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흥선 대원군               2019.08.15.수요일,흐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 조선왕26대 고종의 아버지로써 국태공

생졸; 1820-1898


흥선대원군은 왕이 아니면서 왕보다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고 국태공이란 최고의 존호를 받은 사람이다.

조선왕 24대인 헌종과는 7촌 아저씨 사이였고,그 뒤를 이은 25대인 철종과는 6촌간이었다.

철종이나 흥선군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지만,그들의 조부는 모두 서출이었다.

사도세자가 벽파에게 몰려 죽고 난 뒤 주동자인 노론 세력은 은언군(철종의 조부)을 강화도로,

은신군(흥선군의 조부)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그로부터 순조와 철종의 외척인 안동 김씨의 문벌 정치 아래서 이들 자손은 눈엣 가시처럼 냉대를 받았다.

그런데 헌종과 철종에게서 후사가 없자 이들은 왕위를 넘볼 수 있는 처지가 되었다.

안동 김씨 세력은 왕위를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으며,왕위에 앉혔는데 그가 바로 철종이다.


이런 처지에 똑똑한 체하며 왕위를 넘보다가는 목숨을 날려야 하는 것이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제법 똑똑한 체하며 왕위를 넘보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은 이하전의 경우가 본보기였다.

이런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흥선군은 안동 김씨에게 붙을 수도 없고 자기 의지대로 살 수도 없었다.

흥선군은 관례대로 가까운 왕족,종친에게 주는 종친부의 하찮은 벼슬도 해 보았고,아무 실권도 없는 사복시 제조,오위도총부 도총관 따위를 얻어 해 본 적도 있었다.
흥선군은 하찮은 벼슬을 하면서도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며 직무에 충실했고 인물을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용인술 또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벼슬에 연연하는 것은 안동 김씨에게 빌붙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허상의 껍질을 깨고 차라리 난봉꾼 같은 파락호로 전락했다.

그가 파락호로 생활할 때 세상 사람들은 처음에는 안동 김씨들의 주목에서 벗어나려는 위장술 정도로 생각했으나 그의 위장술은 철저했다.

그는 일부러 안동 김씨들의 잔치에 나타나 모르는 체하며 술과 안주를 집어먹었다.

또 벼슬아치들의 놀이나 시회가 있으면 어김없이 나타나서 남은 음식들을 깡그리 해치웠다.

그 꼴을 보며 안동 김씨들과 벼슬아치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는 여염의 상가에도 거리낌없이 찾아들었고,목로주점에 앉아 시정배들과 어울려 막걸리를 마셔 댔다.

종친의 신분으로 군(君)이라는 대감의 품계를 지니고 있는 처지로는 이만저만한 탈선이 아니었다.

                                      



안동 김씨들은 현재의 왕인 철종에게까지 ‘강화도령’이라는 별명을 붙이고 있는 판이라,

그에게도 처음에는 좀 점잖게 ‘궁도령’이라 부르다가 뒤에는 ‘막걸리 대감’, ‘상갓집 개’라고 불렀다.

이런 수모에 한점 관심도 두지 않고 그의 난행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갔다.

그는 종로의 장사치들이나 무뢰배(일종의 깡패)들과 어울려 투전판에도 뛰어들었고,

때로는 그들과 짜고 사기 투전판을 벌였다.
돈이 떨어지면 난초를 그려 대가들에게 팔아 달라고 구걸했으며 때로는 그럴 듯한 표구까지 곁들여 돈을

우려내곤 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술주정꾼이나 투전꾼이 아니었다.

‘상갓집 개’ 시늉을 하면서 안동 김씨들의 동태를 예리하게 살펴보고 정계의 추이를 면밀히 관찰했다.

철종은 후사가 없었고 병골이라 언제 국상이 날지 몰랐다. 그는 국상이 날 때의 사태에 대비했다.

만약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한다면 왕위는 누가 이을 것인가?

이 절대의 권한을 쥐고 있는 것이 헌종의 어머니요 익종의 비인 조대비였다.

조대비는 궁중에서 가장 높은 어른으로 자기 친정인 풍양 조씨가 안동 김씨에게 밀려난 것을 늘 원통하게

생각하고 있는 처지였다.

