종영, 조병현 등 풍양 조씨 일문을 중용하여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했다.

이들 외에도 추사 김정희와 서준보,서희순, 권돈인,풍양 조씨와 사돈 관계인 이지연․이기연 등이 세자를

굳건하게 보좌했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첫해인 1827년(순조 27년) 부왕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자경전 진작정례의’를

행했고,

1828년 모후 순원왕후의 40세 생일을 기념하는 ‘무자진작의’,

1829년 순조 등극 30년과 탄신 40년을 기념하는 ‘기축진찬의’ 등 크고 작은 연회를 11회나 주관했다.

당시 세자는 궁중행사의 전 과정을 지휘하면서, 연회에 사용하는 정재의 종류와 순서를 직접 관장했다.

그 과정에서 무려 53종의 궁중 정재 가운데 26종의 정재를 직접 만들거나 재창작했다.

그는 짧은 생애에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지만 정재 부문에서 단연 발군의 실력을 드러냈다.

1828년(순조 28년)에 벌어진 연회에서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85명의 기생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정재를 가르쳤다.

당시 기생들은 장악원에 머물며 전악 김창하의 지도하에 효명세자가 쓴 창사(정재에서 쓰이는 노래)과 가무를 익히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효명세자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춘앵무'는 여령이 꾀꼬리를 상징하는 노란 복색으로 화문석 위에서 추는

독무이다.

또 '무산향'은 침상 모양의 대모반이라는 이동무대에서 추는 춤으로 왕의 총애를 받는 여인의 기쁨을 표현

했다. 그때까지 전해지는 근엄한 정재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연습을 마친 여령들은 궁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연회의 리허설을 펼쳤다.

고지식한 신료들은 궁중에 천한 기생들이 활보하자 낯을 찌푸렸다. 그

 중에 박기수란 인물이 공식적으로 불만을 토로하자 효명세자는 연회의 참뜻을 왜곡했다며 호남지방으로

귀양 보냈다가 사면해 주었다.


박기수는 당시 세종 시대의 전례를 제시하며 꾸짖는 세자에게 자신이 잘못 알고 있었다면서 정식으로 사죄했다. 세자는 그처럼 궁중의례를 통해 보수적인 신료 길들이기까지 했다.

효명세자가 만일 왕권 신장을 내세우며 노골적으로 철권을 휘둘렀다면 즉각 신료들의 탄핵에 직면하고

연산군이나 광해군 꼴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효심이라는 명분으로 연향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유학의 최고 덕목이었던 충효의 덫에 걸린

신료들은 딴죽을 걸지 못했다.

여기에는 또 세자의 배경세력을 자임했던 안동 김씨의 후광이 큰 역할을 했다.

“저하를 그냥 내버려 둬. 어쨌든 그분은 우리 편이야.”

효명세자가 기획한 궁중연회는 대부분 부왕 순조와 어머니 순원왕후 김씨를 위한 것이었다. 그때마다 세자는 연향에 필요한 악장과 치사, 전문과 정재를 직접 창작했다. 전통적으로 연향에 쓰이는 악장과 치사는 문신들의 몫이었지만 그것을 일국의 세자가 직접 창작한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 자리에서 세자는 잔치에 참석한 권력의 실세들이 국왕 순조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만수무강을 비는 치사를 낭독하게 했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국왕의 위엄과 권위가 제고되었고 군신 간에 질서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행사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면 세자는 익일회작(翌日會酌)이라 하여 이튿날 애쓴 신료들을 불러 모아 뒤풀이 시간을 가졌다. 그 자리에는 장인 조만영을 비롯해 김노, 홍기섭, 이인보 등 추종세력들이 모두 모여들어 세력을 과시했다.

                

창덕궁은 본래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졌지만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된 뒤 정궁으로 자리 잡았다. 그 후 전쟁과 화재로 인해 소실과 복구를 거듭했지만 건축물과 수목이 잘 보존되어 지금까지도 아름다운 조선왕궁의 실체를 간직하고 있다.

창덕궁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후원은 조선시대의 고아한 정원문화를 보여주고 있는데, 정사에 지친 국왕 일가의 휴식처로서 수많은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이 후원 북쪽 끝자락에 효명세자의 소망이 담긴 연경당이 있다.

                                      

연경당은 화려한 단청과 장식으로 치장한 궁궐건축물이 아니라 일반 사대부 가옥형식을 빌어 지은 집이다. 본래 그 자리에는 보물을 보관하는 진장각(珍藏閣)이 있었다. 일설에는 순조가 궁중생활의 격식에서 벗어나 사대부의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지었다고 하지만 이 건물은 효명세자가 부왕 순조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경사스런 의식을 계기로 지었고, 향후 부왕의 휴식공간의 역할까지 구상한 것이다.

연경당은 무자년(1828년)에 순원왕후 김씨의 보령 40세를 축하하는 연회장으로 이용되었고, 이후 왕실의 로열패밀리들이 춤과 노래를 관람하던 공연장으로 활용되었다. 원래의 'ㄷ'자형 건물구조도 공연 관람의 편의를 위해 설계된 것이다. 연경당 남쪽에는 조립식 담장이 설치되어 대규모 공연 때에는 철거하여 객석을 늘일 수도 있었다.

