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작성일자; 2019.12.16.월요일,맑음

 

1950년6월25일 새벽,

한국 전쟁 혹은 6·25 사변이라고도 불리는 6.25 전쟁은 한반도에서

북한이 소련의 지원하에  북한군이 38˚선 이남의 남한에 남침을 함으로

서울은 3일만에 점령되었고

한달만에 낙동강 부근까지 국군은 후퇴하게 되었다.

이에 미국 주도로 안보리가 열려 유엔군이 파병을 결정하게 되었고,

1950년9월15일의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되찾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였으나,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다시 서울 빼앗겼다.

1953년7월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됨으로 3년1개월간의 전쟁은 종식되었고,

남,북한은 휴전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전후하여 극동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미국과 소련 등 열강의 견제와 타협에서 비롯한 한반도 분단의 결과이다.

1943년11월27일,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영국·중국 은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 시키기로 합의했으며,

 

1945년2월.

얄타 정상회담에서 미국·영국·소련는 미국·영국·중국·소련 등 4개국에 의한 일정기간의

신탁 통치를 거친 후 한국을 독립 시키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1945년8월8일,

 

 

미국은 소련의 조기 참전을 요청했으나 지연하여오다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지

2일 후 대일 선전 포고와 더불어 만주 일대에서 한반도를 향하여 진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 제일 가까운 부대가 '오키나와'와 '괌'일대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북위 38선을 미군과 소련군의 경계선으로 정하고,

1945년8월22일,

소련군은 북쪽인 평양에 진주했고,

1945년9월8일,

군 제24사단은 인천에 상륙하여 2일 후 남쪽인 서울에 진주했다.

이로써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하는 분단 국가가 되었다.

 

미·소 양측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분할 점령하고 있는 양측의 의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북위 38˚선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잠정적인 것으로 설정한 반면,

소련은 북위 38˚선을 정치적인 경계선으로 항구화시켜 그 북쪽을 소비에트화 하려고 했다.

 

미군과 소련군은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구성하고

1946년3월과 1947년5월,

서울에서 두 차례의 회의를 개최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함에 따라 한반도 문제는

1947년9월에 국제연합(UN)으로 이관되었다.

 

UN에서는 한반도에 'UN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여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

수립을 위해 1948년5월31일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1948년1월,

UN 한국 임시 위원단이 선거를 실시하기 위하여 한반도에 도착했으나 소련군 점령하의

북한 지역에는 소련의 입국 거부로 선거를 치룰수 없었으며,

1948년5월31일,

남한은 'UN 한국 임시위원단 의 감시하에 선거를 실시하여 의회가 구성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행정부를 구성하였고,

1948년8월15일,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했다.

1948년8월25일에는 이북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고,

1948년9월9일,

 

 

 

'조선 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정권 발족을 선포했다.

이로써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설정한 북위 38˚선이,

제2차 세계대전 후 형성된 냉전 체제로 대립하는 양극 체제의 국경선으로 변했다.

북위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에 2개의 독립된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38˚선을 통한 북한 무장공비의 침투사건과 남한 후방지역에서의 공산주의자(빨치산)들에 의한 전복활동으로 나타났다.


1946년9월의 서울 철도파업,10월 대구 폭동,1948년 제주 4·3사태와 그 후의 한라산 일대에서의 게릴라전 등을 비롯하여, 1948년10월20일의 여순 반란과 지리산·태백산 및 오대산

일대에서의 빨치산 활동 등으로 남한의 치안은 극히 불안한 상태에 놓였다.

1948년11월17일에는 오대산 부근 북한군의 침투로부터 시작하여 북한의 남침 전까지 38°선 일대에서도 10여 차례의 북한 공산군에 의한 침투가 있었다.

이와 같은 무장 세력에 의한 전복 활동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북한의 김일성은

전면적인 남침으로써 무력에 의한 남북 통일을 성취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1945년10월,

 

소련은 북한에 진주한 직후부터 조직적으로 북한의 군사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설 군사 조직을 해체하고 보안청를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1946년1월,철도 보안대 창설,8월 보안 기간 요원훈련소 창설,

1947년5월,보병 2개 사단과 1개 혼성여단 및 인민군 총사령부 창설을 거쳐,

1948년2월8일,육군 3개 사단과 해·공군의 기본체제를 바탕으로 '조선 인민군을 창설했다.

1948년12월25일,

조선인민군 창설 후 남한에 대한 북한의 군사적 우위를 확신한 소련은,

북한 주둔 소련군의 철수를 발표함과 동시에 미국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남한 주둔 미군을

철수시킬 것을 촉구했다.