보잘것없는 남은 종친들이 모두 안동 김씨에게 빌붙어 있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흥선군은 조대비의 친정 동생 조성하에게 은밀히 접근하여 조대비에게 다리를 놓게 했다.

흥선군은 조대비에게 자기는 안동 김씨에게 빌붙지 않았음을 알리고 둘째 아들 익선군이 영특함을 은근히 자랑했다. 한편 어린 둘째 아들에게는 제왕의 몸가짐과 학문을 끊임없이 연마하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의 꿈이 이루어질 때를 대비해서 술청이나 투전판에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염탐하고 민심의 동태를 끊임없이 파악했다.

술친구이자 사기 투전 패거리를 풀어 치밀하게 정보를 입수하기도 했다.

이들은 궁녀의 오라비들로 천희연,하청일,장순규,안필주 등의 무뢰배였다.

이들은 흥선군의 오른팔로 흥선군이 두들겨 맞으면 구해 주고 흥선군의 투전 밑천이 떨어지면 어디서든

구해 왔다.

또 안동 김씨 가운데 김좌근,김병익 부자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불만에 차 있는 김병학,김병국과 사이를

두텁게 해 두기도 했다.


1863년 겨울,철종이 죽자 흥선군은 재빨리 움직였다.

철종의 죽음을 안동 김씨들보다 한 발 먼저 알아냈고 조대비의 친정동생인 조성하를 통해 조대비를 만나

각본을 짜 주는 한편,원로 대신이면서 안동 김씨가 아닌 정원용,조두순에게 흥정을 했다.

고종의 대통 논의에 반대하지 않는 대가를 제시한 것이다.

조대비는 옥새를 거두어 안동 김씨의 반대 기회를 봉쇄하고 일사천리로 재황의 왕위 계승을 공표했다.

자기 패라고 믿었던 정원용,조두순까지 찬성하는 모습을 본 안동 김씨 세력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말았다.

찬란한 조복을 차려 입은 흥선대원군의 빛나는 눈빛,당찬 걸음걸이,위엄이 깃든 목소리 앞에서 안동 김씨들은 쩔쩔맸다. 목숨만이라도 살려주기만을 바랐다.

섭정 이하응,국태공 이하응이었다.

이제 그는 500년 왕권을 쥐고 흔들게 된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원리’대로 새 인물을 등장시켰다.

그는 이 나라의 당색을 떠나 인재를 고루고루 등용했다.

남인이건 북인이건 쓸만한 인재면 경상도에서도 불러오고 충청도에서도 불러왔다.

그러면서 조두순을 영의정으로,김병학을 좌의정으로,정원용의 아들을 판서로 기용했다.

문벌과 지연과 당색을 고루 기용한 실로  거국내각이었다.

안동 김씨 세력의 우두머리인 김좌근과 김홍근의 벼슬을 떼고,

김병익,이유원 등 좌천시키고,

그들이 모은 재산을 조대비궁에 바치게 했다.


노론 계열인 안동 김씨들은 세도가 무너지고 재산을 빼앗겼으나 목숨을 부지한 것만도 다행으로 여겼고,

백성들은 이제야 살길이 생기나 보다고 생각했다.

무리들을 전국에 풀어 수탈을 일삼는 수령 방백들을 가려내 처단했고,

여러 가지 명목의 잡세를 균일세로 통일했으며,

관권 위에 군림하며 온갖 폐단을 저지르던 서원의 철폐를 단행했다.

실로 눈부신 업적이었다.
운현궁에는 ‘내가 인재’라고 생각하는 사내들이 들끓었다.

그 집 사랑채는 누구든 출입할 수 있게 늘 문이 열려 있었다.

그는 도통 아부를 싫어했고 흐물흐물한 호인형의 인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서원은 유학자의 위패를 모셔 놓고 철따라 제사를 지내며 학문을 익히고 향촌의 교화를 담당하는 사학기관이다.

려 말기 백운동 서원을 시초로 하여 조선 중기에 본격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했다.

16세기 중엽에 이황의 건의로 임금이 쓴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백운동 서원에 내리고,

읽을 책과 부릴 노비와 경비로 쓸 토지를 내려 주었던 것이다.

이것을 사액서원이라고 한다.

