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장세자(경의군;孝章世子-주촌왕 진종)             2019.07.30.화요일,맑음

효정세자; 이  행(緈)

생졸; 1719년(숙종45년)-1728년(영조4년)


노론과 소론이 각축전을 벌이던 경종대 후반,

왕세제로 책봉된 연잉군 이금은 목호룡의 고변으로 벼랑 끝까지 내몰렸지만 이복형 경종의 강력한 비호로 인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보위에 오른 뒤에도 그는 정적인 소론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1728년(영조4년)3월,이인좌,정희량,박필현 등 소론 급진파인 준소와 남인이 합세하여 무신난을 일으켰다.

갑작스런 반란에 영조는 크게 당황했지만 곧 북상하던 이인좌의 반군을 제압하고 영남과 호남의 잔당까지 평정함으로써 사태를 조기에 수습했다.


한데 그해 11월 외아들 효장세자가 갑자기 병석에 눕더니 홀연 세상을 떠났다.

효장세자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심지가 굳었으며 효성이 지극했으므로 그를 잃은 영조의 슬픔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730년(영조6년) 3월, 궐내에서 매흉 흔적이 발견되면서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수사 결과 무신난에 연계된 소론과 남인 일파의 조종을 받은 궁녀들이 창덕궁 일대에 인골과 저주물을 묻어놓았고,과거에는 그런 흉물을 음식물에 섞어 세자와 갓난 옹주들에게 먹인 사실이 밝혀졌다.

비로소 효장세자의 사망 원인을 알게 된 영조는 분개하여 그 동안 펼쳐왔던 탕평책을 철회하기에 이른다.

그로 인해 정국은 노론의 일방독주로 귀결되었고 소론은 재기불능의 상태로 추락하고 말았다.

     

1719년(숙종45년) 2월 15일 영조와 정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빈 이씨는 이준철의 딸로 동궁전 나인이었는데 영조가 왕자 시절 사가로 불러들여 첩으로 삼았다.

효장세자는 숙종의 첫 손자이자, 그의 생전에 태어난 유일한 손자였지만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상중에 태어난 탓에 '숙종실록''경종실록' 출생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1720년(숙종46년), 경종이 33세의 나이로 즉위했지만 병약하여 원자를 얻지 못하자 후계와 관련된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심해졌다.

이듬해인 1721년(경종1년) 8월,연잉군이 노론의 적극적인 공세에 힘입어 왕세제가 되었다.

그와 함께 이씨는 내명부 종5품 소훈이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해 10월 노론은 조성복의 상소를 통해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면서 정쟁을 격화시켰다.

그 결과 12월 소론 강경파였던 김일경의 탄핵으로 조성복과 이를 배후에서 조종한 김창집·이이명·이건명·

조태채 등 노론 4대신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1722년(경종 2년) 3월 연잉군의 측근이었다가 변심한 목호룡이 노론측에서 경종을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그 과정에서 소훈 이씨가 죽었다고 고변했다.


이를 기화로 노론 4대신이 처형당하고 수많은 노론 인사가 축출되면서 소론이 정권을 잡았다.

이 사건이 영조가 평생 노론으로부터 의리론으로 발목을 잡히게 된 신임사화이다.


1724년(경종 4년) 영조가 즉위하면서 희생자들의 혐의는 모두 목호룡의 무고로 치부되었고,

이씨의 죽음에 대해서도 흐지부지 넘어갔다.

이때 소훈 이씨는 내명부 정4품 소원에 추증되었고 아들 이행은 경의군에 봉해졌다.


     

1725년(영조1년) 2월 25일, 우윤 심정보가 경의군을 왕세자로 봉하자고 상소했지만 영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튿날에는 예조판서 민진원이 재차 세자 책봉을 간청했다.


“지금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우니, 제일 먼저 힘써야 할 것은 일찍이 국본을 정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영조는 그와 같은 신료들의 연이은 간청에도 가타부타 뜻을 밝히지 않고 고심하는 자세를 취하더니,

그날 밤 4경에 갑자기 2품 이상 육조의 장관과 양사·옥당을 소환한 다음 경의군 이행을 왕세자로 봉한다는 교지를 내렸다.

이틀 뒤인 27일에는 왕세자의 생모인 소원 이씨를 내명부 정1품 정빈으로 추증했다.

이는 세자 책봉이 노론 정파의 뜻이 아니라 군왕인 자신의 의지라는 것을 내외에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다.


그해 3월 20일, 인정전에서 왕세자의 책봉례가 거행되었다.

그때부터 효장세자는 7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서연에 참여하여 제왕수업을 받았다.