1948년 후반부터 1949년8월 사이에,

중국 공산군 소속 한인 의용군 2만여 명의 편입으로 북한군 규모는 더욱 확대되었고,

1949년9월부터 남침 전까지,

소련으로부터 군사 원조로 북한은 병력과 전차,항공기 등을 보유하게 되었다. 

북한이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 그 세력을 급격히 팽창시키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남한을 둘러싼 정치적·외교적 상황은 매우 불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1948년5월14일,

북한이 남한에 대한 송전을 중단하자 남한 산업 시설은 가동이 불과하였다.

1949년9월까지,

중국 공산군은 국민당군(장제스 군대)을 몰아 내므로써 사실상 중국 내전을 종결지었다.

1949년3월,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해 조·소 경제 문화 협정을 체결했고,

1950년2월,

소련과 중국은 우호동맹 및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북한은 양 후원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

 

한편, 1948년부터 시작된 미군 철수로,

한반도 내의 남북한간의 군사력 균형은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북한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북한으로 하여금 남침을 할 수 있도록 자극했던 외교적인 사건이 계속되었다.

 

아래의 사건은 북한이 남침할 경우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을 하기에 충분했다.

첫째는,  

1949년3월,맥아더 장군이 영국 기자와의 회견에서 한반도가 미국의 방어선 밖이라는

것임을 암시하는 설명을 한 것과

둘째는,

1950년1월9일,

소액의 대한 군사 원조법안이 미 하원에서 부결된 사건은 국민이 한국 방어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셋째는,

1950년1월12일,

워싱턴의 신문기자 클럽에서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의 연설에서 극동에서의 미국 방어선은 한반도를 배제,대륙으로 부터 후퇴를 뜻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공표함에 따라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시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듯한 징후였다.

 

1950년6월25일,

북한이 남침을 감행하자 미국은 UN 안보리에 침략 문제를 제기했다

UN 안보리는 상임 이사국인 소련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북한의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적대 행위의 즉각적인 중지와 북한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즉각적인 철수 결의안을 통과

시켰다.

1950년6월27일,

북한이 6월25일의 결의를 무시하고 남침을 계속함에 따라 UN 회원국들은 북한군을 격퇴

시키기 위해 한국 정부에 가능한 모든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행정부와 트러먼 대통령은 한반도 내에서의 분쟁이 타이완이나 기타 지역으로 확산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미국 제7함대로 하여금 타이완과 중국 본토 간의 전투 행위를 차단

시키도록 하면서 한반도의 상황에 대처하려 했다.

트러먼 대통령을 보좌하는 국무부 및 국방부의 참모들은 미국의 참전을 위한 어떠한 의견도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상황만을 보고할 따름이었다.

1950년6월27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해·공군만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여 북한군을 남한에서
격퇴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1950년6월29일.
맥아더 장군은 한국 전선을 시찰한 후 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는 상황 보고를 했다.
1950년6월30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지상군의 투입을 명령함으로써 미국의 해·공군도 북한
지역에까지 작전지역을 확대했다.

1950년7월7일,

UN 안보리는 UN회원국으로 부터 UN군 사령관 임명의 요청에 의해

1950년7월8일,트루먼 대통령은맥아더 장군을 UN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UN군이 구성되고,

미국,영국,프랑스,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뉴질랜드,남아프리카공화국,터키,타이,그리스,

네덜란드,콜롬비아,에티오피아,필리핀,벨기에,룩셈부르크 등 16개국이 병력과

장비를 지원했으며,단일 지휘 체계하에서 국제 경찰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북한군의 남침이 개시된 1950년6월25일부터  인천 상륙 작전 개시 이전인1950년9월15일

 

 

까지 한국군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계속 퇴각했다.

사태의 급박성을 인식한 맥아더 장군은 긴급히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특수 임무 부대를 

오산 일대에서 북한 공산군의 남진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 뒤를 이어 '딘'소장이 이끄는 미 제24사단과 '워커'중장의 미 제8군 휘하부대의 계속적인 투입으로 북한군의 남진 속도를 둔화시킨 결과,

 

1950년8월경에는 낙동강을 경계로 하는 부산 교두보의 방어선을 구축하여 체계적인 방어를 할 수 있었다.

1950년9월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 UN군은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되었다.

1950년9월28일,

서울을 탈환하고 경인지역을 장악한 UN군은 보급로와 후퇴로를 차단함으로써 북한군의

주력은 거의 궤멸상태에 빠졌으며 UN군은 급속도로 북진을 계속했다.