그 뒤 각지에 서원이 설치되었고 기부받는 일이 허락되었다.

서원의 면모를 제대로 갖추기 어려운 곳에는 글을 익히는 재실,제사만 지내는 향사 따위가 생겨나 서원

구실을 했다. 서원에 딸린 토지는 면세되었고,여기에 든 유생은 벼슬줄을 잡기가 쉬웠다.

이에 따라 유학자의 자손이나 제자들은 그 유학자의 서원을 세우는 것이 가장 든든한 양반 밑천이 되었고, 향촌에서 존경을 받고 행세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이리하여 별 내세울 만한 학문적 업적이나 행적이 없는 인물이라도 자손들이나 제자들이 돈푼이나 있고

권력의 줄이 있으면 제멋대로 서원을 세웠다.

18세기에 들어서는 서원이 줄잡아 전국에 1000여 개로 불어났다.

유생들은 온갖 특혜를 누리며 파당을 짓기에 열중했다.

또 원회니 도회니 하는 구실로 몰려 다니며 무위도식하는 무리로 전락했고,서원의 원생에 끼지 못하면 행세를 못하는 현실로 변했다.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서원의 증설을 금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서원 중에서도 가장 세도를 부린 곳이

청주에 있는 화양동서원과 과천(오늘날의 노량진 근처)에 있는 사충서원이었다. .

                                      

이곳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에 묵패를 돌렸다.

다시 말해 먹을 조(彫, 도장의 일종으로 서원의 상징)에 묻혀 찍은 문서를 각 관아나 부호들에게 보냈다.

그러면 관아나 부호들은 그 묵패에 찍힌 내역대로 경비를 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내지 않으면 고을 원은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며,서원의 뜰에 잡혀 와 무릎을 꿇게 되었다.
붙잡혀 온 자들이 제대로 토지나 재물을 바치지 않으면 사형(私刑)을 하기도 하고,

관가에 고발하여 가두게 했다(서원에는 감옥이 없으므로).

일단 관가에 잡혀가면 서원의 통지가 있어야 풀려나게 되어 있었다.

유생들은 서원의 임원 따위가 되려고 재물을 바치며 안간힘을 썼다.

거꾸로 서원에서 어느 부호를 점찍어 장의의 감투를 씌우면 싫어도 적당한 토지를 바치고 받아들여야 했다. 이를 거부하면 체포 영장이기도 하고 세금 고지서이기도 한 묵패가 언제 날아들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화양묵패’라고 하면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 묵패의 효력은 관가의 체포영장이나 고지서보다도 훨씬 큰 위력을 발휘했다.

관가의 것은 일정 지역에서만 통하지만 묵패는 전국 어디서나 통하기 때문이다.

사충서원의 서독도 그에 못지않았다.

사충서원에서 편지를 보내면 누구랄 것 없이 그 편지대로 시행해야 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중앙의 사법 기관인 형조나 한성부에 잡혀가기 일쑤였다.

화양동서원 밑에는 이른바 복주촌(福酒村)이라는 게 있다. 이를테면 지정음식점 겸 여관이었다.

서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원회를 할 때면 전국의 유생 수천 수만 명이 몰려들었고 평소에도 수십 수백 명씩 드나드는 탓으로 이곳은 보통 이권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이 복주촌을 상민들이 운영하는 것 같지만 사실 서원의 직영이나 다름없었다.

여기에 종사하는 하인배까지 서원의 특권을 고스란히 누렸다.

곧 군역,부역을 면제받는 것이다.

돈푼깨나 있는 상민들은 이 원노자리를 사서 군역 · 부역을 면제받았고,

 실제 복주촌에서 일하지도 않으면서 이름만 걸어 놓는 경우도 있었다.

그 수가 얼마인지 확인할 기록이 없으나 상당한 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원의 횡포는 그 서원에 모시는 인물이나 그 서원 계통의 위력에 따라 차이가 있을 뿐, 전국에 걸쳐 자행된 폐단이다. 서원은 사회적 부정, 정치적 비리의 온상이었다. 더구나 권력을 끼고 자기네 계통의 정치적 지위를 누리기 위해 조정 일에 시비를 걸거나 붕당을 짓는 일로 조정과 민간이 평온할 날이 없었다.