그해 3월 26일자 실록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왕세자가 빈객과 상견례를 행했는데, 모습이 의젓하고 행동이 침착했으므로 보는 사람이 흠모하여 감탄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해 11월 26일 호조판서 신사철은 명나라 사신이 세자를 만나본 다음 극구 칭찬했다는 말을 영조에게 전했다.

“칙사가 세자를 보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면서 역관에게 말하기를 귀국의 세자는 중국에서도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는데, 내가 돌아가서 황제께 말씀드리면 반드시 내려주는 물품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효장세자는 아버지 영조를 빼닮아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했다.

어느 날 젊은 내관 두 사람이 말다툼하면서 시끄럽게 굴자 세자는 나이 많은 중관을 부르더니 그들을 가리키며 다시는 자신을 모시지 못하게 하라고 일렀다.


중관이 까닭을 물으니 세자가 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좀 전에 내 앞에서 서로 다투어 공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중관은 세자에게 그와 같은 처분은 임금에게 여쭈어야 한다면서 앞으로 조심하도록 하겠다고 달랬다. 세자는 평소 중관과 함께 학문에 몰두할 뿐 젊은 내관들과 가볍게 어울리지 않았다.


호기심 많을 나이인데도 장난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신기한 물건이 있으면 한 번 쳐다볼 뿐이었다.

어느 날 서운관에서 탁상 시계인 문신종(問辰鐘)을 바치자 그냥 서당에 놓아두었다.

한데 젊은 내관이 그것을 구경하다 잘못 건드려 고장이 나버렸다.

영조가 서당에 찾아왔을 때 중관이 그 일을 고하면서 내관을 처벌해 달라고 청했다.

하지만 영조는 우연히 일어난 불상사이니 문책하지 말라고 명하자 곁에 있던 세자가 빙그레 웃었다.

영조가 까닭을 물으니 세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런 하찮은 물건 때문에 내관을 처벌하라는 것이 가소로워 웃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영조는 만면에 희색을 띠며 즐거워했다.

“세자의 도량이 너그러워 이처럼 용납하니 우리 동방의 복이다.”

    

1727년(영조 3년) 8월, 영조는 삼간택을 통해 풍양 조씨 가문의 이조 참의 조문명의 딸을 왕세자빈으로 정했다. 이어서 9월 9일 왕세자의 관례를 치르고, 그달 29일에 혼례를 치렀다.

세자의 나이 9세, 세자빈은 세 살 연상인 12세였다.

세자빈 조씨는 성품이 온유하고 다정다감해서 시아버지 영조의 마음에 쏙 들었다.

똑똑한 왕세자와 착한 며느리를 바라보면서 영조는 당쟁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조정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행복은 길지 않았다.


1728년(영조 4년) 3월, 안성의 이인좌를 필두로 호남의 박필현, 영남의 정희량, 경기의 권서린 등 소론 준소 인사들이 평양병사 이사성, 금군별장 남태징 등과 내통하고 밀풍군 이탄을 옹립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다행이 소론 완소계열의 영의정 이광좌, 병조판서 오명항 등이 발빠르게 대응하여 반란은 한 달만에 진압되었다.


영조는 당쟁이 국왕을 끌어내리려는 반란으로 비화하자 새삼 붕당의 폐해를 절감했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이견으로 비롯된 당쟁은 엄연한 현실이었으므로 국왕으로서 이를 무작정 배척하기보다는 조정에서 양자를 공평하게 대우하는 탕평책을 구상했다.

한데 그해 11월 들어 효장세자가 갑자기 병석에 눕더니 그달 16일에 경복궁 자선당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실록에는 당시의 정황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밤 3경 1점에 왕세자가 창경궁의 진수당에서 훙서했다.

이날 종묘와 사직에서 두 번째 기도를 거행했는데, 밤에 병이 더욱 심해져 해시에 숨을 거두었다.

임금이 영의정 이광좌, 병조판서 조문명 등을 붙잡고 ‘종묘사직을 장차 어찌할꼬.’ 하면서 슬피 울다가 한참만에야 그쳤다.”

졸지에 믿고 사랑했던 외아들이자 든든한 후계자를 잃은 영조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시 35세의 장년이었던 영조는 친히 왕세자의 상을 받들어 재실에 내린 다음 부왕 숙종이 남긴 용포를

재실에 넣고 또 다시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기어코 여기 들어갔구나. 한 번 여기에 들어갔으니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그처럼 임금이 자식을 잃고 애절하게 통곡하자 입시하고 있던 신하들까지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쳤다.

예로부터 자식이 먼저 죽으면 ‘참혹한 슬픔[慘慽]’이라고 한다.