UN군이 급속히 진격하여 38˚선에 접근하게 되자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 장군에게

북한군을 섬멸하도록 명령한 데 이어

 

1950년9월30일,

트루먼 대통령이 북한으로의 진격을 승인했으나 맥아더 장군은

1950년10월1일,

한국군만을 38°선 이북으로 진격시키고 기타 UN군은 38˚선에서 대기했다가

1950년10월7일,

UN 총회에서 UN군의 북한 진격을 허용하는 결의안이 통과된 후 북진을 했다.

1950년10월20일,UN군은 평양을 탈환하고

1950년10월26일,일부 부대가 압록강변에 도달했다.

1950년11월부터 1951년7월,
휴전 회담을 개시하기까지 북한군의 붕괴로 UN군이 북한 전지역의 점령이 임박하자
'중국 인민 지원군'이 개입함으로써 전쟁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중국 인민지원군의 '인해전술'로 인해 UN군은 북한으로부터 철수해

1951년1월4일,

서울이 또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나,미국 공군의 공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중국 인민지원군은둔화되어 UN군은 평택과 원주를 연결하는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1951년2월,

UN 총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했다.

1951년1월말,

차량 사고로 사망한 '워커'장군의 후임으로 미국 제8군사령관에 부임한 '리지웨이'장군은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해 서울을 재탈환하고,

1951년3월31일,

중동부 전선에서는 38˚선을 횡단하여 북진을 계속했다.

이때 맥아더 장군은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한 이상 전장을 한반도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중

국 본토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이와 같은 행위는 대통령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4월11일,

맥아더 장군을 모든 직위에서 전격 해임하고 '리지웨이'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때 부터 UN군측과 공산군측은 전쟁의 제한에 관한 묵시적인 합의하에 상호 대공세를

피함으로써 전선의 이동이 없는 진지전의 형태로 전환되었다.

 

휴전 회담으로 인한 소강 상태로 양측의 전선이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 이르렀을 때 미국은

한반도 내에서의 전력 낭비는 유럽에서의 소련의 침공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판단 아래

전투 종결을 희망했으며, 북한이나 중국의 의도와도 어느 면에서는 일치하는 것이었다.

1951년6월23일,

UN 주재 소련 대표 '말리크'가 미국에서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교전 당사자들이 38˚선을

경계로 전쟁 이전의 위치로 복귀할 것을 제의했다.

미국은 이를 휴전을 희망하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리지웨이 장군으로 하여금

1951년6월30일,

공산군측에 대하여 휴전 제의 방송을 하도록 했으며, 공산군측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1951년7월10일 부터,

개성에서 휴전 회담이 개시되었으나 회담 장소는 판문점으로 변경되었다.

 

휴전 회담중 가장 논쟁은

첫번째,

모든 외국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하자는 북한의 주장과 반대하는 UN군측의 주장이었다.

두번째,

양측의 경계선 문제로서 공산군측은 북위 38˚선으로의 복귀를 주장한 반면 UN군측은

현 전선의 유지를 주장했다.

세번째,

포로 교환 문제로서 공산군측은 모든 포로는 무조건 송환시킨다는 원칙을 주장한 데 반해,

UN군측은 희망자만 송환시킨다는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UN 군 포로 17만1,000명 가운데 약5만명은 북한이나 중국 등으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했다.

포로 송환 문제로 휴전 회담은 결렬 직전까지 갔으며 8개월 간 회담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1953년1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1953년3월,

소련의 스탈린의 사망으로 회담은 재개되고 포로 교환 문제도 합의에 도달했다.

양측은 현재의 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각각 2km씩의 비무장 지대를 설정하게 되었다.

1953년7월11일,

마침내 이승만은 휴전에 동의하였다.

1953년7월27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짐으로써 3년1개월에 걸친 전쟁은 중지되고 휴전이 성립 되었다.

1954년4월,

제네바에서 남한과 UN 참전 16개국,북한과 중국 및 소련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 회담이 개최되었으나,

한국과 UN 참전국측은 UN 감시하에 남북한 자유 총선거 실시로 민주적인 통일 정부수립을 주장한 데 반하여,

공산군측은 오로지 주한 UN군의 철수만을 주장함으로써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1954년6월,

회담은 결렬되었고,

남북한은 항구적인 평화가 아닌 휴전 상태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0.6.25 새벽에서의 남침으로 부터 1953년7월27일의 휴전협정까지

 

 

6·25전쟁은 3년1개월간 계속되었으며,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4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남한은 민간인 약100만 명을 포함한 약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은 100만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국군의 군인 전사자는 22만7,748명,미군이 3만3,629명,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수는 확인할 수 없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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