연경당이란 이름은 사랑채의 당호이면서 건물군 전체의 이름이기도 하다. ‘연경(演慶)’이란 당호는 효명세자가 직접 지었는데 ‘경사가 널리 퍼진다’는 뜻이다. ‘연(演)’ 자에는 ‘늘이다’, ‘널리 펴다’라는 뜻 외에 공연(公演)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연경당의 정문인 장락문(長樂門)은 낙선재의 대문 이름과 똑같은데 ‘길이 즐거움을 누린다’라는 뜻이다. 연경당의 사랑채 문으로 솟을대문으로 만들어진 장양문(長陽門) 역시 ‘길이 볕이 든다’는 뜻이니 앞서의 뜻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연경당의 동쪽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농수정(濃繡亭)은 겹처마 네모지붕으로 꼭대기에 절병통이 꽂혀 있다. 절병통(節甁桶)이란 사모정이나 육모정, 팔모정 따위의 지붕 꼭대기에 세우는 기와로 된 탑 모양의 장식이다. 정면 측면이 각 1칸씩이고 만자(卍字) 무늬의 사분합(四分閤) 문으로 구성하여 모두 들어 올릴 수 있게 했다. 조선 왕실의 신앙이 새삼 불교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만 같다. 농수(濃繡)’는 ‘짙은 빛을 수놓는다.’는 뜻이다. 개화기에 조선을 찾아온 미국인 천문학자 퍼시벌 로웰이 고종의 사진을 찍은 장소로 유명하다.


대리청정 만 3년째에 접어들면서 효명세자가 펼친 예악정치의 영향으로 군신간의 질서가 어느 정도 잡혀가고 있었다. 그러나 1828년(순조 28년)부터 전국을 휩쓴 수재와 한재가 달리던 세자의 발목을 잡았다.

위기를 느낀 세자는 백성들의 구호에 전념하면서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지방수령의 비리를 색출했다. 그러자 암중모색하며 세자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던 세도정권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829년(순조 29년) 4월, 대사헌 김이재가 세자에게 근면함을 권하는 상서를 올렸다.

“공자께서는 ‘만일 나를 쓰는 자가 있다면 1년만 하더라도 괜찮겠지만 3년이면 이루어짐이 있을 것이다’란 말을 하셨습니다. 한데 저하께서는 3년 동안 나라를 경영했는데도 야박한 풍속이 고쳐지지 않고, 기강이 바로잡히지 않았으며, 민생이 회복되거나 재용의 축적, 언로의 해방 등 전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새삼 정치하는 뜻을 바로세울 때입니다.”

순조가 친정을 하던 20여 년 동안 민란과 흉년이 이어지는 도탄지경에서도 태평성대를 노래했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불과 3년여의 대리청정을 두고 세상을 제대로 바꾸지 못했다고 힐난하면서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고 작은 즐거움에 미혹되지 말라고 충고했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효명세자가 김노, 김노경, 홍기섭 등 측근들을 중용하면서 영·정조 시대의 탕평책을 흉내 내는 형국을 비판한 것이었다.

그 동안 효명세자는 예악정치를 빌미로 왕권회복을 위한 행보를 걸었지만 그들은 별로 동요하지 않았다. 한데 그가 소외되었던 노론 청명당 후예들을 필두로 소론과 남인 계열 인사들을 등용하면서 자파의 주구인 삼사의 관원들을 압박하고, 급기야 안동 김씨 세도정권의 실세인 김교순 부자에게까지 창끝을 디밀며 자파인 지방수령들을 숙청하는 형국에 이르자 거세게 반발했던 것이다.

그들은 효명세자의 국정수행능력이 부족하다면서 과거 정조가 남긴 오회연교를 빌미로 사림 청론의 조정 진출을 봉쇄하고자 했다. 바야흐로 세자와 세도정권 사이에 일대결전이 불가피하게 보였다. 그런데 양측에 긴장감이 짙어지던 1830년(순조 30년) 4월 22일 밤, 잦은 기침을 하던 세자가 갑자기 피를 토했다. 약원에서는 급히 탕재를 대령했지만 증세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갖은 처방을 다해도 효험이 없자 전 승지 정약용까지 불러들였다.

그 무렵 향리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정약용이 급히 입궐해 세자의 증세를 살폈는데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백약이 무효하다는 사실을 알고 약재가 없다는 빌미로 시간을 끌었다. 결국 5월 6일 새벽 희정당 서협실에서 세자는 숨을 거두었다. 22세의 창창한 나이였다. 그가 정치적으로 미묘한 상황에서 요절했으므로 일부 학자들은 과거 소현세자나 경종 임금의 선례에 비추어 독살설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전해지고 있는 기록으로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세자는 사후 ‘효명(孝明)’이란 아름다운 이름으로 치장되어 역사 속에 묻혀버렸다. 아울러 조선의 중병을 치유하고 왕권을 회복하려 했던 원대한 포부는 깨끗이 사라지고 파탄지경의 정재를 발전시켰다는 예술적 허명만 남았다. 그것은 한 나라의 경영자에게 바치는 칭송치고는 기실 조롱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의 부음을 들은 박규수는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자신의 호에서 굳셀 환(桓) 자를 입을 다문다는 뜻의 재갈 환(瓛) 자로 바꾸고 20여 년간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처럼 효명세자의 죽음은 당대 조선의 개혁과 변화를 꿈꾸던 인재들에게는 절망적인 뉴스였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3년, 그 짧은 시기는 양난으로 멸망지경에 이른 조선이 영·정 시대를 거쳐 재기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였다. 부패한 관료와 양반들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의 반발로 민란이 속출하고 천주교로 대변되는 서구 세력의 동진이 가시화되는 상황에서 그가 시도한 개혁의 의미는 실로 자중한 것이었다. 그의 좌절과 함께 새로운 조선을 꿈꾸던 이 땅의 젊은 지식인들은 아득한 절망감과 함께 서쪽에서 다가오는 공룡들의 포효를 들으며 전율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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