    
흥선대원군은 단계적으로 서원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맨 먼저 그는 서원의 증설을 금하는 조처를 내렸다. 그리고 서원의 관리권을 서원에 모시는 유학자 본래의 후손(本孫)의 손에서 빼앗아 그 서원이 있는 고을 수령이 주관하도록 했고, 그 경비도 최소한도로 줄여 관가에서 내도록 조처했다. 흥선대원군은 1864년(고종 1)에 조대비를 통해 이런 분부를 내리도록 했다.

우리나라가 유학을 높이고 도학을 중하게 여겨 4~500년 동안 문물을 드러내 놓고 밝혀 찬란히 갖추어졌도다. 그리고 사람이 옛 현인을 높이고 사모하여 서원과 향사를 세운 것은 본래 그 학문을 익히고 그 정신을 밝히려는 것이었도다. 조정에서도 이에 따라 액호를 내리고 토지와 일꾼을 준 것은 그 뜻이 훌륭했고 그 은혜가 두터웠도다.

그런데 어찌하여 말류(末流)의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는가? 글 읽는 소리가 쥐죽은 듯 들리지 않고, 술이나 먹고 다투면서 이기려는 일이나 벌이며, 군역을 피하는 자들이 반이 넘게 정한 원노에 끼어들어가게 하고, 평민을 학대하는 자들이 공공연히 사람들을 잡아들이게 하면서 이익만을 찾아 나서도다. 서로 본받아 사사로이 서원을 이곳저곳에 세워 곳곳마다 서원이 바라다보일 정도이며, 공갈 협박을 일삼고 다투기를 그치지 않도다. 서원 · 향사를 세운 본뜻이 어찌 이러했겠는가?

옛날 현인이 이를 알았다면 반드시 즐거이 제사를 흠향하지 않고 수치로 여겼을 것이다. 이것을 크게 바로잡거나 누습(陋習)을 고쳐서 옛 현인 · 군자의 신령(神靈)에 사죄하지 않을 수 없도다. 이제부터 만일 서원 · 향사를 빙자하여 평민을 침학하는 자가 있다면 관가에서 잡아들여 죄상을 따지지 않을 수 없으니 각 고을에서는 감히 숨겨 두지 말고 낱낱이 잡아들여 아뢰어서 중률(重律)로 다스려 사류의 자리에 끼지 못하게 하라.

사액서원은 토지 3결을 갖추어 법에 따라 면세하는 이외에 만일스스로 3결을 못 갖추었다고 함부로 백성의 토지를 빼앗아 수를 채우려는 자는 일체 적발하여 바로잡을 것이며, 원생과 원노는 비록 정식(定式)이 있으나 그 수가 지나치게 많은 폐단이 있으니 원노나 고지기 등 긴급한 일꾼들만 조정에서 정수를 정해 준 것 말고는 일체 뜯어고쳐서 군액에 채울 것이로다.
- 《고종실록》 권1, 원년 갑자 8월조

위의 조치들은 서원의 부정과 증설을 막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전국의 썩은 유생들은 불만이 커지면서 흥선대원군의 서원정책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이즈음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 등을 겪으면서 척화정책을 펴고, 경복궁의 중건을 서두르며 왕권 강화를 다지는 한편,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란을 수습하느라 서원정책에는 골몰하지 않았다. 이 틈에 유생들은 대원군의 비교적 온전한 서원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대원군이 처음에 서원의 폐단만을 시정하고 철폐까지 단행하지 않은 것은 몇백 년 묵은 뿌리를 쉽게 뽑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횡포를 일삼던 유생들이 반성은커녕 기승을 부리자 일대 용단을 내렸다. 전국의 서원 중에 횡포가 적은 47개소만 남기고 모조리 헐어 버린 것이다. 헐어 버린 서원 가운데 당연히 화양동서원과 사충서원도 포함되었다. 철폐된 서원의 신주는 땅에 묻게 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철원매주(撤院埋主)’이다.