영조는 효장세자를 잃고 실로 애간장이 끊어지는 듯한 아픔을 겪었던 것이다.


그해 12월 2일 신료들은 죽은 왕세자의 시호로 장효(莊孝), 효장(孝章), 장헌(章獻) 셋을 추천했다.

그러자 해를 넘긴 1729년(영조 5년) 1월 13일에 영조는 왕세자의 시호를 효장(孝章)으로 정했다.

지혜롭고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을 효(孝)라 하고 경건하고 신중하며 고상하고 현명한 것을 장(章)이라 했다.

효장세자의 급서는 가례를 치른 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세자빈 조씨에게도 크나큰 충격이었다.


합방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청상과부가 되어버린 그녀는 남편의 상여가 나가던 날 자리에 누운 채 울면서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다. 시아버지 영조가 그녀를 달래며 곡기를 권하자 세자빈은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미 후사가 없으니 산들 무엇하겠습니까?”



그로부터 2년 뒤인 1730년(영조 6년)에 3월, 효명세자의 사인이 밝혀지면서 한동안 조용하던 조정에 피바람이 불었다. 영조가 궐내에 행차하다가 여러 전각 근처에서 흉물이 묻혀있는 흔적을 발견하고 의금부에 조사를 명했던 것이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소론 일당의 지시를 받은 궁녀 박순정, 김순혜, 무당 태자 등이 과부 이세정으로부터 건네받은 사람의 뼛가루를 창경궁의 양화당, 동궁, 빈궁의 침실 등에 묻었고, 예전부터 그것을 왕세자와 여러 옹주의 음식에 타 먹였던 것이다.

영조는 비로소 효장세자의 죽음이 저들의 지속적인 매흉(埋兇)과 화흉(和凶) 탓임을 알게 되었다.

그달 9일자 실록의 기사에는 분개한 영조의 목소리가 가감없이 실려있다.



‘저번에 거동했을 때 내전을 경계하며 지킨 적이 있었는데, 그때 비로소 수상한 흔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빈궁으로 가는 길에 곧 그 흔적을 붙잡게 되었는데, 대체로 창경궁 근처는 한 조각도 깨끗한 땅이 없었다. 그래서 박순정에게 매흉한 곳을 가리키도록 하고 파보았더니 뼛가루와 뼛조각 및 쇠기름 같은 물건들이 곳곳에 있었고 빈궁 및 옹주방의 담장 밖에도 모두 묻은 데가 있었다. 이 얼마나 흉악한 속셈이란 말이냐.’

궐내에서 매흉과 화흉을 주도한 박순정은 효장세자를 두 살 때부터 일곱 살 때까지 보살폈던 최측근 궁녀였으니 영조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효장세자가 요양을 위해 거처를 옮겼을 때도 계속 따라다니며 독수를 펼쳤다.


그녀가 세자에게 먹인 뼛가루의 재료는 대현산의 여러 무덤에서 채취했거나 길가에 거적으로 말아놓은

시체, 혹은 불에 탄 사람의 해골이었다.

끼니 때마다 그처럼 비위생적인 흉물을 섭취한 효장세자는 단기간에 위중한 상태에 빠져들었고,

병의 원인을 알 리 없는 의관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마침내 효장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박순정 일당은 세자의 동복 누이동생인 화순옹주에게도 화흉을 저질렀다. 그 무렵 화순옹주는 홍진과 함께 하혈 증세로 시달렸다.


박순정은 새로 태어나 강보에 싸인 네 명의 옹주에게도 독약을 먹였다고 자백하여 영조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사건 당일 영조는 대신들과 사헌부, 사간원, 의금부 당상, 좌·우포도대장을 불러들인 다음 새벽 3시에 국청을 열고 죄인들을 심문했다.

그리하여 주모자 박순정과 이세정, 그들을 도와 궐내에 흉물을 묻거나 죽에 타서 먹인 시비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이듬해 10월까지 계속된 수사에서 전라감사 정사효의 군관을 지냈던 박도창과 정사효의 첫째아들 정도륭, 둘째아들 정도중 등이 배후인물로 밝혀졌다.


모두가 지난 무신난의 역도들과 관련된 인사들이었다.

박도창은 여종 하복랑을 궁궐로 들여보내 궁녀들에게 흉물을 넘겨주었고, 소요되는 비용은 정도륭이 지원했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소론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론을 제거해야 하고, 노론을 제거하려면 그들이 받드는 영조를 제거해야 했다.

바로 그 시작이 임금의 피붙이인 세자와 옹주들의 제거였다.