격분한 전국의 유생들은 사생결단으로 들고 일어났다. 떼를 지어 광화문으로 몰려와서 궁궐 앞에서 유학이 어떻고 교화가 어떻고 도학이 어떻다는 따위의 낡아빠진 문투로 엮은 상소문을 들고, 자기네들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버텼다. 흥선대원군은 코웃음을 치며 유생들을 몰아냈다. 민란 중에는 발을 개고 서원에 앉아 있던 유생들은 이 일에는 몸을 벌벌 떨며 대들었지만 흥선대원군의 호령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안간힘을 쓰며 서원의 횡포를 막아 보려던 영 · 정조도 못한 일을 흥선대원군이 해낸 것이다. 서원의 유생들은 기가 한풀 꺾였고, 서원을 빙자해 백성들에게 부리던 횡포도 사라졌다.

흥선대원군의 뛰어난 결단력이 아니고는 누구도 해내지 못할 일이었고, 그 영단으로 몇백 년의 고질이 영영 사라졌다. 흥선대원군이 실세하고 난 뒤 유생들이 화양동서원을 다시 재건하는 따위의 운동을 벌인 것만 보아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가 얼마나 강경했는지를 알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그의 혁신정치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 후기에 들어와 왕권이 권신들에 의해 여지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다. 사색(四色)이 생긴 이래, 노론 · 소론 · 남인 · 북인의 문벌정치라는 독점적 권력체제 앞에서 왕권은 늘 흔들렸다. 심지어 왕의 자리나 왕비의 간택까지 그들 손에 멋대로 놀아났다.

그는 왕권 강화를 위해, 맨 먼저 권력의 집중(섭정인 그 자신의 손안으로)을 다졌다. 척족이 이룬 문벌정치 종식, 양반들이 누리는 특권 배제, 서원을 통한 유생들의 치외법권 철폐, 엄격한 절차에 따라 왕의 손으로 수령을 임명하는 일들이 그것이다. 그는 왕실의 위엄을 중시했다. 그 방법의 하나로 정전(正殿)인 경복궁의 중건을 시작했다. 모자라는 비용을 부호 또는 몰수한 안동 김씨의 재물로 보충했고,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해 재정을 압박했다. 사색을 고루 등용한 것은 ‘기회의 균등’이라는 뜻도 있지만, 실제 신하들의 권력 분산으로 왕권을 강화하는 한 방법일 수 있었다. 그는 척족이 날뛰는 것을 막기 위해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는 사고무친인 민씨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지원세력을 키우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적극적으로 종친을 우대하는 정책을 폈다. 소현세자와 인평대군의 자손들은 역적으로 몰려 많은 핍박을 받았고, 익안대군 · 양녕대군 · 능원대군의 자손들도 소외되어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들 자손을 찾아내 벼슬을 주기도 하고 조상의 제사 경비를 대기도 했다. 인평대군의 후손인 이시원의 조상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는데 이때 이시원을 발탁해 예조판서 · 이조판서의 자리를 주었다.

이도 모자라 1864년에는 엉뚱하게도 종친과(宗親科)라는 이름의 과거를 실시했다. 다시 말해 전주 이씨만 골라서 과거를 보게 한 것이다. 여기에 합격하면 선파(璿派, 임금의 일가붙이) 유생이라고 불렀다. 때로는 초시를 거치지 않고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를 보여 합격시키는 불법을 저지르기도 했다. 전주 이씨들은 어중이떠중이 가릴 것 없이 종친과 시험장에 몰려들었다.

1865년에는 전주 이씨 대동보를 만들었다. 여기에 전주 이씨들은 다투어 이름을 올렸고 담당 벼슬아치는 전국을 돌며 전주 이씨들을 찾아내 이름을 올렸다. 시골에 사는 성이 없던 천민들도 전주 이씨로 위장해 대동보에 이름을 올렸다. 흥선대원군은 대동보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벌였는데 6~7만 명이 몰려들기도 했다 한다. 흥선대원군은 흐뭇해 하며 “내가 나라를 다스리면서 10만 명의 정예 군사를 얻었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리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지원세력을 키우려는 일이라고 해도 지나치게 무리수를 둔 것이다.

    
그는 대외문제에서는 철저한 척화정책을 폈다. 서양 또는 일본세력과의 타협을 거부했고 철저한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다. 국내의 서학세력이 서양과 연결되어 있다고 탄압을 했다. 동시에 동학도 왕조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보아 억눌러 금지했다. 실제 서양과 손을 잡게 되면 청나라를 통해 교섭을 벌여야 하고, 그렇게 되면 전통적 사대질서에 따라 자주권을 상실하게 되는 현실이기도 했다. 이런 정책들도 따지고 보면 왕조를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그는 보수적인 개혁파였다. 서양세력의 도전(병인 · 신미양요)에 맞서 국방을 강화하려고 한때 신무기 개발에 열을 올렸으나, 서양식 기술을 동원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의 기지대로 솜을 듬뿍 넣어 방탄복을 만드는 따위의 아이러니를 연출했을 뿐이다. 사실 그의 제왕다운 면모가 후기에 와서는 점차 퇴색하기 시작했다.

민비(뒷날 명성황후로 추존됨)는 고종이 성년이 되자 친정(親政, 임금이 몸소 정사를 봄)을 권고했다. 왕으로 하여금 아버지에게 기대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제구실을 하라는 것이다. 민비의 꼬드김에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궁실 전용 출입문인 금호문(金虎門)을 막아 버렸다. 민비는 이제 양오라버니인 민승호에게 관직을 내리는 것을 시작으로 계속 민씨들을 등용했다. 다시 민씨 문벌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흥선대원군으로서는 짐작도 못한 일이었다. 흥선대원군이 세력을 잃자, 공평한 인사에 소외되었던 종친들과 악의에 찬 유생들, 묵은 감정을 품고 있던 노론의 찌꺼기들이 들고 일어나 대원군에게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다.

60세를 바라보는 대원군은 운현궁에서 이를 갈았지만 헛일이었다. 그러던 중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척족 민겸호가 맞아죽자, 고종은 아버지를 불러들였다. 칩거한 지 10년, 이제 다시 ‘늙은용’이 물을 얻은 격이었다. 그러나 이 군란의 책임자를 대원군으로 본 청나라는 대원군을 압송해 갔다. 틈을 타서 숨어 있던 민비가 다시 나타났다. 흥선대원군이 중국에 유폐되어 있다가 돌아올 때에 고종은 아버지를 맞으러 남대문까지 마중 나갔다. 이때 부자간에 한마디 말도 오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부자간의 감정이 극도로 상해 있었다.

권력을 놓고 흥선대원군의 형제, 아들들, 아들의 사촌들끼리 원수 사이가 되어 물고 물렸다. 대원군의 권위는 여지없이 땅에 떨어졌다. 그는 1894년 일본의 침략세력을 누르기 위해 최후의 수단으로, 한때 그가 탄압을 가했던 동학농민세력과 손을 잡고 반전을 시도했다. 전봉준의 손을 빌려 마지막으로 왕국을 지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또한 묵은 왕국을 지탱하기 위해 내치를 다져보려 했지만, 19세기 제국주의 열강 앞에 나무토막처럼 쓰러져야 했다.

그렇게 왕권을 다지기 위해 척족의 등장을 막으려고 했지만, 민비의 술수 앞에 크게 당해야 했다. 특히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열강에 놀아나다가 대원군은 결국 민비가 죽은 지 3년 뒤 79세의 나이로 망해 가는 왕국을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다.

어쨌든 그는 제왕이 아니면서 제왕의 권력을 누렸고, 왕통이 아니면서 왕통을 이어 주었다. 통치자로서의 그의 여러 면모는 영민하고 뛰어났다고 하나 새로운 시대를 보는 안목이 부족해서 비운을 겪은 불행한 노인이기도 했다. 이렇게 그에 대한 평가는 뚜렷하게 갈린다.

이런 대원군의 풍운사를 통해 용기와 결단을 고루 갖춘 뛰어난 인물이라도 시대의 운을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아무리 뛰어난 통치술을 가지고 있더라도 국내외적으로 밀려오는 대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것도 일깨워 주고 있다.

서원 철폐

비변사 철폐

사창제 실시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명성황후/190815   (0) 2019.08.15
⊙ 운요호 사건/190815   (0) 2019.08.15
⊙ 신미양요/190815   (0) 2019.08.15
⊙ 오페르트 도굴 사건/190815  (0) 2019.08.15
⊙ 병인양요190815   (0) 2019.08.15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