엽기적인 매흉·화흉 사건의 수사가 진행되고 있던 4월 중순, 19세의 어린 환관 최웅필이 한밤중에 궁궐에 침입하여 화약을 훔쳐 방화하려다 기찰하던 군사에게 체포되었다.


부쩍 의심을 품은 영조가 앞서의 사건 관련성을 의심하여 엄중한 심문을 명했다.

심한 매질을 견디지 못한 최응필은 자신이 정사효의 일가붙이인 남인 박재창의 지시에 따라 일단의 노비들을 궐내에 잠입시켜 불을 지르고, 궁인들이 놀라 뛰쳐나가면 자객 이태건으로 하여금 임금을 죽이려 했다고 자백했다.


연이어 일어난 이 두 가지 사건은 궁궐 안에 해코지를 하면서 불을 지르거나 저주물을 묻어 영조의 피붙이들을 제거함으로써 왕실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온건한 방법[緩手]의 역모였다.


여흥군 이해의 오촌 이엽이 구상한 이 계획은 급진적 방법[急手]의 역모인 무신난이 실패로 돌아간 뒤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겨진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영조 등극 초기에 소론 강경파와 남인에 의해 벌어진 복잡다단한 역모의 진상이 완전히 밝혀졌다. 무신년에 이인좌, 이사성 등이 시도한 급수는 밀풍군을 추대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경술년에 권중경, 권숙경, 심상관 등이 주도한 완수는 여흥군 이해나 여릉군 이기를 염두에 두고 효장세자를 살해함으로써 목표에 한 발자국 다가섰지만 눈썰미가 남달랐던 영조에 의해 꼬리가 잡혀 일망타진되고 말았던 것이다.



1735년(영조 11년) 3월 16일, 영조는 맏며느리 조씨를 현빈(賢嬪)으로 책봉했다. 현빈은 그 후 사고무친한 대궐에서 한많은 세월을 보내다 1752년(영조 28년) 11월 초순, 돌연 병석에 눕더니 남편의 기일을 하루 앞둔 14일에 창덕궁 의춘헌에서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의 회고에 의하면 본래 효장세자의 기일과 현빈의 어머니의 기일이 같은 날이었다.

그 때문에 현빈은 매년 11월이 되면 오면 음식을 삼갔으므로 토황증이 여러 해 누적되어 병을 얻었다고

한다.



그녀는 평소 시아버지 영조에게 효성을 다했는데, 방안의 의자가 차가울까 염려하여 요를 깔아놓아 따스하게 덥혔고, 늘 영조가 좋아하는 반찬을 만들어 수라상에 올리곤 했다.

영조는 죽은 현빈의 처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삶은 밤이 소반에 담겨있는 것을 보고 더욱 애달파했다.

그녀는 몸이 아파서 밤을 삶아놓고도 바치지 못했던 것이다.


“아, 슬프다. 무신년에 눈물에 뒤범벅이 되어 효장의 행록을 지었는데, 이제 이 효부의 행록을 또 다시 눈물에 뒤범벅이 되어 쓰는구나. 멀리 푸른 하늘을 바라보니 억장이 무너진다. ……임신년 정월 11일에 시호를 효순(孝純)으로 내렸다. 불쌍한 나의 효부여! 걸맞는 시호를 얻었도다. ……내가 늙은 나이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들과 며느리의 행록을 지었으니 감회가 어떠하랴. 그러나 옛 슬픔과 지금의 슬픔으로 이 아픈 마음을 어떻게 비유할 수 있을까. 눈물 흘리고 오열하며 쓰노라니 밤은 어찌하여 이다지도 깊으냐!”


효장세자는 훗날 이복동생 사도세자가 폐서인되면서 세손이 양자로 입적되자 승통세자라는 별호를 얻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19일 정조는 영조의 유지에 따라 효장세자를 진종대왕(眞宗大王)으로,

현빈을 효순왕후로 추숭했다.

1908년 대한제국 황제 순종에 의해 진종은 소황제, 효순왕후는 효순소황후로 함께 추존되었다.

어린 나이에 부부로 맺어졌다가 1년만에 사별한 효명세자와 현빈은 그처럼 황제와 황후로 대접받았지만,

그들의 잃어버린 삶은 무심한 세월 속에서 진토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경기 파주 공순영릉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 위치한 공순영릉(사적 제205호)과 홍살문.

  이능은 공릉과 순릉, 영릉 등 3개의 능을 합쳐 부르는 이름이다.

  공릉은 조선예종의 왕비 장순왕후의 능이고,순릉은 조선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의 능,영릉은 영조의 큰

  아들 효장세자와 그의 비인 효순왕후 조씨의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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